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8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

파울 클레 :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수묵담채화, 1920)


며칠 전 전화를 걸어온 아버지가 보내달라는 책, 이안 부루마가 쓴 <0년 : 현대의 탄생, 1945년>(신보영 옮김, 글항아리)이 재밌을 것 같아 도서관에 가서 빌려왔다. 아침을 먹고 데크에서 커피를 마시며 조금 읽으려고 폈는데 서두에 쓰인 벤야민의 글에 그만 관심을 빼앗기고 말았다. 역사철학테제의 글 가운데 하나로, 전에도 읽은 바 있는 글이지만 이 글은 파울 클레의 그림을 묘사하는 글이기도 해서, 베를린에서 사온 도록까지 꺼내 클레의 그림도 다시 보고, 벤야민의 글도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흐린 주말의 오전이다.


파울 클레(Paul Klee)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339쪽, 최성만 옮김, '발터 벤야민 선집 5', 도서출판 길 

2016/08/21

diver's heaven

우리가 이곳에 도착을 했을 때 시간은 아직 낮이 되기 전이었다. 아주 엷은 비가 시나브로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대장님이 컨펌해준 예약은 확인하지 못하고 별도로 방을 구해야 했다. 그래서 106호. 완전한 서향에 발코니로 나가 서너 번 넘어지면 곧장 미지근한 바다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 잠을 잤고 부러 깨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번 여행의 가장 온전한 목적이기에. 물론 조금의 아쉬움은 있다. 이름하야 장소성을 띈 그것은 바로 다이빙에 관한 것인데, 이곳 차량들 번호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Diver's Heaven 



다이버들의 천국이 된 축 라군(Chuuk Lagoon) 일대는 그 자체로 슬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기록된 역사 이래,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도 모자라 전쟁에 동원되고, 땅과 바다를 고스란히 내주어야 했기에. 말이 없는 투명하고 푸른 바다는 더없이 찬란하기에 찬란한 슬픔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지배의 역사 막바지에 그야말로 전장이 된 축 라군에는 여전히, 당연하게도 태평양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상흔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마이크로네시아에 명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여행지로 마이크로네시아를 택하고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지인들마다 - 물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것일 테지만 -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나, 하고 물으면 마이크로네시아란 답에 그곳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또 설명이 이어져야 한다. 왜 그곳을 택했는지, 그곳엔 뭐가 있는지 등등. 
그 중에 마이크로네시아를 인지하고 있거나, 혹 가길 희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다이버였으니, 마이크로네시아야말로 Diver's Heaven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해야 할지, 나로선 난감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축 라군의 곳곳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 침몰하거나 곤두박질친 군함과 군항기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바다 생물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녹슬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을 헤엄쳐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다이버들이 있기에 그곳이 Diver's Heaven이라고 스스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고. 

micronesia

구글어스에서도 한참을 끌어당겨야 겨우 눈에 띄는 작은 섬들의 집합, 마이크로네시아는 그 이름이 넌지시 암시하듯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연방이다. 지금의 연방에는 얍Yab, 축Chuuk, 폰베이Phonpei, 코스레Kosrae 네 개의 주가 있다. 주도는 폰베이.
현재 남아 있는 기록된 역사는 마이크로네시아에 최초로 방문(1521년)한 유럽인 항해자 마젤란에 대한 것과 1986년 미국의 신탁통치로부터 완전한 독립국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기를 제외하면, 모두 외부에 의한 지배로 점철되어 있다.
마이크로네시아의 섬들을 지배했던 나라는 스페인, 독일, 일본, 미국이었다.
대부분의 스페인의 식민지들처럼 일찍이 스페인령이 되었던 마이크로네시아는 쿠바 독립전쟁에 개입한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후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괌, 필리핀,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으로 넘어간 것과는 달리 어정쩡하게 스페인에게 남았다가 독일에게 넘겨지게 된다. 스페인이 독일에 연방을 팔아넘긴 것이다. 1899년의 일.
그랬던 마이크로네시아의 주인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세계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일본이 등장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1902년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하는데 이는 영국과 일본이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고 동아시아에서의 양국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었다. 이 동맹을 계기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일본은 중국의 '칭다오 전투'에서 영국군과 연합해 독일군을 무찌르고 중국 산동성에 있던 독일인들을 붙잡았다. 그 후 일본 해군함대는 당시 독일이 보유하고 있던 동아시아의 함대를 공격하고, 태평양 및 인도양에서의 연합군 측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1914년 10월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팔라우 등 마이크로네시아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1930년대 일본 해군은 본격적으로 '남양군도'에 비행장, 방호시설, 항구 및 기타 군사시설 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이 섬들을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 부르며, 일본 본토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했다. 이 시기에 일본이 구축한 여러 시설은 태평양 전쟁 시 일본 공군과 해군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권문상.이미진.강대훈, <마이크로네시아 연방국> 38쪽,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그렇게 일본의 전략적 요충지로써 그 몫을 톡톡히 하던 마이크로네시아는 결국 미국과 일본의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 우리 나라가 해방 후 그랬던 것처럼 - 미국의 신탁통치령이 된다. 우리 나라와 다른 점은 그 기간이 길었다는 것뿐.

2016/08/10

웨노의 추억

창간호부터 한 호도 빼놓지 않고 보고 있는 잡지가 있다.

I'm in island now!!
real JEJU iiin 

저녁을 먹는 식탁에서 잡지를 보던 無가 어떤 페이지를 슬쩍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엔 한눈에 보아도 어딘지 알 법한 장소가 투명하게 실려있었다.




마이크로네시아 축(Micronesia Chuuk Lagoon)이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한 남자에게 예기치 않게 '사건'이 찾아왔다. 1990년대 즈음, 우리 나라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상은 돈이면 다 되는, 그것이 전부인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런 세상이 싫었던 남자는 갑자기 태평양 위의 외딴섬으로 도망쳤다. 이름마저 생소한 '추크 섬'이 그가 떠나온 곳이었다. 무척 낯선 곳이었고, 어쩌면 그래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단지 현실에서 도망쳐 나올, 그 현실과는 몹시 다른 먼 곳이 필요했다. 단순한 도피처에 불과했던 추크 섬에서의 생활은 올해로 벌써 20년을 채웠다. 괌을 통해서만 당도할 수 있는 오지의 섬, 추크는 이제 그의 삶 전부가 되었다. 원주민을 만나 결혼도 하였고, 아이를 둔 어엿한 가장도 되었다. 섬의 일상은 여느 곳과 다르지 않다. 아침이면 출근할 채비를 하고, 퇴근을 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오후 4시 즈음이면 일과를 마친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공허한 시간이 일찍 시작된다. 전지 시설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아서 밤이 찾아오면, 칠흑 같은 어둠을 깨뜨릴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다. 그저 해와 달이 이끄는 자연의 시간에 몸을 맡긴다. 캄캄하고 조용한 밤마다 그의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생각의 꼬리잡기는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했고, 책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iiin 2016, Summer>,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잡지에 실린 인터뷰의 주인공이 이병률과 김훈의 제안으로 쓰게 되었다는 책의 제목이다.

글을 읽으며 놀란 동시에 어렴풋하게 드는 짐작(?)이 있었다.

혹시 웨노에서 우릴 픽업하고 안내해 주셨던 그분이 아닐까? 

오늘 아침에는 無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인간극장에 그가 나온다고. 無는 그분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래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서재에 올라와 본격적으로 기억과 기록을 뒤졌다.

웨노에 가기 전, 결국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닿은 현지 연구소 대장님께서 우리가 블루라군에 묵고 있을 때 메시지를 보내 오사쿠라섬에서의 바비큐 파티에 초대를 해 주셨는데 그때 메시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토요일 8시경 블루라군 로비 입구에 기다리시면 직원 xxx선생이 픽업할 것입니다. 

웨노섬에 가기 위하여

몇 해 전, 트위터에서 이병률 시인이 소설가 김훈과 이름도 생소한 '축'이라는 섬에 간다고 남긴 짧은 문장을 보았다. 아니 이건 또 뭐야. 궁금증이 동했다. 그래 구글링을 해보았지만 찾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내 궁금증도 금세 동나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시인과 소설가가 떠났던 이야기는 중앙일보에 기사로 실렸다. 

결혼을 결심하고 여행지의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그때였다, 나의 궁금증이 동나지 않았음을 알았던 건. 無가 전적으로 동의해 주었기에 무리없이 마이크로네시아행을 결정할 수 있었지만, 그리고 항공권도 예매를 했건만, 정보가 없었다, 어디에도. 간혹 괌을 통해 마이크로네시아에 다녀온 포스팅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주로 주도인 폰베이나 얍에 대한 거였다. 하지만 우리는 축주에 있는 웨노섬에 가기로 한 게 아닌가. 반복되는 구글링 끝에 어렵게 찾은 정보는 약간 희망적이었다. 웨노섬에 정부 연구기관이 있다는 정보였기에. 여행 일주일 전이었다.

한국해양연구원 부설연구소가 웨노섬에 있다는 걸 알고, 해양연구원에 전화를 걸었다. 조심스럽게 사정을 얘기하고 지역 정보를 좀 얻을 수 있는지 문의를 했더니 상대편에서는 약간의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어려운 선택을 하셨네요."

그 분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최근에 큰 태풍을 겪은 후라 섬 전체가 아수라장이고 여전히 복구 중이지만 속도가 느리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도 아직 많다... 등등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여행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간단한 지역 정보를 메일로 받고 현장에 상주하신다는 연구소 대장님의 메일주소를 알아냈다. 그리고 당장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해양기술원 xxx선생님 통해서 연락처를 받고 메일 드립니다. 
저는 다음 주말에 결혼식을 앞두고 있고, 
축으로의 신혼여행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없어서 
해양기술원에 전화를 했다가 xxx선생님께 이런저런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3월 말에 태풍 때문에 현지 피해가 크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그게 어느 정도인지? 
여행을 가도 무리가 없는지?
현재 현지 상황은 어떤지 등에 대해 궁금해서 여쭙고자 메일을 드립니다. 
숙소는 블루라곤에 묵을 예정인데, 사이트를 통해서 예약 요청을 했는데도 (사흘 전) 
아직 연락이 없어서 조금 답답하기도 하고요. 
만일 축 상황이 여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면, 
폰베이행 항공권을 추가로 끊어서 경로를 바꾸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26일 출국, 축에 27일 입국 예정이고요. 
현지 상황에 대한 정보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

2016/08/03

박경리 선생님을 생전에 처음 만나 뵀을 때 하신 말씀이 생생합니다. 대뜸 "환경이라는 말 참 안 좋아." 그러시는 겁니다. "환경이라는 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환경부가 어디 가서 뭐 재기나 하고, 인간은 쏙 빼놓고 바깥에 둘러싼 것만 가지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생태라는 개념을 가지고 가야 해. 환경부가 아니라 생태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태학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하신 말씀이겠지만, 그 말씀이 너무 정확하게 와 닿았어요. 2002년 한국 생태학회가 세계생태학대회를 유치했어요. 운영위원장을 맡아 해외 석학들을 섭외하는 역할을 맡았거든요. 박경리 선생님을 가장 중요한 기조연설자로 모셨어요. 그날 먼저 하신 말씀도 환경과 생태의 차이점이었어요. 또 생물이 중심에 있어야 하고, 생물과 환경이 관계 맺음 하는 게 진짜고, 주변만 보는 것은 의미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세계적 생태학자들이 다 일어서 박수치더라고요. 소설가 입에서 명확한 이야기가 나오니 감탄한 거죠. "자연이라는 원금을 까먹지 말아야 한다. 이자만 가지고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후손들에게 우리가 누린 자연을 그대로 선물해줘야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239호, 최재천, 특집 대담 '생태 취미, 자연에 들어서는 징검다리' 중에서 


어제 저녁, 퇴근하고 현관 앞에 놓인 이번 호를 가져다가 거실에 대충 앉아 이리저리 살피는데 반가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국립수목원에서 일하시는 박사님의 인터뷰 기사. 그리고 기억에 남은 이 대목.

대학원생들과 이른 봄 광덕산에 꽃을 보러 갔다가 너무 이른 봄에는 산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밟고 다니는 땅에서 식물들이 올라오고 있거든요. 식물은 번식을 위해서 꽃을 피우는 거예요. 요즘엔 여러 요인으로 나비나 벌 같은 수분자를 만나기 어려워요. 




자연, 푸르른 숲 가까이 집을 짓고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다.

2016/08/02

사실 건물 앉히기에 가장 곤란한 곳이 바로 평평하고 네모난 땅이다. 신도시에서 분양하는 택지들이 대개 그렇다. 아무리 둘러봐도 다 똑같이 생긴 땅이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이라면 맹물이고 종이라면 백지다. 자연이 만든 우아한 경사지를 기필코 쑹덩쑹덩 잘라 야만적 옹벽을 앞뒤로 세우고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한국 택지 개발의 정의인 듯도 하다. 이런 땅 위에 건물을 얹어야 할 때가 가장 당혹스럽다. 좋은 답은 훌륭한 질문에서 나오는 법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인 건 그 절묘한 질문 때문이다. 그런데 평평하고 네모난 땅은 입을 굳게 닫고 있다. 필사적으로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다. 초면의 과묵한 상대는 얼마나 불편한 존재겠는가. 그에 비해 이렇게 경사 급하고 이상한 땅은 수다스럽게 많은 질문을 쏟아내는 중이다. 이런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궁금해하는 것이다. 
서현, <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짓기> 25쪽, 효형출판

건축 의뢰에서부터 대지를 보고 한 채의 건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서현의 세모난 책. 인상적인 집이지만, 결과물보다 그럴 듯한 과정이 더욱 흥미롭다. 건축가야말로, 그럴 듯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땅의 질문에 대한 답이 건축물이 되기에 너무도 척박한 우리의 도시는 오늘도 숨이 막힌다. 그렇지만 도시는 그렇게 지탱된다. 그리고 우리는 도시에서 살아간다.

공간에 대한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단지 복잡한 심상과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연상 작용까지도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공간을 마주한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기억의 둑이 탁 터지는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가 보고 경험했던 수많은 방과 풍경들이 일시에 흘러나왔다. 뿐만 아니라 조와 내가 이 공간을 만들어 내느라 들였던 그 많은 시간과 추억까지도 한꺼번에 떠올랐다. 
마이클 폴란, <주말 집 짓기> 321쪽, 배경린 옮김, 펜연필독약

폴란의 책을 재밌게 읽고 있다. 벌써 다 읽었어야 하는 책을 괜히 끌고 있는 셈인데, 좀 더 붙잡아두고 싶은 구절들이 있다.


집에 틀어박혀 있어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삶,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충족되지 않는 헛헛함이 무언가 내 손으로 직접 해 보고 싶다는 예기치 못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문학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에 대한 필요를 반영했다면, 그 공간을 손수 만들고 싶다는 소망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일이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인데, 요즘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의 일 역시 세상과의 관계를 추상적이고 비본질적이며 간접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타인이 쓴 글, 혹은 타인이 한 말을 다시 쓰고 고치고 다듬는 일을 하면서 보내다 보면,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제3자가 돼 버린 기분마저 들었다. '진짜 일'이었지만 늘 그렇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던 것은, 내가 하는 일이 나라는 인간에 대해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마치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목과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내 몸뚱이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내 일이 현실 세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는 느낌도 잘 들지 않았다. 정보화시대에 다소 구닥다리 사고방식일 수 있지만, 그래도 진정한 노동이란 역시 물리적인 생산이 필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정보 서비스직 종사자'라고 표현할 때마다, 망치나 끌을 쥐어 들고 문장 나부랭이보다 덜 가상적인 어떤 것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같은 책 33-34쪽


바슐라르는 1958년 그의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집이 주는 가장 큰 이점을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집이란 몽상의 보금자리요, 몽상가의 은신처이며, 평화롭게 꿈꿀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다." 너무도 간단한 말이지만, 이 글을 접한 순간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이며 되찾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책 38쪽 
 
주로 머리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폴란처럼 생각하는 때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사고가 실천으로 이어질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몸의 진실' 혹은 '육체 노동의 진실'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폴란이 2년 반이란 시간 동안 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온몸으로 느끼고 알아가고 체험하고자 했던 그 과정 자체가 내겐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덧붙이자면 폴란의 글은 참 담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