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3

가장 먼 여행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머리 - 가슴 - 발>의 그림입니다. 우리가 한 학기 동안 공부할 순서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그림은 강의 내내 수시로 불러낼 것입니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의도 여기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을 뜻합니다. 애정과 공감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세계 인식과 인간에 대한 성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실천이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_신영복, <담론> 18.19.20쪽, 돌베개 

2015/10/11

사라진 몸을 회복해 가는 기록

지난 밤, 에이트리 5주년 모임에서 두 개의 케이크로 두 번, 4주년 축하를 했다. 내 몸은 술에 절대적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니 당연히 기억도 없다. 헌데 누나 식구들과 우리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해서 한없이 누워있을 수도 없었고, 오후에는 가평엘 가야 했다. 윤아가 자는 동안 효진이 밥을 먹이며 겨우 한두 젓갈 식사를 했다. 기차는 두시십육분. 누나 식구가 돌아간 게 한시 십오분쯤.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몸은 무슨 상태라고 말하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아예 상태가 없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돗자리도 챙기고, 외투도 챙기고, 無가 사온 티셔츠를 입고 부랴부랴 현관을 나서는데 속이 좋지 않았다. 無는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었고 나는 튀어 들어가 변기를 붙잡고 구토를 했다. 몇 점 먹은 고기가 그대로 쏟아져 나오더니 변기에 고인 물을 기름기 범벅으로 만들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구토를 했으니 이제 좀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출발. 한시 오십사분. 열차 출발시각까지는 이십이분이 남았다. 무시할 수 있는 신호는 무시하기로 했다. 세 개 정도를 무시했다. 청량리역 뒤편에 주차를 한 시각이 두시 십사분. 이분 남았다.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슈욱, 세이브. 그런데 뛰어서 그런가, 속이 또 안 좋았다. 화장실에 가서 변기를 붙잡고 이번엔 눈물을 찔끔 흘리며 구토를 했다. 안 좋아하는 느낌의 구토다. 입을 헹구고, 자리로 돌아가 無에게 엎어졌다. 커피는 늦은 와중에 왜 내려왔는지, 전혀 생각이 없었다. 해장은 무슨. 잠들기 전, 이게 중요하다. 無가 어떤 감각에서였는지 생각을 해내고서는 말을 했다. "우리 표는?" 이런. 표란 우리가 가고 있는 가평에서 열리는 째즈페스티벌의 초대권으로 며칠 전 L이 누가 준 건데 못 간다며 내게 다시 준 거였다. 확실히 정신이 없었는지 - 몸이 없으니 정신이 있을 수가 있나! - 나는 괴상한 발상을 했다. 옆집에 사는 누나에게 집에 고스란히 모셔져 있는 초대권을 사진 찍어 보내라고 하고 매표창구에 들이밀어 보는 것. 지금 생각해도 괴상하다. 역시 인간이란 '몸'이 바로 서야 한다. 無는 옆에서 나보다 앞서 갔다. 주최측에 전화를 걸어 나의 몸이 없는 상태의 괴상한 발상을 그대로 문의하고 있는 거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어찌 할 생각을 했을꼬. 그러고 보면 無도 몸이 좀 없는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될 리가 있나. 역시 안 된다는 대답. 이제 잠이 들었다. 오늘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잠이다. 꿈 없는 잠. 깼더니 정면의 전광판에 선명한 글씨로 다음 도착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남춘천'이라고. 창밖을 보니 익숙한 풍경. 강촌이었다. 無를 흔들어 깨웠다. 아니 깨워서 뭐하나. 춘천까지 가야 하는 걸. 버스도 아니고. 우린 우리가 몸이 없음을 실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춘천에 가서 자전거나 타자고 했다. 몸을 회복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처럼 여겨졌다. 즉, 좋은 발상. 無도 잠결이었는지 선뜻(?)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이 주 후에 춘천에 올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평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차피 표도 사야 했기에, 춘천역에 내렸다. 플랫폼에 앉아 기분이 상쾌해지는 날씨에 조금 넋을 놓고 있었다. 역을 빠져 나가며 보니 자전거 대여소가 눈에 띄었다. 가서, 페이퍼 한 장을 쓰고 자전거 두 대를 빌렸다. 네 시간에 만팔천 원. 세시 반이었으니 일곱시 반에 반납. 서울로 돌아갈 열차는 가평에서 아홉시 이십일분에 출발이었으니 춘천역에서는 아홉시쯤 될 터였다. 허나 조금 라이딩을 하다가 쉬면서 열차표를 알아봤더니 여덟시 열차에 마침 자리가 나서 가평發 열차는 취소를 하고 다시 예매를 했다. 날씨도 좋고, 열차표도 쉽게 구하고, 뭔가 잘 풀리는 듯한 기분. 제주에서부터 자전거 노래를 불렀었는데 뜻밖의 춘천에 와서 자전거를 타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물론 그보다 몸이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기운이 느껴져 그랬지만. 그렇게 의암호를 따라 삼십분쯤 탔을까.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반대편으로 향하는 몇몇 라이더들은 우비를 갖추고 있었다. 약간 출출하기도 하고, 마침 휴게소가 있어 비도 피하고 사발면이나 먹을 생각으로 들어갔다. 카페였다. 음료와 식사 대용으로는 햄버거를 팔고 있었다. 겨우 몸이 상태를 찾아가고 있는데 햄버거라니. 애써 커피도 내려왔는데, 라고 생각하니 고를 게 없었다. 그래서 시킨 게 녹차. 생각보다 신선했고 양이 많았다. 카푸치노를 시킨 無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읽고 있었다. 여전히 몸이 없다고 느끼는 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비가 그친 것 같았다. 다섯시가 조금 못 되어 다시 라이딩. 기차 시간만 생각했지 해가 지면 어두워질 거란 생각을 왜 못했는지. 그래도 지도를 보며 의암호를 따라 계속 달렸다. 서쪽으로 잔뜩 밀려난 오늘의 해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직선으로 의암호와 춘천을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다리를 하나 건너 이제 의암호 너머로 춘천 시내를 바라보며 달렸다. 파일을 박아 만든 데크 구간은 바퀴가 구르는 소리와 함께 기분을 한층 묘하게 했다. 몸이 더욱 반응을 하는 듯했다. 그래 나는 기력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는데 이제야. 바닥에 농기계&자전거 겸용이라고 쓰인 제방길을 따라 달리는데 서쪽에서 가까운 곳은 이제 볕을 못 받고 의암호 너머 춘천 시내만 겨우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무지개다. 흐릿한 하늘을 크게 가로지르며 무지개가 솟아 있었다. 




무지개는 눈에 분명히 보이지만 나는 늘 무지개가 시작되는 지점을 궁금해하곤 했다. 오늘은 아파트 단지 꼭대기에서부터 솟아오른 듯 보였다. 하지만 조금을 더 달리니, 그래서 시선이 달라지니 또 다른 곳, 저 산 중턱쯤, 헷갈렸다. 무지개는 어디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해가 진다. 안장을 잔뜩 올리고 기어를 최대한 낮춰 최소한의 운동으로 달리고 있는 나와 달리 짐을 분산하기 위해 바구니 있는 미니벨로형의 자전거를 고른 無는 바퀴가 작아서인지 나에 비해서는 부지런히 패달을 밟아야 했다. 네 배니 다섯 배니 하며 無가 투덜거렸다. 몸이 지치고 있다는 징조였다. 그러고 보니 無의 몸도 언제 자릴 잡았는지, 이제 지치고 있었다. 날은 더욱 어두워지고. 無에게 있어서의 또 다른 변수는 나보다 엉덩이에 살이 지나치게 부족해 패달을 부지런히 밟는 만큼 안장에서 통증을 느낀다는 것과 부지런히 패달을 밟은 덕분에 물기가 묻은 타이어의 물이 한 줄로 無의 엉덩이 부근을 적셔버렸다는 것. 그렇게 無는 지쳐갔다. 어두워졌다. 게다가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왜 비가 내릴 수도 있다는 가정은 하지 못했는지. 낭만에는 젖어도 비에 젖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결국 無는 안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요상한 우리의 아이폰은 각각 10%, 26%에서 갑자기 전원이 꺼져버렸기에 보이는 곳에 들어가 전화를 빌려 대여소에 픽업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런 목적으로 들어간 곳이 의암댐에 있는 의암쉼터였다. 그렇다. 어느새 우리는 길게 누워 있는 의암호의 가장자리, 의암댐까지 온 거였다. 지도를 보니 춘천역에서 십팔 킬로미터. 춘천역까지는 이제 십 킬로미터가 남은 셈이였으나 그만 달리기로 했다. 여섯시 반쯤이었으니 쉬며 달리며를 세 시간. 드디어 의암쉼터에서 사발면을 주문하고 - 몸은 이제 먹을 수 있다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있었다 - 전화기를 빌려 대여소에 픽업을 요청했으나 너무 멀다며 픽업이 힘드니 자물쇠로 잠궈두면 나중에 자전거는 가져 가겠다고 했다. 클래식 선율이 조금 거슬리는 정도의 볼륨으로 흐르는 의암쉼터에서 無는 한숨을 돌리며 사발면에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無의 몸도 다시 돌아온 걸 보니 몸은 마음의 안정에서 비롯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의암댐에서 오십오번 버스를 타고 명동에 내려 택시를 타고 춘천역으로 갔다. 금방이었다. 일곱시 반. 재밌게도 우리가 자전거를 반납해야 할 시간이었다. 자전거는 의암댐에 두고 왔지만 반납해야 할 게 있었다. 열쇠. 열차 시간이 남아 대합실은 조금 추웠기에 역사 카페에 들어가 유자 맛이 나는 레몬차를 마시며 몸을 좀 더 배려했다. 몸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 헌데 無의 몸은 지치고 토라져 있었다. 몸살기운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無의 몸은 춘천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꿈 없는 잠으로 청량리까지 無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했는지 無는 역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댔다. 無의 몸은 나의 몸과 확실히 다르다. 하하, 회복한 나의 몸 말이다. 되찾은 나의 몸과 말이다. 아, 나에게서 몸을 앗아가는 고약한 술 같으니. 되돌아온 나의 몸은 운전을 했다. 청량리역에 올 때와는 상반된 운전이었다. 뒤따라오는 택시가 경적을 울릴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신호는 완전히 지켰다. 참 기이하고 긴 하루였다. '가장 보통의 존재'를 반복해 듣는다. 지친 내 몸이 가장 사랑하는. 



_제목은 김목인의 블로그 <"음악의 회복"을 찾아가는 기록>에서 따옴

2015/10/09

홍대에서 조성룡 선생의 강연를 듣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돈암초등학교 앞에서 방구가 나올 것 같아 몇 걸음 뒤처졌다. 이는 방구가 나오려고 할 때면 (나 혼자만) 언제 튼지도 모르는 나의 행동양식처럼 돼 버렸는데, 이날따라 유독 방구소리가 크고 길게 났다. 어둡고 조용한 보행로에서 몇 걸음 앞서 걷던 無는 마치 생전 처음 경험하는 방구소리인양 놀라며 헛웃음을 크게 짓고는 집에 올라가는 내내 내 방구 얘기만 했다. 방구로만 이루어진 얘기(대화라고 할 순 없다)라니! 
건강을 생각할 때면 나는 늘 십 년도 더 전에 약수동에 살 적에 설거지하며 삐끗했던 허리에 혹시나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며 간혹 걱정을 하곤 했었는데 이마저도 작년 건강검진 때 허리시티를 찍고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부터는 사라졌고, 그 이후로는 눈의 피로와 세월에 따라 방전 속도가 증가하고 있는 보통 체력을 제외한다면 거의 유일하게 내 몸의 이상이 아닐까, 라고 의심이 되는 건, 사실은 방구다. 나는 오래전부터 지독한 변비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제는 너무 당연하게 내 몸의 현상의 일부라고 생각이 돼 무뎌졌을 정도고, 자주 변기를 막히게 하곤 했던 나의 변도 이젠 요령껏 막히지 않게 하는 방법을 터득(이라고 하기엔 그저 수시로 물을 내리는 것뿐이지만)하고 나서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사실 나는 내가 겪고 있는 변비는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으레 그럴 거다, 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내 변의 압도적인 크기를 포함해서, 대구에서 한의원을 차린 사촌누나에게 찾아갔다가 보약을 짓는다고 맥을 짚고나서 일주일에 변을 몇 번 보냐는 누나의 질문에 두 번 정도라고 답했지만 사실은 당시만 해도 언제 변을 본 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내 변비는 심각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의 변비 증세를 의학적으로 인식한 나는 여전히 심각하고도 당연한(?) 변비를 겪고 있다. 그리고 남들이 아침마다 소변만 보러 가는 내가 부러울 정도로 화장실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변을 보는 수일 동안 나는 방구로 변을 대신하고 있다. 길에서든 어디서든. 그러니 나에게는 변을 대신할 정도로 당연한 생리 현상일 뿐인데 건강 문제를 굳이 떠올리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지만, 사실은 방구입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홍대에 다녀오며 방구 때문에 시달린 게 이틀이나 지났는데 無, 이 악독한 동반자는 빨래통에 담긴 내 속옷에 엉덩이 부분이 구멍이 난 걸 보며 분명 내 방구 때문일 거라며 또 방구 얘길 끊임없이 하고 있다. 심지어 네이버에 찾아보고는 “방구를 뀌면 암모니아 가스가 방출이 돼 동일한 지점에 반복이 되면 속옷에 구멍이 날 수도 있다”며 맥 화면을 띄워났으니 보라고 잠결에 흐릿한 눈짓을 보내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맥을 열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일기를 쓰고 있다. 지금은 방구가 나올 것 같지 않다. 

2015/10/07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 대한 짧은 기록

지금과 그때는 서로 대조되는 개념이 아닌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단어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받아들임의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군가는 지금을, 또 누군가는 그때를 떠올리며 상반된 추억을 곱씹기도할 것이며, 반대로 유사한 추억을 보듬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그 표현을 홍상수는 카메라 앵글의 차이로 보여주는 듯싶더니, 대화의 오묘한 뉘앙스 차이로 비틀다가, 술 한잔 들이키고는 그래,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 작심하고 뒤흔들어버린다. 어쩌면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과거의 기억이라는 속성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적 감정이 녹아들면 더욱 그러할 수도.
그리고 그 내부에 가득 차 있는 대화나 내용은 그가 말하듯 상투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유머도 있고 로맨스도 있고, <북촌방향>에서처럼 눈(雪)도 있다. 그래서 2부의 차분한 끝은 마치 옴니버스 영화의 전혀 다른 결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받아들이는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열림의 가능성이야말로 홍상수가 보여주는 영화적 수사(修辭)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기도 하다. 어떤 단정적 해석도 허용되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가지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한 나무에 걸쳐 있다. 결국, 홍상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네큐브, 2015. 10. 3.

2015/10/04

드릴로 콘크리트를 뚫는 건 누차 해도 신비롭고 약간은 두렵기까지 한 경험이다. 매번 뚫을 때마다 의도치 않은 결과물을 낳게 된다. 저, 수백 미터를 넘나드는 건물을 유지케 하는 콘크리트의 강성을, 물론 철근의 도움을 받지만, 그에 비하면 한낱 여린 인간의 손으로 드릴이라는 작은 장비의 힘을 빌려 뚫을 수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래서 나는 늘 뚫기 작업을 하기 전에는, 옆집에 드릴을 빌리러 갈 때부터, 아니 벽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부터, 내가 과연 구멍을 원하는 위치에 잘 뚫을 수 있을지 걱정을 하곤 한다. 그렇지만 콘크리트는 일단 구멍을 뚫으면 나사로 고정된 물체들이 든든하게 버틸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석고보드에 매달려 있는 樹話의 판화 ‘여름, 태양’과 無印良品에서 산 선반은 언제든 떨어질 준비가 된 듯 나를 불안하게 한다. 물론 지금은 내성이 생겨 그곳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게 오히려 당연해 보이기는 하지만. ‘여름, 태양’을 거실에 들인 게 따사로운 봄, 오월이었는데 어느덧 봄, 여름이 가고 시월, 가을이 되었다. 

2015/10/03

우리가, 내 것이 아닌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엔 무엇이 있을까? 내 것이 아닌 범주가 도시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현재에서 도시의 과거를 반추할 수 있을까?
우선 반추할 과거가 있다는 점에서 서울은 제법 분명한 역사를 지닌 도시다. 한양도성이, 종묘가, 사직단이,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오래된 도읍 서울의 역사를 대변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문화유산을 향유하며 서울의 오랜 역사에 자신만의 기억을 덧대어 간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러한 기억이 만들어내는 추억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기에 '내 것이 아닌 과거', '내 것이 아닌 범주'였지만 결국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범주'가 되는 게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기억이고 역사'이다. 그리고 이는 곧 '도시의 기억이자 도시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도시에서 어떤 기억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기억을 더 친숙하게 떠올리는가? 우리가 좀 더 애틋하게 상기하곤 하는 기억은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공간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이른바 문화재라고 명명되는 것들만이 역사가 되는 것인가? 우리의 기억은 오래 되기만 한 것들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
거친 욕망에 길들여져 하루 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우리는 기억을 쉽게 망각한다. '그곳'에 역사가 있었다는 것도, '그곳'의 역사에 우리의 기억이 얹혀있었다는 것도 망각한다. 그저 지나가는 투로 말하며 '그곳'을 스치곤 한다. 그곳에 그게 있었지. 그렇게 '그곳'이라는 공간은 도시에서 점점 사라지고, '그곳'에 의지하고 있던 우리의 기억도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러고 나서 발생하는 단절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렇게 불릴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것도 역사다. 그러한 흔적을 도시에서는 꼼꼼이 남겨둔다. 무슨 무슨 터가 있던 자리라고.
이 글을 쓰기 전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서, 오랜만에 디브이디를 꺼내 보았다. 건축가 정기용 선생의 말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정재은 감독, 2011).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영화가 촬영될 때 ddp는 이미 현상설계를 끝내고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현상설계에 참여한 몇몇 건축가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선유도공원으로 잘 알려진 조성룡 건축가는 "동대문운동장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쨌든 그 장소에 대한 대답을 했어야 되는데, 그건 잘 안 읽혀요. 공공적인 성격을 띈 장소는 그 땅의 성격을 분명히 좀 읽는데, 단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고 역사, 시민들이 인생에서 기억하고 있는 파편들을 언제든지 리콜해낼 수 있는 근거는 만들어 줘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그때서부터 의미를 갖게 되고 또 그게 새로운 시설이나 장소가 만들어지면 그때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거다. 그것이 중첩되어야만 좋은 장소가 된다. 

그렇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며 즐긴 사람들의 기억도 그곳에 묻힌 수백 년의 역사 못지 않게 중요하다. 동시에 사는 사람들 각자의 삶의 기억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파편들이다. 피터 바살러뮤가 각고의 노력으로 지켜낸 동소문동의 한옥도, 비록 지금은 북촌 같은 동네로서의 형태는 거의 상실하였지만, 빌딩에 가려 햇볕이 잘 안 들지라도 소중한 주거지의 기억이자 실제다.
우리는 기억이 없는, 곧 역사가 부재한 빈곤한 현재를 살아갈 순 없다. 그렇게 과거와 단절된 토막난 현재를 미래로 넘겨줄 수 없다. 넘겨줘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이어받은 삶의 터전을 미래 세대에게 이어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의 '삶도 소중한 역사'이기에.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정석, 효형출판)를 읽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