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내 것이 아닌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엔 무엇이 있을까? 내 것이 아닌 범주가 도시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현재에서 도시의 과거를 반추할 수 있을까?
우선 반추할 과거가 있다는 점에서 서울은 제법 분명한 역사를 지닌 도시다. 한양도성이, 종묘가, 사직단이,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오래된 도읍 서울의 역사를 대변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문화유산을 향유하며 서울의 오랜 역사에 자신만의 기억을 덧대어 간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러한 기억이 만들어내는 추억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기에 '내 것이 아닌 과거', '내 것이 아닌 범주'였지만 결국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범주'가 되는 게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기억이고 역사'이다. 그리고 이는 곧 '도시의 기억이자 도시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도시에서 어떤 기억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기억을 더 친숙하게 떠올리는가? 우리가 좀 더 애틋하게 상기하곤 하는 기억은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공간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이른바 문화재라고 명명되는 것들만이 역사가 되는 것인가? 우리의 기억은 오래 되기만 한 것들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
거친 욕망에 길들여져 하루 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우리는 기억을 쉽게 망각한다. '그곳'에 역사가 있었다는 것도, '그곳'의 역사에 우리의 기억이 얹혀있었다는 것도 망각한다. 그저 지나가는 투로 말하며 '그곳'을 스치곤 한다. 그곳에 그게 있었지. 그렇게 '그곳'이라는 공간은 도시에서 점점 사라지고, '그곳'에 의지하고 있던 우리의 기억도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러고 나서 발생하는 단절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렇게 불릴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것도 역사다. 그러한 흔적을 도시에서는 꼼꼼이 남겨둔다. 무슨 무슨 터가 있던 자리라고.
이 글을 쓰기 전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서, 오랜만에 디브이디를 꺼내 보았다. 건축가 정기용 선생의 말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정재은 감독, 2011).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영화가 촬영될 때 ddp는 이미 현상설계를 끝내고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현상설계에 참여한 몇몇 건축가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선유도공원으로 잘 알려진 조성룡 건축가는 "동대문운동장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쨌든 그 장소에 대한 대답을 했어야 되는데, 그건 잘 안 읽혀요. 공공적인 성격을 띈 장소는 그 땅의 성격을 분명히 좀 읽는데, 단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고 역사, 시민들이 인생에서 기억하고 있는 파편들을 언제든지 리콜해낼 수 있는 근거는 만들어 줘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그때서부터 의미를 갖게 되고 또 그게 새로운 시설이나 장소가 만들어지면 그때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거다. 그것이 중첩되어야만 좋은 장소가 된다.
그렇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며 즐긴 사람들의 기억도 그곳에 묻힌 수백 년의 역사 못지 않게 중요하다. 동시에 사는 사람들 각자의 삶의 기억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파편들이다. 피터 바살러뮤가 각고의 노력으로 지켜낸 동소문동의 한옥도, 비록 지금은 북촌 같은 동네로서의 형태는 거의 상실하였지만, 빌딩에 가려 햇볕이 잘 안 들지라도 소중한 주거지의 기억이자 실제다.
우리는 기억이 없는, 곧 역사가 부재한 빈곤한 현재를 살아갈 순 없다. 그렇게 과거와 단절된 토막난 현재를 미래로 넘겨줄 수 없다. 넘겨줘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이어받은 삶의 터전을 미래 세대에게 이어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의 '삶도 소중한 역사'이기에.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정석, 효형출판)를 읽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