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9

겨울, 단양

여행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국내를 하루 이틀 다니는 건 여행이라기보다 긴 외출처럼 인식된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이젠 일상과 여행이라는 경계가 무너진 결과라고 해야 할까? 
우리 나름의 성공적인(?) 영화제를 마치고 올해 마지막 여정은 단양으로 잡았다. 예약해둔 숙소는 단양읍내에 있었고, 일정을 맡은 나는 유홍준의 답사기(남한강편, 창비)를 읽으며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한참 지도를 그리고 있었을 때 문득 떠오른 현실감, 아, 일정이 짧다. 

몇 해 전이었을까, 나는 부모님과 단양에 있는 구인사에 갔었다. 험준한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은 그곳이 위치한 지대보다 그곳의 표면을 철저하게 뒤덮은 콘크리트가 내겐 더욱 놀랍게 각인 되었다(그 단단한 덩어리들!). 그리고 절을 빠져나와 단양으로 향하는 길은 더더욱 놀랍게 각인 되었으니, 그 길이 바로 유홍준이 말하는 영춘가도(永春街道)이다. 

영춘가도는 50리 옛길이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그 길이 신작로로 닦였고, 현대로 들어서면서는 2차선 찻길이 되었지만 영춘가도는 아직도 찾아오는 사람이 뜸하여 길가로 식당, 여관, 가겟방이 들어서는 관광지의 상처를 받지 않았다. 길은 줄곧 남한강을 따라가며 강물이 비집고 내려오는 육중한 산줄기가 둘러 있고, 길가 산비탈엔 이따금 호젓한 마을과 외딴집들이 나타난다. 가로변엔 언제 심었는지 플라타너스와 벚나무가 제법 장하게 자라 늘어서 있고, 넓은 강둑엔 옥수수나 감자 같은 강원도 작물들이 재배되며 마을 입구 길가엔 접시꽃과 해바라기 같은 낯익은 풀꽃들이 철따라 꽃을 피우고 있다. 아, 전국을 포클레인으로 파헤쳐버린 대한민국 천지에 이런 옛길의 잔편이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2015년 초여름, 이 글을 쓰기 전에 영춘가도가 혹 변하기라도 했는가 확인하기 위해 차를 몰고 학생들과 다시 찾아갔는데 지나가는 차마저 드문 영춘가도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영춘은 여전히 영춘 사람들이 산자락에 기대 살며 강변과 산비탈에 부쳐 먹을 곡식과 채소를 가꾸며 사는 우리의 산촌이었다. 
_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남한강편>, 창비, 222쪽.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는 구인사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동시에 떠올렸고, 이번에 이곳을 꼭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고서는 지도를 살피는데 자꾸만 눈길이 가는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영월이었다. 청령포, 장릉.. 이런 곳에 자꾸 눈길이 멎었는데, 한 번 그렇게 생각이 그 길로 접어드니 방향을 트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머릿속으로 동선을 짰다.

서울 - 제천(장락동 칠층모전석탑) - 영월(청령포, 장릉) - 영춘(북벽, 온달산성) - 영춘가도 - 단양(숙소)

일박이일 일정에 과하지만 우선 머릿속에 담아두고 서울을 나섰다. 하지만 예정보다 늦은 출발. 게다가 날씨가 너무 청명하였기에 나는 고속도로를 달려 재빨리 제천에 닿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남한강을 따라(찾아) 나서는 길이니 처음부터 한강의 물결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러니 우리의 방향은 남양주를 지나 6번 도로를 따라 양평을 향했다. 저 건너 미사리와 덕소를 지나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통과해 남한강을 따라 달리다가 양평에서 45번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제천에서 점심을 먹고자 했던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괜시리 급한 마음에 칠층모전석탑마저 외면한 채 영월을 향해 38번 도로를 달렸다. 삽십 분이면 넉넉한 거리였다. 그래도 점심을 거를 수는 없어 가는 길에서 잠깐만 외도를 하면 있다는 곤드레밥 식당에 들르기로 했다.
먹어 보았던 곤드레밥 중에 가장 알찬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새 네시가 다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영월은 포기해야 했다. 어쨌거나 이번 여정의 가장 큰 목적은 영춘가도이기에.
그래도 한 곳은 둘러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조금 속도를 내어 영춘가도(522번)를 달려 온달산성에 갔다. 이미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네시 반이 다 되었고, 온달관광지 주차장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산성 입구에는 동절기 세시 이전 입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무시. 우린 급경사지를 따라 조성된 데크길을 타고 산성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 오르지 않았어도 그곳이 얼마나 급경사지이고, 골짜기인지는 주변 풍경이 말해주었다. 벌써 저 아래에 위치하게 된 온달관광지 세트장과 굽어 흐르는 남한강을 묵묵히 내려다 보는 영춘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이내 더 멀어지고 더 아득해져 갔다.
일킬로미터 남짓한 길을 오르니 온달산성의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성은 얇고 작은 돌을 촘촘하게 쌓아 올린 형태로 묵직한 자연석으로 축성한 서울성곽이나 수원화성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둘레 길이가 680여 미터로, 성안에 들어서면 한눈에 거의 잡힐 정도로 규모가 아담하다. 산세가 깊어 칠팔부 능선 이상이 아니고서는 볕이 거의 들지 않아 사위는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성안을 한바퀴 돌고 다시 내려오니 이미 주차장엔 어둠이 가득하고 가로등이 빛나고 있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에서처럼, "밤이 내리고 있었다."

2015/12/27

타인의 취향 Le Goût Des Autres



아녜스 자우이 감독, 1999년
이 영화를 내가 알게 된 건 대학시절 우연한 기회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언제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이끄는 서로의 어긋난 취향 대결이 '다름'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우리 문화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던 기억은 물론, 잊을 수 없었다. 그런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을까, 이 영화는 무려 십 년이 지난 2009년이 되어서야 우리 나라에 수입이 돼 이대에 있는 아트하우스모모에서 개봉을 하게 된다. 개봉 당시 영화를 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때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영화 자체로서 큰 반향을 갖기에 상업적 요소가 둔하기 때문에 속칭 흥행작은 아니었을 걸로 쉬 짐작할 수 있다.
만일 본인이 좋아하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고, 같이 영화를 보고자 하는 이가 그와는 다른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상대의 취향에 동참해줄 의향이 있는 이들에겐 이 영화가 흥미롭게 전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는 그저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어떤 계기'는 존재한다.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영화를 첫번째 '나의 취향'으로 꼽은 건 '다름'에 대해 취하고 싶은 나의 입장을 대변해줄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a와 y의 자리에서 나눴던 작은 대화 생각이 난다. 당시 우리는 '인정'과 '이해'의 차이에 대해 나름 설전이 오갔는데, 나와 y는 인정과 이해는 다른 것이라 여겼고, a는 인정을 이해의 후속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당연히 a는 상대를 이해해야만 인정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물론 나는 a의 견해를 존중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그 전에,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불필요한 노력을 줄이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인정하는 태도도 필요한 게 아닐까. 
여튼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는, 처음 볼 때보다 슬프게 다가왔다.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무릇 문화예술이란 우리 삶을 단면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제1회 돈암쌀롱영화제




기획  用  /  포스터 제작  無

기획의 변

이 동네에 산 지도, 정릉에 살 적을 포함하면 12년이다. 
 그동안 내 사는 동네 '돈암'에 정이 들 만큼 들었고, 
그로부터 기인한 보이지 않는 손에 끌려 여태 '돈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동네든 
오래 살다보면 정이 들기는 매 한가지이겠지만, 
어떻게든 끈끈하게 맺어진 동네와의 관계를 
쉽게 뿌리치기에 나는 너무 오래 동네에 살았다. 

작년 이맘때, 고향에 사는 친구들 몇이 서울에 왔다. 
동네 횟집에서 겨울이면 이내 생각나는 방어회로 
일차를 마시고, 이차는 맥주와 함께 우리 집 거실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우리는
각자 취향이 그윽한 곡들을 듣기 원했고, 나는 에어플레이로 
그들의 요구에 답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우리의 노래는 
쌓여가고, 취기는 노래의 리듬을 타고 출렁거렸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그렇게 시나브로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해장을 하고 집을 나서던 친구 L이 던진 한마디. 

"잘 놀고 간다, 돈암쌀롱!"


그렇다. 돈암쌀롱의 기원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無用이 만나던 초반 나눴던 영화 얘기에 
왕가위 감독이 등장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각자의 선호 영화를 하나씩 들다가 이참에 
언제 한 번 '왕가위 특별전'을 하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러니까 이번 돈암쌀롱영화제는 오래된 제안의 
한 변형에 불과할지 모르나, 앞으로 (아마도) 지속될
소박한 출발에 은은한 의미로서의 방점을 찍는다.

2015/11/29

BUENA VISTA SOCIAL CLUB




8년 전 여름 무렵, 나는 늦가을 여행을 계획했고 목적지는 쿠바였다. 처음엔 2주 정도로 계획한 기간이 쿠바를 목적지로 확정하면서 한 달로 두 배가 늘었다. 그때부터 나는 틈만 나면 여행 정보를 찾기 위해 도서관 여행 코너를 들락거렸고, 마땅한 책이 없자 인터넷을 뒤지기도 하였는데 그러다 알게 된 영화가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하고 라이쿠더가 음악을 맡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었다. chan chan이 흘러나오며 화면은 아바나의 해안도로, 말레콘을 더듬는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 노장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말레콘의 부드럽고 거센 파도를 따라 넘실거린다. 2007년 11월 한 달 동안 나는 쿠바에 있었다.

나는 쿠바에 있었다. 

8년이 지난 오늘, 2015년 11월. 나는 이수에 있는 작은 극장 맨 뒷좌석에 앉아 8년 전 컴퓨터 화면을 통해 쿠바여행을 고대하며 보았던 그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았다. 디지털 리마스터링 재개봉. 사운드트랙과 라이브 음반은 꽤 자주 듣는 편이지만 영화를 다시 보는 건 음악을 듣는 것과는 조금 다른 과정이다. 디브이디 타이틀도 있고 프로젝터도 있지만 영화를 집에서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건 또 다른 경험이다. 단지 극장에 걸려 있는 영화의 포스터만 보아도 여전히 나는 가슴이 뛴다. 
올드카에 올라탄 꼼빠이 세군도가 아바나에 있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물어 물어 찾는다. 장면은 암스테르담 공연장으로 이어지고 환호 속에 등장한 노장들은 chan chan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말레콘을 넘실거리는 파도, 아바나. 영화가 시작되고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여행의 추억, 아니 추억이라기보다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딜 가나 길가에 무수히 나와 모두 아는 사람인 듯 반갑게 간섭하며 말을 거는 쿠바인들, 세월이 가득한 얼굴을 한 노인의 편안한 표정, 어디 굴러나 갈까 싶은 올드카들, 눈앞에 마주하고 나서야 실감나는 말레콘의 파도, 날아가는 새. 이곳 쿠바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런 스치는 감정을 나는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극장 맨 뒷좌석. 영화의 시작과 함께 나란히 포개지던 8년 전의 감정은 영화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옅어지며 결국 사라져 갔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피할 수 없이 2015년 11월에, 이틀만 더 지나면 12월인 현실의 시간 속에 문득 서 있었다. 현실이었다. 내가 믿지 못하는 건 오히려 8년 전의 시간과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2015/11/16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1915년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Robert E. Park)는 <도시: 도시환경에서 인간행태를 조사하기 위한 제안들(The City: Suggestions for the Investigation of Behavior in the City Environment)>이라는 짧은 글을 발표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이다. 사회학, 지리학, 인류학 등 도시와 관련된 사회과학 연구의 작은 출발점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어 도시사회학이라고 불리게 된 시카고학파의 일련의 연구는 이후 1938년 루이스 워스(Louis Wirth)의 논문 <도시성이란 생활양식(Urbanism as a Way of Life: The City and Contemporary Civilization)>에서 도시생태학으로 발전한다. 'city'에서 'the urban'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인데, 우리말로는 둘 다 도시란 뜻이다. 하지만 'city'는 성(城)과 같은 물리적 중심에 가깝고 형용사에 관사를 붙인 'the urban'은 '도시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모든 도시적 행동의 집합이다. 우리가 도시사회를 보기 위해서는 공간뿐 아니라 새로운 인간 행동의 양태들을 보아야 한다는 쪽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 연구는 한 세기 전의 도시 연구가 출발했던, 출발해야만 했던 상황과 비슷한 이유에서 출발한다. 전 세계에서 등장하는 거대도시들, 우리는 이 도시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작동하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사람, 자본, 물건의 이동은 말 그대로 전지구적이며 잘사는 곳이나 못사는 곳이나 개발의 광풍을 맞았다. 정치학자들은 이를 신자유주의, 세계화(Mondialisation)라는 말로 설명하고 지리학자들은 특히 대도시화(Metropolisation)라는 공간적 현상에 주목한다. 하지만 도시를 인구 몇 만 이상으로 쉽게 정의할 수 없었듯이 메트로폴리스를 단순히 수백만 명이 사는 대도시로만 생각할 수 없다. 도시적인 것의 탄생을 목도하던 때처럼 우리는 메트로폴리스적인 것을 정의하고 상상해야 한다. 도시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어느 순간 메트로폴리스가 되는데, 그 순간을 결정하는 힘들을 보는 것, 이 부분이 메트로폴리스 연구의 출발점이다.
서울은 메트로폴리스인가? 우선 서울은 독특한 도시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 풍경을 간직했던 서울은 순식간에 시카고학파의 연구가 주목했던 '도시 공간'을 만들어냈고, 또 50여 년 만에 메트로폴리스로 성장하였다. 상경한 시골 사람들이 도시인으로 변하고 그 자식들이 세계도시 서울에 거주하는 이 역사에서 우리는 도시적인 것과 메트로폴리스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메트로폴리스는 그리스어로 '어머니의 도시', 즉 母도시란 뜻이다. 그렇기에 자식의 도시인 식민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이는 아주 오래전의 용법일 테고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개척을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어원에 대한 참고는 학문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서울은 메트로폴리스인가라는 질문은 서울의 식민지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설정은 서울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도시적 삶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 그들의 성향은 도시 안에서 여전히 비도시적인 것을 꿈꾸었고, 근대화라는 깃발 아래 도시를 만들고 싶었던 욕망들, 만들 수 있다는 신념들은 도시 공간을 바꾸어갔다. 또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과 물자들이 이동하며 국제도시 서울을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미쳤고, 이런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작은 마을까지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한 서울은 도시, 나아가 세계도시로 빠르게 변해왔고 그 변화의 역동을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 '솔직하게' 드러낸다. 서울의 특수성이 메트로폴리스라는 거대 기계의 탄생과 작동 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이다.

_임동근.김종배,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6~8쪽, 반비, 2015.

2015/11/08

물어본다

십오 년 만에 이승환의 공연을 보았다. 단풍이 흐드러진 춘천의 가을은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시내 곳곳이 다음 날 열릴 마라톤대회 준비의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90년대, 그러니까 잘 나가던 가수들 앨범이 백만 장이니 이백만 장이니 하며 엄청나게 팔려나가던 때, 나도 열렬히 그 대열에 동참했던 시절이었다. 첫 이승환의 앨범은 김동률이 만든 ‘천일동안’이 담긴 앨범 <휴먼>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친구 녀석이 다니던 대학의 캠퍼스에 축제 기간이라고 해서 놀러를 갔고, 마침 노천극장에서 크라잉넛과 이승환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 물이 가득 든 플라스틱 백팩에 장착된 물총을 들고 나온 이승환의 비주얼을 잊을 수가 없다. 관객들을 향해 긴 물줄기를 쏘아대던 그의 익살스런 표정과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가 한 시간 남짓 펼쳤던 공연은, 아, 더욱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의 ‘세월이 가면’의 가사처럼, 어느덧 이렇게 십오 년이란 세월이 간 뒤 다시 만나게 된 이승환의 공연이었다. 춘천.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옛 춘천어린이회관은 의암호를 비스듬하게 등진 채 낮게 웅크리고 있었고, 그곳을 매입해 문화공간 ‘상상마당’으로 탈바꿈시킨 케이티엔지에서는 ‘상상실현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전시와 공연이 함께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춘천 시내에서 숯불닭갈비를 배불리 먹은 우리는 마땅히 짐을 맡길 곳을 찾지 못한 채 일찍 공연장으로 향했다. 의암호가 눈앞에 펼쳐진 벤치에 자릴 잡고 앞에는 돗자리를 깔았다. 사람들은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즐기고 있었고 우리는 각자의 독서에 빠졌다. 오후의 시간은 한참 너그러웠다. 

술탄의 공연을 시작으로 혁오, 국카스텐, 이승환으로 이어지는 괜찮은 라인업. 쌍둥이 건물을 품고 있는 야외극장의 관람석은 거의 정확하게 서쪽을 향하고 있어 오후가 저녁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더욱 실감나게 했다. 기대했던 혁오의 공연은 사운드의 미숙함으로, 그리고 그 미숙함을 애써 손대지 않은 아쉬움으로 결국 안타까움이 남았다. 오혁의 탄탄한 보컬도, 멤버들 연주의 성실함도 그래서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카스텐 공연 때는 미숙했던 사운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더욱이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달빛을 머금은 어둠이 내리자 공연장은 점점 더 열기에 휩싸여 갔다. 게다가 마지막 무대는 이승환이었다. 십오 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그의 ‘공연법’은 오십이 된 그의 나이와 함께 더욱 무르익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어떻게 저 작은 체구에서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올까’가 아니라, ‘어떻게 쉰이 지난 나이가 되도록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여전할까’라는 물음을 가져야 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이승환의 공연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 중 눈시울을 시큼하게 했던 한 곡이 있었으니, 그 곡은 나와 간혹 좋은 노래의 유튜브를 공유하던 친구 H녀석이 오래전에 알려준 곡으로,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들을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던’ 곡, ‘물어본다’이다. 이승환이 활동한 세월 동안 추억이 깃든 노래가 한두 곡은 아니지만 그날 ‘물어본다’의 연주가 시작되자 나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리고 그러한 눈시울을 한 채 목이 터져라 노랠 따라 불렀다. 연주가 끝난 뒤 밀려들었던 허탈감도 섬세하게 기억난다. 아마 다른 공연장에서 다시 이 곡의 연주를 듣게 되면 몸이 이날의 섬세했던 감각을 불러들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춘천, 가을, 시간이, 세월이 깊었다. 





2015. 10. 24. 춘천에서의 일기

2015/11/07

어린 왕자

'어린 왕자'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사막과 우물로 표상되어 있다. 삶은 권위와 계산과 술주정과 반복의 연속이다. 그것은 사막과 같이 메마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 사막은 그것이 메마르기 때문에 더욱 귀중하다. 그것은 우물의 존재를 더욱 신비화시켜줄 수 있다. 우물은 구원이다. 메마른 삶속에 우물로서 표현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메마른 삶은 더욱 가치 있다. '어린 왕자'의 표현을 빌리면,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의 우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가 "길들인" 어떤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기의 삶의 한 부분을 이루도록 길들인 어떤 것은 한 삶의 우물을 이룬다. 그렇다면 길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삶과 생존에 아무런 관련도 없던 것을 자기 삶의 반경 속에 끌어넣어서 자기의 삶의 일부분으로 만든다는 것, 그것이 길들인다는 행위이다. 가령 사랑이라는 것과 비슷한 행위이다. 자기 밖에 존재하는 숱한 대상 가운데서 자기와 관련을 맺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길들인다는 것은 한 삶의 총체이다. 한 인간의 삶은 그가 길들인 것의 총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삶은 그가 길들였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사막과 우물이라는 명제를 보다 산문적인 것으로 바꾼다면 현실과 환상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현실과 이상, 풍속과 신화 등으로 번안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의 건조성, 객관적 현실로서의 삶의 메마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자기 삶의 반경 속에 끌어넣어 길들이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 행위를 통하여 무의미한 사건, 대상들은 빛나는 의미체로 변모한다.  
 
_김현, <어린 왕자> 139~141쪽, '옮긴이 해설', 문학과지성사.  

말들의 풍경

서가에 꽂혀 있는 김현 전집 가운데서 아무 거나 뽑아 들어 띄엄띄엄 읽노라면 문득 가슴이 울렁거린다. 거기에 내 글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나 그 눈길을 담아내는 문체에서나 내 글은 김현의 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리고 격조와 깊이에서 도저히 김현의 글과 견줄 수 없지만, 그 근원은, 행복해라, 김현의 글이었다. 

_고종석, <말들의 풍경> 323쪽,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 개마고원.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변화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포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팽창하고 수축하는 우주가 바로 우주의 본질이듯이. 내 밖의 풍경은 안의 풍경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안과 밖은 하나이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의 참뜻은 바로 그것이다. 그 하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 하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을 낳는 자리에 있다. 그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 자리는 아무 곳에도 없다. 있는 것은 없음뿐이다. 그 없음은 있는 없음이다. 그 있는 없음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욕망, 아니 충동뿐이다. 욕망은 교활하게 자신을 숨긴다. 욕망은 개인의 탈을 쓰고 나타나, 자기의 흉포성을 개인적 외상으로 바꿔치기한다. 말들의 풍경은 그런 욕망의 노회한 전략의 소산이다. 그것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는 거꾸로 들어가야 한다. 개인적 외상을 따지고, 거기에서 개인성의 특징을 찾아, 그 개인성을 만든 노회한 욕망을 밝혀내야 한다. 그 욕망은 물론 말들의 풍경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들의 물질성 안에 있다. 아니 말들의 물질성 자체가 바로 욕망이다. 그 물질성을 갈가리 찢어 없앤다 하더라도, 말들의 물질성의 흔적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흔적마저 없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말들의 검은 구멍은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없다. 있는 것은 흔적들이다. 그 흔적들이 욕망이며, 충동이다. 그 흔적들 때문에 나는 있으며, 나는 없다. 나는 없는 있음이며, 있는 없음이다. 김지하의 움직이는 무야말로 바로 그것의 다른 말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너와 달라야 하고,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너와 같아야 한다. 나는 너와 같이 싸우고 사랑하지만 네가 아니고, 너는 나와 같이 싸우고 사랑하지만 내가 아니다. 너와 나는, 무서운 일이지만, 흔적들이다. 욕망만이 웃는다. 불쌍한 개인성이여, 너는 네가 너를 강력하게 주장할 때, 네가 아니다.

_김현, <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말들의 풍경> 211~212쪽, '김현 문학 전집 6', 문학과지성사.   
 

꿀벌의 무지

꿀벌은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당연히 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날갯짓을 함으로써 정말로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얼마나 신빙성 있는 말인지 모르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꿀벌의 무지와 같은 것이다.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대학 다닐 때부터 글쓰기는 곧 영어로 쓰는 것을 의미했고, 한 번도 우리말로 글 쓰는 것에 관심을 가지거나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거의 의도적으로 책도 우리말로 된 것보다는 영어로 된 것을 더 많이 읽었고,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지금도 내가 쓰는 글의 대부분은 영어이다. 그러나 나는 꿀벌과 같이 그냥 무심히 날갯짓을 한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재능이 아니라 본능이다. 그래서 머리 속에 있는 말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고르지도, 다듬지도 않고 생긴 그대로 투박한 글로 옮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악몽은 항상 내 몸과 다리를 지탱해 주는 목발, 그리고 보조기와 연관된 것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길바닥에 앉아 있고, 사람들은 길을 가다 말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지만, 목발과 보조기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다. 이 글들을 책으로 엮으면서 꼭 그와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나는 땅바닥에 앉아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나를 에워싼 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얼른 일어나 도망가고 싶지만 일어설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당혹감. 너무 부끄러워 당장이라도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책을 엮게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재능도, 재주도 없으면서 '꿀벌의 무지'만으로 쓴 끌들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스스로 날지 못하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 나의 무지와 만용에 스스로 갈채를 보낸다. 못한다고 아예 시작도 안 하고, 잘 못한다고 중간에서 포기했다면 지금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_장영희, <내 생애 단한번> 6~7쪽, 샘터  
 

2015/10/23

가장 먼 여행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머리 - 가슴 - 발>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한 학기 동안 공부할 순서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그림은 강의 내내 수시로 불러낼 것입니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의도 여기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을 뜻합니다. 애정과 공감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세계 인식과 인간에 대한 성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실천이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_신영복, <담론> 18.19.20쪽, 돌베개 

2015/10/11

사라진 몸을 회복해 가는 기록

지난 밤, 에이트리 5주년 모임에서 두 개의 케이크로 두 번, 4주년 축하를 했다. 내 몸은 술에 절대적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니 당연히 기억도 없다. 헌데 누나 식구들과 우리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해서 한없이 누워있을 수도 없었고, 오후에는 가평엘 가야 했다. 윤아가 자는 동안 효진이 밥을 먹이며 겨우 한두 젓갈 식사를 했다. 기차는 두시십육분. 누나 식구가 돌아간 게 한시 십오분쯤.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몸은 무슨 상태라고 말하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아예 상태가 없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돗자리도 챙기고, 외투도 챙기고, 無가 사온 티셔츠를 입고 부랴부랴 현관을 나서는데 속이 좋지 않았다. 無는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었고 나는 튀어 들어가 변기를 붙잡고 구토를 했다. 몇 점 먹은 고기가 그대로 쏟아져 나오더니 변기에 고인 물을 기름기 범벅으로 만들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구토를 했으니 이제 좀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출발. 한시 오십사분. 열차 출발시각까지는 이십이분이 남았다. 무시할 수 있는 신호는 무시하기로 했다. 세 개 정도를 무시했다. 청량리역 뒤편에 주차를 한 시각이 두시 십사분. 이분 남았다.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슈욱, 세이브. 그런데 뛰어서 그런가, 속이 또 안 좋았다. 화장실에 가서 변기를 붙잡고 이번엔 눈물을 찔끔 흘리며 구토를 했다. 안 좋아하는 느낌의 구토다. 입을 헹구고, 자리로 돌아가 無에게 엎어졌다. 커피는 늦은 와중에 왜 내려왔는지, 전혀 생각이 없었다. 해장은 무슨. 잠들기 전, 이게 중요하다. 無가 어떤 감각에서였는지 생각을 해내고서는 말을 했다. "우리 표는?" 이런. 표란 우리가 가고 있는 가평에서 열리는 째즈페스티벌의 초대권으로 며칠 전 L이 누가 준 건데 못 간다며 내게 다시 준 거였다. 확실히 정신이 없었는지 - 몸이 없으니 정신이 있을 수가 있나! - 나는 괴상한 발상을 했다. 옆집에 사는 누나에게 집에 고스란히 모셔져 있는 초대권을 사진 찍어 보내라고 하고 매표창구에 들이밀어 보는 것. 지금 생각해도 괴상하다. 역시 인간이란 '몸'이 바로 서야 한다. 無는 옆에서 나보다 앞서 갔다. 주최측에 전화를 걸어 나의 몸이 없는 상태의 괴상한 발상을 그대로 문의하고 있는 거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어찌 할 생각을 했을꼬. 그러고 보면 無도 몸이 좀 없는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될 리가 있나. 역시 안 된다는 대답. 이제 잠이 들었다. 오늘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잠이다. 꿈 없는 잠. 깼더니 정면의 전광판에 선명한 글씨로 다음 도착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남춘천'이라고. 창밖을 보니 익숙한 풍경. 강촌이었다. 無를 흔들어 깨웠다. 아니 깨워서 뭐하나. 춘천까지 가야 하는 걸. 버스도 아니고. 우린 우리가 몸이 없음을 실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춘천에 가서 자전거나 타자고 했다. 몸을 회복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처럼 여겨졌다. 즉, 좋은 발상. 無도 잠결이었는지 선뜻(?)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이 주 후에 춘천에 올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평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차피 표도 사야 했기에, 춘천역에 내렸다. 플랫폼에 앉아 기분이 상쾌해지는 날씨에 조금 넋을 놓고 있었다. 역을 빠져 나가며 보니 자전거 대여소가 눈에 띄었다. 가서, 페이퍼 한 장을 쓰고 자전거 두 대를 빌렸다. 네 시간에 만팔천 원. 세시 반이었으니 일곱시 반에 반납. 서울로 돌아갈 열차는 가평에서 아홉시 이십일분에 출발이었으니 춘천역에서는 아홉시쯤 될 터였다. 허나 조금 라이딩을 하다가 쉬면서 열차표를 알아봤더니 여덟시 열차에 마침 자리가 나서 가평發 열차는 취소를 하고 다시 예매를 했다. 날씨도 좋고, 열차표도 쉽게 구하고, 뭔가 잘 풀리는 듯한 기분. 제주에서부터 자전거 노래를 불렀었는데 뜻밖의 춘천에 와서 자전거를 타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물론 그보다 몸이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기운이 느껴져 그랬지만. 그렇게 의암호를 따라 삼십분쯤 탔을까.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반대편으로 향하는 몇몇 라이더들은 우비를 갖추고 있었다. 약간 출출하기도 하고, 마침 휴게소가 있어 비도 피하고 사발면이나 먹을 생각으로 들어갔다. 카페였다. 음료와 식사 대용으로는 햄버거를 팔고 있었다. 겨우 몸이 상태를 찾아가고 있는데 햄버거라니. 애써 커피도 내려왔는데, 라고 생각하니 고를 게 없었다. 그래서 시킨 게 녹차. 생각보다 신선했고 양이 많았다. 카푸치노를 시킨 無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읽고 있었다. 여전히 몸이 없다고 느끼는 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비가 그친 것 같았다. 다섯시가 조금 못 되어 다시 라이딩. 기차 시간만 생각했지 해가 지면 어두워질 거란 생각을 왜 못했는지. 그래도 지도를 보며 의암호를 따라 계속 달렸다. 서쪽으로 잔뜩 밀려난 오늘의 해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직선으로 의암호와 춘천을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다리를 하나 건너 이제 의암호 너머로 춘천 시내를 바라보며 달렸다. 파일을 박아 만든 데크 구간은 바퀴가 구르는 소리와 함께 기분을 한층 묘하게 했다. 몸이 더욱 반응을 하는 듯했다. 그래 나는 기력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는데 이제야. 바닥에 농기계&자전거 겸용이라고 쓰인 제방길을 따라 달리는데 서쪽에서 가까운 곳은 이제 볕을 못 받고 의암호 너머 춘천 시내만 겨우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무지개다. 흐릿한 하늘을 크게 가로지르며 무지개가 솟아 있었다. 




무지개는 눈에 분명히 보이지만 나는 늘 무지개가 시작되는 지점을 궁금해하곤 했다. 오늘은 아파트 단지 꼭대기에서부터 솟아오른 듯 보였다. 하지만 조금을 더 달리니, 그래서 시선이 달라지니 또 다른 곳, 저 산 중턱쯤, 헷갈렸다. 무지개는 어디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해가 진다. 안장을 잔뜩 올리고 기어를 최대한 낮춰 최소한의 운동으로 달리고 있는 나와 달리 짐을 분산하기 위해 바구니 있는 미니벨로형의 자전거를 고른 無는 바퀴가 작아서인지 나에 비해서는 부지런히 패달을 밟아야 했다. 네 배니 다섯 배니 하며 無가 투덜거렸다. 몸이 지치고 있다는 징조였다. 그러고 보니 無의 몸도 언제 자릴 잡았는지, 이제 지치고 있었다. 날은 더욱 어두워지고. 無에게 있어서의 또 다른 변수는 나보다 엉덩이에 살이 지나치게 부족해 패달을 부지런히 밟는 만큼 안장에서 통증을 느낀다는 것과 부지런히 패달을 밟은 덕분에 물기가 묻은 타이어의 물이 한 줄로 無의 엉덩이 부근을 적셔버렸다는 것. 그렇게 無는 지쳐갔다. 어두워졌다. 게다가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왜 비가 내릴 수도 있다는 가정은 하지 못했는지. 낭만에는 젖어도 비에 젖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결국 無는 안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요상한 우리의 아이폰은 각각 10%, 26%에서 갑자기 전원이 꺼져버렸기에 보이는 곳에 들어가 전화를 빌려 대여소에 픽업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런 목적으로 들어간 곳이 의암댐에 있는 의암쉼터였다. 그렇다. 어느새 우리는 길게 누워 있는 의암호의 가장자리, 의암댐까지 온 거였다. 지도를 보니 춘천역에서 십팔 킬로미터. 춘천역까지는 이제 십 킬로미터가 남은 셈이였으나 그만 달리기로 했다. 여섯시 반쯤이었으니 쉬며 달리며를 세 시간. 드디어 의암쉼터에서 사발면을 주문하고 - 몸은 이제 먹을 수 있다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있었다 - 전화기를 빌려 대여소에 픽업을 요청했으나 너무 멀다며 픽업이 힘드니 자물쇠로 잠궈두면 나중에 자전거는 가져 가겠다고 했다. 클래식 선율이 조금 거슬리는 정도의 볼륨으로 흐르는 의암쉼터에서 無는 한숨을 돌리며 사발면에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無의 몸도 다시 돌아온 걸 보니 몸은 마음의 안정에서 비롯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의암댐에서 오십오번 버스를 타고 명동에 내려 택시를 타고 춘천역으로 갔다. 금방이었다. 일곱시 반. 재밌게도 우리가 자전거를 반납해야 할 시간이었다. 자전거는 의암댐에 두고 왔지만 반납해야 할 게 있었다. 열쇠. 열차 시간이 남아 대합실은 조금 추웠기에 역사 카페에 들어가 유자 맛이 나는 레몬차를 마시며 몸을 좀 더 배려했다. 몸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 헌데 無의 몸은 지치고 토라져 있었다. 몸살기운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無의 몸은 춘천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꿈 없는 잠으로 청량리까지 無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했는지 無는 역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댔다. 無의 몸은 나의 몸과 확실히 다르다. 하하, 회복한 나의 몸 말이다. 되찾은 나의 몸과 말이다. 아, 나에게서 몸을 앗아가는 고약한 술 같으니. 되돌아온 나의 몸은 운전을 했다. 청량리역에 올 때와는 상반된 운전이었다. 뒤따라오는 택시가 경적을 울릴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신호는 완전히 지켰다. 참 기이하고 긴 하루였다. '가장 보통의 존재'를 반복해 듣는다. 지친 내 몸이 가장 사랑하는. 



_제목은 김목인의 블로그 <"음악의 회복"을 찾아가는 기록>에서 따옴

2015/10/09

홍대에서 조성룡 선생의 강연를 듣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돈암초등학교 앞에서 방구가 나올 것 같아 몇 걸음 뒤처졌다. 이는 방구가 나오려고 할 때면 (나 혼자만) 언제 튼지도 모르는 나의 행동양식처럼 돼 버렸는데, 이날따라 유독 방구소리가 크고 길게 났다. 어둡고 조용한 보행로에서 몇 걸음 앞서 걷던 無는 마치 생전 처음 경험하는 방구소리인양 놀라며 헛웃음을 크게 짓고는 집에 올라가는 내내 내 방구 얘기만 했다. 방구로만 이루어진 얘기(대화라고 할 순 없다)라니! 
건강을 생각할 때면 나는 늘 십 년도 더 전에 약수동에 살 적에 설거지하며 삐끗했던 허리에 혹시나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며 간혹 걱정을 하곤 했었는데 이마저도 작년 건강검진 때 허리시티를 찍고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부터는 사라졌고, 그 이후로는 눈의 피로와 세월에 따라 방전 속도가 증가하고 있는 보통 체력을 제외한다면 거의 유일하게 내 몸의 이상이 아닐까, 라고 의심이 되는 건, 사실은 방구다. 나는 오래전부터 지독한 변비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제는 너무 당연하게 내 몸의 현상의 일부라고 생각이 돼 무뎌졌을 정도고, 자주 변기를 막히게 하곤 했던 나의 변도 이젠 요령껏 막히지 않게 하는 방법을 터득(이라고 하기엔 그저 수시로 물을 내리는 것뿐이지만)하고 나서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사실 나는 내가 겪고 있는 변비는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으레 그럴 거다, 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내 변의 압도적인 크기를 포함해서, 대구에서 한의원을 차린 사촌누나에게 찾아갔다가 보약을 짓는다고 맥을 짚고나서 일주일에 변을 몇 번 보냐는 누나의 질문에 두 번 정도라고 답했지만 사실은 당시만 해도 언제 변을 본 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내 변비는 심각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의 변비 증세를 의학적으로 인식한 나는 여전히 심각하고도 당연한(?) 변비를 겪고 있다. 그리고 남들이 아침마다 소변만 보러 가는 내가 부러울 정도로 화장실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변을 보는 수일 동안 나는 방구로 변을 대신하고 있다. 길에서든 어디서든. 그러니 나에게는 변을 대신할 정도로 당연한 생리 현상일 뿐인데 건강 문제를 굳이 떠올리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지만, 사실은 방구입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홍대에 다녀오며 방구 때문에 시달린 게 이틀이나 지났는데 無, 이 악독한 동반자는 빨래통에 담긴 내 속옷에 엉덩이 부분이 구멍이 난 걸 보며 분명 내 방구 때문일 거라며 또 방구 얘길 끊임없이 하고 있다. 심지어 네이버에 찾아보고는 “방구를 뀌면 암모니아 가스가 방출이 돼 동일한 지점에 반복이 되면 속옷에 구멍이 날 수도 있다”며 맥 화면을 띄워났으니 보라고 잠결에 흐릿한 눈짓을 보내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맥을 열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일기를 쓰고 있다. 지금은 방구가 나올 것 같지 않다. 

2015/10/07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 대한 짧은 기록

지금과 그때는 서로 대조되는 개념이 아닌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단어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받아들임의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군가는 지금을, 또 누군가는 그때를 떠올리며 상반된 추억을 곱씹기도할 것이며, 반대로 유사한 추억을 보듬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그 표현을 홍상수는 카메라 앵글의 차이로 보여주는 듯싶더니, 대화의 오묘한 뉘앙스 차이로 비틀다가, 술 한잔 들이키고는 그래,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 작심하고 뒤흔들어버린다. 어쩌면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과거의 기억이라는 속성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적 감정이 녹아들면 더욱 그러할 수도.
그리고 그 내부에 가득 차 있는 대화나 내용은 그가 말하듯 상투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유머도 있고 로맨스도 있고, <북촌방향>에서처럼 눈(雪)도 있다. 그래서 2부의 차분한 끝은 마치 옴니버스 영화의 전혀 다른 결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받아들이는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열림의 가능성이야말로 홍상수가 보여주는 영화적 수사(修辭)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기도 하다. 어떤 단정적 해석도 허용되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가지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한 나무에 걸쳐 있다. 결국, 홍상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네큐브, 2015. 10. 3.

2015/10/04

드릴로 콘크리트를 뚫는 건 누차 해도 신비롭고 약간은 두렵기까지 한 경험이다. 매번 뚫을 때마다 의도치 않은 결과물을 낳게 된다. 저, 수백 미터를 넘나드는 건물을 유지케 하는 콘크리트의 강성을, 물론 철근의 도움을 받지만, 그에 비하면 한낱 여린 인간의 손으로 드릴이라는 작은 장비의 힘을 빌려 뚫을 수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래서 나는 늘 뚫기 작업을 하기 전에는, 옆집에 드릴을 빌리러 갈 때부터, 아니 벽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부터, 내가 과연 구멍을 원하는 위치에 잘 뚫을 수 있을지 걱정을 하곤 한다. 그렇지만 콘크리트는 일단 구멍을 뚫으면 나사로 고정된 물체들이 든든하게 버틸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석고보드에 매달려 있는 樹話의 판화 ‘여름, 태양’과 無印良品에서 산 선반은 언제든 떨어질 준비가 된 듯 나를 불안하게 한다. 물론 지금은 내성이 생겨 그곳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게 오히려 당연해 보이기는 하지만. ‘여름, 태양’을 거실에 들인 게 따사로운 봄, 오월이었는데 어느덧 봄, 여름이 가고 시월, 가을이 되었다. 

2015/10/03

우리가, 내 것이 아닌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엔 무엇이 있을까? 내 것이 아닌 범주가 도시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현재에서 도시의 과거를 반추할 수 있을까?
우선 반추할 과거가 있다는 점에서 서울은 제법 분명한 역사를 지닌 도시다. 한양도성이, 종묘가, 사직단이,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오래된 도읍 서울의 역사를 대변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문화유산을 향유하며 서울의 오랜 역사에 자신만의 기억을 덧대어 간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러한 기억이 만들어내는 추억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기에 '내 것이 아닌 과거', '내 것이 아닌 범주'였지만 결국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범주'가 되는 게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기억이고 역사'이다. 그리고 이는 곧 '도시의 기억이자 도시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도시에서 어떤 기억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기억을 더 친숙하게 떠올리는가? 우리가 좀 더 애틋하게 상기하곤 하는 기억은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공간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이른바 문화재라고 명명되는 것들만이 역사가 되는 것인가? 우리의 기억은 오래 되기만 한 것들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
거친 욕망에 길들여져 하루 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우리는 기억을 쉽게 망각한다. '그곳'에 역사가 있었다는 것도, '그곳'의 역사에 우리의 기억이 얹혀있었다는 것도 망각한다. 그저 지나가는 투로 말하며 '그곳'을 스치곤 한다. 그곳에 그게 있었지. 그렇게 '그곳'이라는 공간은 도시에서 점점 사라지고, '그곳'에 의지하고 있던 우리의 기억도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러고 나서 발생하는 단절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렇게 불릴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것도 역사다. 그러한 흔적을 도시에서는 꼼꼼이 남겨둔다. 무슨 무슨 터가 있던 자리라고.
이 글을 쓰기 전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서, 오랜만에 디브이디를 꺼내 보았다. 건축가 정기용 선생의 말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정재은 감독, 2011).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영화가 촬영될 때 ddp는 이미 현상설계를 끝내고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현상설계에 참여한 몇몇 건축가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선유도공원으로 잘 알려진 조성룡 건축가는 "동대문운동장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쨌든 그 장소에 대한 대답을 했어야 되는데, 그건 잘 안 읽혀요. 공공적인 성격을 띈 장소는 그 땅의 성격을 분명히 좀 읽는데, 단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고 역사, 시민들이 인생에서 기억하고 있는 파편들을 언제든지 리콜해낼 수 있는 근거는 만들어 줘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그때서부터 의미를 갖게 되고 또 그게 새로운 시설이나 장소가 만들어지면 그때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거다. 그것이 중첩되어야만 좋은 장소가 된다. 

그렇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며 즐긴 사람들의 기억도 그곳에 묻힌 수백 년의 역사 못지 않게 중요하다. 동시에 사는 사람들 각자의 삶의 기억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파편들이다. 피터 바살러뮤가 각고의 노력으로 지켜낸 동소문동의 한옥도, 비록 지금은 북촌 같은 동네로서의 형태는 거의 상실하였지만, 빌딩에 가려 햇볕이 잘 안 들지라도 소중한 주거지의 기억이자 실제다.
우리는 기억이 없는, 곧 역사가 부재한 빈곤한 현재를 살아갈 순 없다. 그렇게 과거와 단절된 토막난 현재를 미래로 넘겨줄 수 없다. 넘겨줘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이어받은 삶의 터전을 미래 세대에게 이어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의 '삶도 소중한 역사'이기에.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정석, 효형출판)를 읽다가

2015/09/13

여행의 끝

17세기 전반만 해도 전복을 따서 관아에 바치는 일은 여자만의 의무가 아니었다. <제주풍토기>에 '남녀가 서로 섞여 있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남녀가 함께 하던 물질이 어느 순간 남자가 빠지고 여성 전유의 물질로 전화되었다. 해물을 진상하는 역을 맡았던 남자인 포작들이 줄어들자 여성들에게 그 의무가 전가된다. 관아의 엄청난 수탈을 견디다 못한 제주 남자들이 육지로 도망쳐서 바다를 떠돌며 해물 채취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니 육지 사람들은 그네들을 기괴스럽게 여겨서 두무악(頭無惡)이란 호칭으로 불렀다. 잠녀라는 여성 직접인의 명칭 안에는 이 같은 수탈의 역사가 숨어 있다.
주강현, <제주기행>, 웅진지식하우스, 103쪽


새벽에 소변 때문에 잠에서 깼다가 아침식사 때까지 내내 뒤척였다. 그런 중에 바깥에서 동네 할머니들 일 나가시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곧이어 남쪽으로 난 창에 스미는 아침의 볕. 날씨가 맑다는 얘기. 일어나 씻고 밖으로 나갔더니 역시나 하늘이 푸르다. 바깥주인이 정성껏 준비한 아침식사 - 어묵탕, 샐러드, 주먹밥 -을 맛있고 부르게 먹고 동네 산책을 했다. 마지막이었다.
짐을 챙기고, 숙소에서 직접 구운 쿠키와 인(iiin) 과월호(winter, 2014)를 사서 나섰다. 나서는 길, 얼마 되지 않은 거리를 굳이 태워주겠다고 나서는 바깥주인의 친절을 못이겨 차에 올랐다. 헌데 눈앞에서 지나친 버스를 앞 정류장까지 달려가 잡아주는 고마움이란 뜻밖의 것이었다. 그렇게 안녕, 인사를 하고 일주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에서 無는 전날 찾아본 담화헌에 가고 싶어했다. 그래 30분을 기다려 중문으로 가는 720번 버스를 타고 다시 남행(南行). 20여 분을 달려 하차, 다시 한적한 길을 따라 조금 걸어 창고를 개조한 건물에 주르레식당과 나란히 있는 담화헌에 도착했다. 느낌이 좋았다.
도자기를 직접 굽고 판매도 하는 카페인 담화헌은 곳곳에서 장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내 맘에 찬 건 굵직한 나무들로 제작된 테이블과 자기를 비치한 장들. 티볼리오디오에서 나오는 노라존스의 음색은 더해진 우퍼만큼이나 적절한 무게로 흐르고 있었다. 우퍼 하나로 소리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또 하나 눈에 띈 건 나무로 된 옛 사과상자를 눕혀 쌓아 찬장으로 활용한 거였다. 같은 사물이라도 다르게 사용을 함으로써 완전히 색다른 감각을 보여줄 수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우리는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그곳을 나서야 했다.
우릴 픽업한 기사분은 공항까지 가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에게 많은 얘길 들려주셨다. 얘기는 현재 중국 자본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개발 붐에서부터 제주민들의 이익과는 무관한 기업들의 자본권력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급기야는 우리나라 기업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까지 넘어갔는데, 대체로 나는 공감을 하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공감의 불편은 제주에 대한 나의 막연한 애정 때문이었을 텐데, 기사분의 한탄에 가까운 말도 결국 제주에 대한, 나라에 대한 얘정과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기에 작금의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고. 그러니 내 마음은 불편의 좁은 길을 고개를 숙인 채 걸어야 했다. 그뿐이다.

2015/08/16

경리단길은 처음 가 보는 곳이다. 홍대 일대만큼이나 유행에 민감하다는 얘긴 진작에 들었지만 따로 와 볼 기회가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다른 무엇보다 내겐 - 혹 우리에겐 - 결혼식을 치른 남산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서 조금은 친숙하게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오가는 길목에서 ‘거대’할 정도로 가까이 눈에 잡히던 남산타워.
지난 일주일 동안 그놈의 편도염 때문에 無가 너무 고생을 했기에 쉬게 해 주고 싶기도 하고, 나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된 제천을 다른 식으로라도 보답하고픈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김목인의 공연이 있었다. 그래 저녁도 외식을 하기로 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143번을 타고 한 번에 간 경리단길은 가까웠다. 종로를 통과하는 게 어렵지 남산을 관통하니 곧장 용산. 바로 버스에서 하차해 육교를 건너니 외국인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좁은 골목마다 펍들이 들어찼고, 계절에 맞게 느슨하게 앉아 다들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아, 맥주를 마실 수 있었으면.
오르막을 따라, 차가 다니지 않았으면 싶은 2차로 곁의 좁은 인도를 걸었다. 저녁은 팬스테이크에 볶음밥. 처음으로 약간 매운 밥을 먹었는데 이제는 거의 다 나은 듯 목이 자극적이지 않았다.
공연이 열리는 뮤직펍으로 가는 길에 앙증맞은 팬이 돌아가고 있던 2층 숍에 들러 천일홍 작은 다발을 사고도 공연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김치사운즈에 도착했다. 두 테이블이 차 있었는데 그 중 한 테이블에는 벌써 도착한 김목인이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자릴 잡고 앉아 無는 칵테일을 나는 주스를 주문. 금세 사람들이 들어찬 김치사운즈는 북적북적.
아홉 시가 되자 펍에서 하는 작은 공연인 만큼 다른 세션 없이 홀몸으로 기타만 챙겨온 김목인이 눈높이의 차이가 없는 무대에 올랐다. 따로 리허설이 없었기에 계속해서 사운드를 맞추고. 베이스가 두텁고 에코가 심한 소리가 점점 잡혀가는가 싶더니 공연이 시작됐다.
입구에 자리 잡은 무리의 사람들도 공연이 지속되자 목소리를 줄이고, ‘꿈의 가로수길’로 시작한 공연은 결혼식 때 사전 음악으로도 튼 ‘스반홀름’, 리듬을 좋아하는 ‘말투의 가시’ 등을 거쳐 ‘그게 다 외로워서래’로 마무리 됐다. 추가되는 한 곡의 앵콜. 제목은 모르겠는 오리가 주인공인 보사노바.
공연 중간 멘트에서 김목인은 쑥스럽게도 ‘이 자리에 축가를 부른 부부도 와 있다’며 말로써 우릴 지칭했다. 나는 새봄 덕분이지만, 결혼식 불과 사흘 전에 섭외한 축가에 대한 고마움을 핑계로 김목인에게 거듭 연락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챙겨준 박노해 시인의 <다른 길>을 잘 읽고 있는지, 은효의 옷은 몸에 잘 맞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식이 끝나고도 따로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저 결혼식 카메라에 잡힌 그의 연주 사진 몇 컷을 보내주는 것으로 그쳤을 뿐. 하지만 궁금은 했기에, 공연이 끝나고 인사를 할 때 ‘잘 지내시냐?’, ‘옷도 너무 예쁜 걸 주셨더라.’는 말을 건넸을 때 기분이 좋으면서도 여전히 쑥스러웠다. 김목인은 솔로 데뷔 때부터 좋아했고 개인적으로도 친하게 지내고 싶을 만큼 그의 인간적 모습을 좋아하는 나지만, 괜히 공개적으로 언급되거나, 공연장 같은 데서 말을 섞는 게 인사치레라고는 하지만 영 어색하기만 하다. 빨리 자릴 뜨고 싶을 만큼. 그럼 돌아서 계단을 내려오며 생각을 하지, 아, 다행이다, 옷이 잘 맞는다네.
이제 어엿이 김목인은 내가 언니네이발관 다음으로 공연을 많이 찾아본 음악가가 되었다. 無도 흐뭇해 하고, 연휴의 밤이 이렇게 채워지니 기분은 가벼워지고 뭐, 괜찮다. 

2015/06/25

가장 먼 여행




점점 게을러지는 기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머뭇거리는 미련. 






작고 작은 섬,
웨노는 석양이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의 석양이 무엇보다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웨노에 머물렀던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오직 단 한 번만 볼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석양보다 더 잊혀지지 않는 건,
산호섬에서 맞이하는 우렁찬 파도소리였다. 
파도소리 가까이 나가보았다. 
저 파도소리는 이천 미터가 넘는 심해를
품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기에 앞서,
부암동으로 달려가 오래전부터 마음 먹었던
樹話의 판화 한 점을 구입했다.

여름, 태양



樹話 김환기, 1913~1974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하튼 호적의 이름이 싫어서 
나도 따로 내 이름을 하나 갖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글자를 모아 놓고 거기서 
나무 '樹'자를 얻기는 했으나 '樹'자 밑에 붙일 글자는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樹'자 하나만 붙일까도 했으나 
여보게, '樹'하고 부를 경우에는 아주 틀려 먹었다. 
여하간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말씀 '話'자를 생각해 낸 것은 
'樹'자를 발견하고 나서 한참 후인 것 같다. 
'樹話'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시각적으로나 청음적으로나 
내딴에는 정통으로 들어맞았다고 생각돼서 
그땐 혼자서 약간 기뻐했던 것 같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환기미술관 







봄이 되니, 
길상사에도 연등 꽃이 피고 






나는 봄을 잊지 않기 위해,
올해도 어김없이 지리산에 갔다.







우리의 주말엔 어느덧 산책이 자릴 잡아,
낙산에도 가고






정릉에도 간다.







그런데 대체 우리는 언제 이사를 하는 걸까. 


2015/03/27

기억력이 좋지 않아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얼추 이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집을 비워내느라 분주하다. 옷방에 있는 '오래된' 서랍장을 들어내고, 오래된 옷들은 헌옷함에 넣을 것과 구분한 뒤 시골에 내려보내기 위해 커다란 캐리어에 담는다. 그리고 이 집으로 들어온 뒤 처음 잠시 동안 쓰다가 지금은 보일러 밸브도 잠근 채 차갑게 식어 있는 작은방으로 간다. 그곳엔, 역시나 '오래된' 싱글 침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누나집에서 독립을 할 때 가족들 모두가 버리라고 했던 그 침대, 적어도 이십 년도 더 됐을 나의 '오래된' 침대. 이불과 커버를 벗기니, 모두가 그렇게 버리라고 한 게 마치 진실로 둔갑이라도 한 듯, 매트리스가 활처럼 휘어있다. 그런데 나는 왜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 스프링이 제모습으로 돌아갈 힘을 잃은 듯, 가운데가 약간 접혀있는 매트리스를 들어내고, 프레임의 나사를 풀어 한쪽 벽에 가지런히 기대어 둔다.
그러고 보니, 집에 새 손님, 그러니까 나의 반려자를 맞기 위해 비우려고 시도했던 것들은 정말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무르며 함께하던 것들이다. 그렇다고 이걸 정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어색하고, 하지만 왠지 허전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내 삶의 낡고 닳은 두터운 내용 없는 페이지가 닫히려고 하는 지금, 오늘, 이천십오년 삼월 이십칠일,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2015/01/24

모음 그리고 모음들

그래, 나는 숙취에 지배당하지 않으려 기어코 집을 나섰다. 날씨는 놀라울 정도로 포근했고, 눌러쓴 비니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꼼짝 않고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길을 걸었다. 나가기 전, 무수하게 떠올렸던 산책길은 밖으로 나가서야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다. 꺽이는 방향이 곧 산책길이 되었는데, 길게 길을 이을 생각이 없었기에, 한숨만 짓곤하는 콘크리트 길을 따라, 걷고, 두리번거렸다. 
처음 가는 길엔, 낯선 오래된 집들이 주인 없이 방치돼 있었다. 마치 내가 쓰는 글처럼, 지나치게 낡은 것이다.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어제 또 잠이 들었겠구나. 입안엔 어젯밤 들이킨 술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 술내가 진동을 했다. 우리는 방어와 숭어를 큼지막하게 썬 상을 마주하고 옛 소주 세 병을 거뜬히 비웠다. 이야기는 산을 오르느라 버거운 듯했다. 이차는 클라우드 맥주와 함께 우리집 거실. 녀석이 좋아하는 넥스트의 음악을 배경으로, 녀석은 아직 올라야 할 산이 남았는지 무어라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나는 일어났다. 아무도 모르게. 
종착점은 정해둔 출발이었다. 커피를 사야 했다. 日常에 안 간 지 꽤 오래되었건만, 이제는 부러 성북동으로 향하지 않는다. 동네에 또 하나의 아름다운 커피집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우리의 남미 여행을 미리부터 힘껏 끌어당기기 위해 peru를 샀다. 음악은 카잘스의 바흐. 주말, 오후가 간다.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 마치 한 젊은이가 시험 보는 날이나 결투하는 날, 제시된 질문이나 총알이 자기가 가진, 또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지식이나 용기에 비해 아주 하찮게 여겨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내 정신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복제품 밖으로 ‘성당 정문의 성모상’을 높이 세우면서 복제품을 위협하는 변전으로부터 격리하여, 설령 복제품이 파괴된다 할지라도 성모상은 온전하게 남아 이상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토록 수천 번이나 새겨 보았던 조각이 이제 돌이라는 그 고유 속성으로 환원되어 내 팔이 미치는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선거 포스터와 내 지팡이 끝과 경쟁하며, 광장으로 이어져 큰길로 진입하는 부분과 분리되지 않고, 카페와 합승 마차 사무실의 눈길을 피할 수 없어 그 얼굴에 석양빛의 - 그리고 몇 시간 후에는 곧 가로등 불빛의 - 절반을 받고, 어음할인 사무소가 나머지 절반 빛을 받으며, 이 신용 은행 출장소와 동시에 제과점 부엌에서 나오는 악취에 배어 ‘개체’의 폭력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자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 돌 위에 내 이름을 새겨 놓고 싶었다면, 그건 바로 성모상이, 저 유명한 발베크의 성모상이 내가 이제껏 보편적인 삶과 신성불가침의 아름다움을 부여해온 유일한(슬프게도 단 하나임을 뜻하는) 조각상이었기 때문인데, 이제 그것이 이웃집과 똑같은 그을음으로 때가 잔뜩 낀 몸에서 때를 벗겨 내지도 못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모여든 모든 찬미자들에게 내 분필 조각 자국과 내 이름 글자를 함께 전시할 것이었다. 또 끝으로,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욕망해 왔던 불멸의 예술 작품인 성모상은 이제 성당과 함께 내가 그 높이를 재고 주름살을 셀 수 있는 작고 늙은 돌로 된 노파로 바뀌어 있었다. 시간이 흘렀고 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거기서 할머니와 프랑수아즈를 기다려 함께 ‘발베크 해변’으로 가야 했다. 발베크에 대해 내가 읽은 글과 스완이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정말 근사하다네, 시에나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지.” 나의 이런 환멸에 대해 난 여러 우발적인 이유들, 즉 그때 좋지 못했던 내 몸 상태나 피로, 사물을 제대로 바라볼 줄 모르는 무능력을 탓하면서, 나를 위해 예전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도시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어쩌면 머지않아 캥페를레의 진주 빛 비 한가운데로, 시원한 물방울 소리 속으로 뚫고 들어갈 것이고, 또 퐁타뱅을 적시던 그 초록빛과 분홍빛 반사광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발베크로 말하자면, 내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지금까지 완전히 밀폐한 채로 가두어야 했던 이름을 내가 방긋 열어 놓았다는 듯이, 또 그 이름이 내가 조심성 없이 제공한 이런 출구를 이용해 그때까지 그 안에 살던 모든 이미지들을 내쫓았다는 듯이, 전차며 카페며 광장을 지나가는 행인들이며 할인 은행 지점이 어떤 외부 압박과 압력 공기의 힘에 의해 발베크라는 음절 안으로 밀려와서는, 음절이 그 위로 닫히면서 페르시아 풍 성당 정문을 감싸도록 내버려 두고 또 계속해서 그것들을 음절 안에 가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고장의 이름 - 고장>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 


내 건강이 나아져서, 비록 발베크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한번은 노르망디나 브르타뉴 건축물과 경관을 보기 위해 그처럼 상상 속에서 여러 번 탄 적 있는 1시 22분 기차를 타는 것을 부모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나는 우선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 내려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번 그 도시들을 비교해 보았지만,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그 개별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어떻게 더 아름다운 도시를 고를 수 있단 말인가. 불그스름하고 우아한 레이스 안에서 그렇게도 높이 솟아 있고 꼭대기가 마지막 음절의 오래된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이외(Bayeux). e 모음 위 방점이 오래된 유리창을 검정나무 같은 마름모꼴로 나누는 비트레(Vitré). 달걀 껍질의 노란색에서 진주 빛 회색에 이르는 희끄무레하고 부드러운 랑발(Lamballe). 기름지고 노르스름한 마지막 이중모음이 버터로 만든 탑을 장식하는 노르망디의 대성당 쿠탕스(Coutances), 마을의 고요 속에 역마차의 소음과 함께 파리가 뒤따르는 라니용(Lannion),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가 강물이 흐르는 시적인 장소의 길 위에 흩어져 있는 그 우습고도 소박한 케스탕베르(Questambert)와 퐁토르송(Pontorson), 해초 한가운데로 강물을 끌어들이려는 듯 밧줄에 겨우 매인 듯한 베노데트(Benodet), 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천 모자의 옅은 분홍색 날개가 운하의 초록빛깔 물속에서 떨리며 반사되는 퐁타뱅(Pont-Aven), 중세 이래로 시냇물에 보다 단단히 메어 있고 그 사이를 졸졸 노래하며 검게 그은 은의 무딘 점으로 변한 햇살이 유리창 거미줄 너머로 그림을 그리듯 아주 섬세한 잿빛 진주 방울로 아롱지는 캥페를레(Quimperlé).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고장의 이름 - 이름>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  



  • 문체론적으로 유명한 이 문단은 프랑스 시인 랭보의 <모음(Voyell)>이라는 시 못지않게 주목을 받아 왔다. 문화적, 음성학적, 문자적인 함의로 가득한 이 문단에서 우선 장식 융단으로 유명한 바이외(Bayeux)의 yeu는 고풍스러운 금색을, 마름모꼴 유리창이 연상되는 비트레(Vitré)의 é는 검은색을 떠올리게 한다. 랑방(Lamballe)에는 하얀색(blanc)이란 음소가 들어 있으며, 쿠탕스(Coutances)의 an은 버터의 노란색을 환기한다. 라니용(Lannion)은 마부의 ‘가는 끈(lanière)’과 라퐁텐의 우화에 연유하며, 케스탕베르(Questambert)는 이 고장의 카망베르 치즈에서, 이밖에도 퐁토르송(Pontorson)의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는 이 도시 문양이 백조인 데서, 베노데트는 수초로 불리는 이 고장 수생식물에서 비롯되었다. 퐁타뱅의 모자 날개는 고갱의 그림 <브르타뉴의 네 여인들>에 나오는 하얀 천 모자와 연결되며, 플로베르를 매혹했던 ‘들판과 모래톱’의 투명한 시냇물 이미지는 캥페를레(Quimperlé)의 진주 빛(perlé) 방울로 표현된다. (김희영) 





모음들



A는 까만색, E는 백색, I는 적색, U는 초록색, O는 파란색, 모음들이여!
나는 언젠가 너희들의 은밀한 탄생을 말하리. 
A, 괴로운 악취의 윙윙거리는 빛나는
벌레들의 연모(軟毛)에 덮인 시커먼 콜셋, 

어두운 검은 만 : E, 아지랑이 천막의 눈부신 백색, 
자랑스럽구나, 빙하의 창, 흰 왕들, 산형화의 전율

I는 주홍빛 옷감, 뱉어내어진 피, 분노, 혹은 회개를 촉구하는 도취 속에서 웃음짓는 붉은 앵두빛 입술

U, 원환(圓環), 녹색의 바다의 거룩한 진동, 
동물의 흩어진 방목장의 평온함. 
연금술이 정려(精慮)하는 큰 이마에 새기는 주름의 평화

O, 이상한 환성에 넘친 지상(至上)의 나팔, 
‘천체’와 ‘천사’가 지나가는 정적
- 오오, 오메가, ‘그녀의 눈’의 보랏빛! 


<랭보 詩選> 아르튀르 랭보, 이준오 옮김, 책세상 





모음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 
언젠가는 너희들의 보이지 않는 탄생을 말하리라. 
A, 지독한 악취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터질 듯한 파리들의 검은 코르셋, 

어둠의 만(灣) ; E, 기선과 천막의 순백(純白), 
창 모양의 당당한 빙하들, 하얀 왕들, 산형화들의 살랑거림. 
I, 자주조개들, 토한 피, 분노나
회개의 도취경 속에서 웃는 아름다운 입술. 

U, 순환주기들, 초록 바다의 신성한 물결침, 
동물들이 흩어져 있는 방목장의 평화, 연금술사의 
커다란 학구적인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의 평화. 

O, 이상한 금속성 소리로 가득찬 최후의 나팔, 
여러 세계들과 천사들이 가로지르는 침묵, 
오, 오메가여, 그녀 눈의 보랏빛 테두리여!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아르튀르 랭보, 김현 옮김, 민음사 

2015/01/09

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있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기형도



그러나 아니다. 나는 광주에서 그 이상한 청년을 만난 것이다. 어쩌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사를 만나고, 그 역사의 허망함에 눈뜨고, 지상을 떠난 청년들이 묘역에 잠들어 있다. 나는 무엇인가. 가증스러운 냉담자인가, 나에게 있어 국토란 무엇인가.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 지금 이곳의 나는 무엇인가. 너 형이상학자, 흙 위에 떠서 걸어다니는 성자여. 어두워진다. 나의 희망은 좀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 이 게으른 손들.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살림 


나는 기형도와 막역한 친구인 박해현에게 시 '입 속의 검은 잎'에 나오는 '그 일'과 '그'는 무엇인지, '누구'인지 물었다. 박해현은 기억을 살려 내게 이메일로 알려주었다: "기형도의 그 시는 그가 여름휴가 중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온 뒤 쓴 작품입니다. 당시 그는 대구에서 광주에 갔습니다. 그 당시 모든 젋은이들이 그랬듯이, 기형도 역시 5.18 광주에 대한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에 나오는 대로 광주에 가서 택시를 타고 망월동에 찾아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에서 '그 일'은 5.18이고 '그'는 시인이 상상한 일종의 전형적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 검은 잎, 기형도, 그리고 김현>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망월동, 광주, 2015


삼 년 만에, 광주에 다녀왔다. 그때에도 이번처럼 광주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그래서 내게는 광주가 눈으로 인해 더욱 정겹다.

하지만 광주는 언제나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수치로 늘 내게 머물러 있다. 그 사이 나는, '오월의 사회과학'을 읽었고,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그리고 한동안 광주를 신나게 앓았다. 그러니 이번 여정이 내게는 나름 무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는 그 존재 자체로 별도의 의미 부여가 필요없는 곳이다. 그저 지금처럼 광주는 그대로 있어주면 그만이다. 정읍을 막 지난 열차는 언제 내린 것인지 모를 눈 사이를 미끄럽게 흘러간다. 

광주에 도착을 해 역전에서 백반을 먹고, 518번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좁은, '대도시'답지 않게 정겨운 도로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니 금세 무등이 훤히 펼쳐진다. 머리에 히끗히끗 모자를 눌러쓴 무등에 오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날씨가 매섭고 혼자가 아니기에 고집부릴 필요는 없다. 


기억이 수시로 교차하는, 아찔한 시간의 길을 따라 망월동에 갔다. 어쩐지 과하게 꾸민 듯한 공식 공간보다 나는 옛 묘역이 더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그곳으로 먼저 발길을 내밀었다.


어쩐지 외롭고 쓸쓸한, 그래서 낯익고 정겨운, 그리고 한없이 낮고 슬픈 옛 묘역은 여전히 투쟁이 진행중이었다. 5.18 이후로도 무수한 민주 투사들이 눈을 감기 위해, 비로소 안식을 찾기 위해 망월동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입구에 있는 꽃집에서 국화 세 송이를 샀다. 이곳이 지난번 내가 꽃을 산 그곳인지는 기억이 불확실하다. 그리고 공간도 기억으로는 변해 있다. 한 송이는 묘역 가운데에, 또 한 송이는 김남주 시인에게, 나머지 한 송이는 신묘역에 잠든 리영희 선생에게 드렸다. 

다시, 광주를 출발하여 서울로 간다. 아, 오래된 서울. 하지만 이 말조차 이젠 지나치게 낡았다. 그렇다. 모든 건 손댈 수 없을 만큼 낡아버렸다. 인생은 여행, 이라 누가 말했던가. 누가 노래하였던가. 우리는 늦게 잠에서 깼다. 외풍이 유독 심했던 페드로하우스에서 無는 병자처럼 잠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취객처럼 그러하였고. 하지만 여행은 여유의 다른 말. 우린 느리게 씻고, 느리게 아침식사를 했다, 콜드플레이를 들으며. 그리고 막 그곳을 벗어나려는 찰나, 손에 귤과 음료수를 들고 들어오는 페드로를 만났다. 

열린 장벽, 광주 폴리

어딘가로, 때때로 떠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고 그래서 이렇듯 일상의 틈을 비집고 거듭 떠나게 된다. 벌써 2015년. 다시 한 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시작되고, 그것을 맞이하는 일이란 다이어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달력을 한 장 새로이 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쉬운데 왜 인생은 지루하고 점점 비참해지는 걸까. 늘 같으면서도 새로운 듯 고민을 하는 똑같은 삶이란. 나는 이런 새해를 다시 맞기 위해 기형도를 읽는다.      1/4 日 몸살 


그는 첫 시집을 준비하면서 수록할 시 원고 뭉치를 내게 건넸다. 시집 제목은 <정거장에서의 추억>으로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는 첫 시집을 내기도 전에 두번째 시집 제목은 정해두었다고 했다. <내 인생의 중세>라는 시 도입부만 써놓은 상태였는데, 당시 <중세의 가을>을 탐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생의 중세를 경험하지 못한 채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는 내 추억의 빈집에서 여전히 종이를 마주하면 뭘 써야 할지 모르는 공포에 떨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공포를 즐기고 있다. 그는 한때 시 쓰기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해야 하는 '불행한 쾌락'이라고 말했으니까. 
<정거장에서의 충고 - 추억의 빈집> 박해현, 문학과지성사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않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기형도 

2015/01/08

난 행복해요,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서는 불만이오

"나는 그저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싶어요." 공작은 계속했다. "알퐁즈 카르가 프러시아와의 전쟁 전에 이러한 명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전쟁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좋다. 그럼 먼저 그대들 주전론자들을 선두의 특별부대에 편입시켜 습격에도 돌격에도 전군의 선두에 세우리라!' 하고"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행복하다, 이런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