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13

여행의 끝

17세기 전반만 해도 전복을 따서 관아에 바치는 일은 여자만의 의무가 아니었다. <제주풍토기>에 '남녀가 서로 섞여 있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남녀가 함께 하던 물질이 어느 순간 남자가 빠지고 여성 전유의 물질로 전화되었다. 해물을 진상하는 역을 맡았던 남자인 포작들이 줄어들자 여성들에게 그 의무가 전가된다. 관아의 엄청난 수탈을 견디다 못한 제주 남자들이 육지로 도망쳐서 바다를 떠돌며 해물 채취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니 육지 사람들은 그네들을 기괴스럽게 여겨서 두무악(頭無惡)이란 호칭으로 불렀다. 잠녀라는 여성 직접인의 명칭 안에는 이 같은 수탈의 역사가 숨어 있다.
주강현, <제주기행>, 웅진지식하우스, 103쪽


새벽에 소변 때문에 잠에서 깼다가 아침식사 때까지 내내 뒤척였다. 그런 중에 바깥에서 동네 할머니들 일 나가시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곧이어 남쪽으로 난 창에 스미는 아침의 볕. 날씨가 맑다는 얘기. 일어나 씻고 밖으로 나갔더니 역시나 하늘이 푸르다. 바깥주인이 정성껏 준비한 아침식사 - 어묵탕, 샐러드, 주먹밥 -을 맛있고 부르게 먹고 동네 산책을 했다. 마지막이었다.
짐을 챙기고, 숙소에서 직접 구운 쿠키와 인(iiin) 과월호(winter, 2014)를 사서 나섰다. 나서는 길, 얼마 되지 않은 거리를 굳이 태워주겠다고 나서는 바깥주인의 친절을 못이겨 차에 올랐다. 헌데 눈앞에서 지나친 버스를 앞 정류장까지 달려가 잡아주는 고마움이란 뜻밖의 것이었다. 그렇게 안녕, 인사를 하고 일주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에서 無는 전날 찾아본 담화헌에 가고 싶어했다. 그래 30분을 기다려 중문으로 가는 720번 버스를 타고 다시 남행(南行). 20여 분을 달려 하차, 다시 한적한 길을 따라 조금 걸어 창고를 개조한 건물에 주르레식당과 나란히 있는 담화헌에 도착했다. 느낌이 좋았다.
도자기를 직접 굽고 판매도 하는 카페인 담화헌은 곳곳에서 장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내 맘에 찬 건 굵직한 나무들로 제작된 테이블과 자기를 비치한 장들. 티볼리오디오에서 나오는 노라존스의 음색은 더해진 우퍼만큼이나 적절한 무게로 흐르고 있었다. 우퍼 하나로 소리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또 하나 눈에 띈 건 나무로 된 옛 사과상자를 눕혀 쌓아 찬장으로 활용한 거였다. 같은 사물이라도 다르게 사용을 함으로써 완전히 색다른 감각을 보여줄 수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우리는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그곳을 나서야 했다.
우릴 픽업한 기사분은 공항까지 가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에게 많은 얘길 들려주셨다. 얘기는 현재 중국 자본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개발 붐에서부터 제주민들의 이익과는 무관한 기업들의 자본권력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급기야는 우리나라 기업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까지 넘어갔는데, 대체로 나는 공감을 하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공감의 불편은 제주에 대한 나의 막연한 애정 때문이었을 텐데, 기사분의 한탄에 가까운 말도 결국 제주에 대한, 나라에 대한 얘정과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기에 작금의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고. 그러니 내 마음은 불편의 좁은 길을 고개를 숙인 채 걸어야 했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