아침에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서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 無가 진주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맙소사, 날씨가 무척 화창해서 일출봉과 한라산이 눈에 선연히 들어왔다. 해무에 휩싸여 신비로움마저 겸비한 일출봉은 금세 눈에서 사라졌지만 한라산은 공항까지 가는 내내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서 올라야지!
그렇다. 나는 無가 진주에 다녀오는 동안 한라산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다소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막히지 않고 신호도 잘 걸리지 않은 덕에, 그리고 무엇보다 과속을 한 덕분에 생각보다 넉넉하게 공항에 도착을 했다. 無는 가벼운 걸음으로 공항으로 빠져들어가고, 나는 아침을 먹으려고 어제의 그 식당에 다시 갔다. 어리목으로 오르려면 그곳이 지리상 나쁘지 않은 위치이기도 하거니와 음식 맛도 괜찮았기 때문에.
약간 매웠지만 제법 맛있게 해장국을 비우고는 어리목으로 향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중산간의 날씨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등산화로 갈아 신고 가벼운 마음과 걸음으로 산행을 시작하는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다름 아닌 한라산이었고, 오르게 될 만세동산이나 윗세오름, 영실이 무척 기대가 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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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목 등산로 초입 |
등산길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숲길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차츰 고도를 높였다. 숲길이 끝나자 그때부터는 계단이 계속 이어졌는데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보기 좋게 만들어진 등산 안내판이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어느새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제비동산에 도착한 것이다. 하얀 구름이 가득 하늘을 메우고 있었고 구름과는 다른 흐림이 저 밑 제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어 아쉽게도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풍경이 아니었다. 사제비동산에서 만세동산으로 이어지는 구상나무 군락과 너르고 평평한 지형은 한라산의 해발을 잊게 할 만큼 평온해 보였다. 푸릇푸릇한 녹색의 향연들, 이에 질세라 구름의 쉴 새 없는 움직임. 데크를 걸으며 조금이라도 풍경을 놓칠까 나는 기쁘면서도 조급한 마음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많은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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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비동산에서 만세동산으로 |
그런데 구름이, 안개가 더욱더 백록담이 있는 주봉 일대를 강하게 에워싸더니 결국 주변의 모든 풍경을 압도해 버렸다. 덕분에 제주 일대를 굽어볼 수 있다는 만세동산 전망대에서는 휩싸인 안개만을 아쉽게 바라봐야 했다. 하지만 어쩌랴. 다시 발걸음에 힘을 붙여 윗세오름으로 향했다. 여전히 풍경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렇게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해 아쉬운 대로 윗세오름을 보며 컵라면과 초코파이를 사서 데크에 앉았다. 그런데 라면이 익을 동안,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안개가 조금씩 밀려나더니 기어코 웅장하고 다소 외로워 보이기까지 한 한라산 주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흥분한 나는 라면을 급하게 들이키고 앉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다가 참지 못하고 남벽분기점을 향해 걸었다. 점점 주봉과 가까워지는 걸음은 주위의 황홀한 풍경이 더해져 한없이 가벼워졌고, 내 손은 한 장이라도 더 주변 일대를 담으려고 분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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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세누은오름, 윗세오름은 오름의 이름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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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오름 대피소, 컵라면.물.초코바 등을 판매한다 |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이에서 본 한라산 주봉은 가히 아름다웠다. 탄식을 몇 번이나 뱉었는지, 과연 내게 그러한 풍경이 존재하기는 했는지 벌써 아련해지는 그 모습들은 돈내코 방향으로 넓게 펼쳐진 한라산 남쪽 일대까지 이어지며 나를 거의 황홀경으로 밀어 넣었다. 사랑스웠다. 한라산과 그것이 곧 제주인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더 갈 수는 없었다. 웃방애오름을 끝으로 다시 발걸음 돌려 윗세오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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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벽분기점으로 가는 길에서의 한라산 주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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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방애오름에서 보는 한라산 주봉 |
이제는 편안한 감동으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한라산 주봉을 수없이 쳐다보며 걷다 보니 금세 윗세오름 대피소였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곧장 영실로 걸음을 이었다. 그 전에 유홍준이 영실을 다룬 글을 다시 읽었는데, 그러고 나서 영실을 걸으니 그가 왜 제주 풍경의 엄지로 영실을 꼽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봄에 진달래가 만발한 영실 일대의 풍경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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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한다는 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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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오름과 한라산 주봉 |
오백장군봉의 끝자락에 다다르니 남쪽으로 서귀포 일대의 풍경이 환하게 열렸는데 아쉽게도 풍경은 얼마 가지 못해 안개에 갇혀버렸다. 그렇지만 어렴풋 바다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아쉬움은 더 커지는 동시에 반드시 좀 더 좋은 날에 영실에 와야겠다는 다짐을 절로 하게 됐다. 그런데 중산간 이상의 제주에 '좀 더 좋은 날'이라는 게 과연 성립될 수 있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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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열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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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오백장군봉 |
버스를 타려고 조금 서둘러 하산을 했다. 그런데 버스가 영실매표소까지 올라오는 줄 몰랐던 나는 열심히 달린 덕에 20분이나 여유가 있어서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세수도 하며 등산열과 그동안의 희열을 조금은 식힐 수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몸국이 그리고 물회가 먹고 싶었다. 애월로 향했다. 삼영식당으로 가서 자리물회와 몸국을 주문했는데 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 자리물회는 전어처럼 뼈가 씹힌다고 미리 말씀을 해주셨다. 실제 자리물회는 모습까지 전어와 비슷했는데 씹히는 맛은 전어보다 강했다. 뼈도 두꺼웠고. 하지만 시원한 맛에 거의 들이킬 수준의 속도로 급하게 물회를 먹어치웠다. 참기름을 많이 넣어 물회 특유의 시원함과 자리의 고소함을 좀 더 온전히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 반면 몸국은 대단했다. 우선 그 양부터 그랬고 맛도 어제 먹은 것보다 진했다. 고기도 몸도 한가득 들어 있어서 밥을 조금 남겼는데도 다 먹고 나니 배가 많이 불렀다. 이것이 몸국이구나.
이제 공항으로 갈 시간. 아직 배는 든든하다.
2014.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