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28

한라산이 곧 제주섬이다

아침에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서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 無가 진주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맙소사, 날씨가 무척 화창해서 일출봉과 한라산이 눈에 선연히 들어왔다. 해무에 휩싸여 신비로움마저 겸비한 일출봉은 금세 눈에서 사라졌지만 한라산은 공항까지 가는 내내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서 올라야지! 
그렇다. 나는 無가 진주에 다녀오는 동안 한라산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다소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막히지 않고 신호도 잘 걸리지 않은 덕에, 그리고 무엇보다 과속을 한 덕분에 생각보다 넉넉하게 공항에 도착을 했다. 無는 가벼운 걸음으로 공항으로 빠져들어가고, 나는 아침을 먹으려고 어제의 그 식당에 다시 갔다. 어리목으로 오르려면 그곳이 지리상 나쁘지 않은 위치이기도 하거니와 음식 맛도 괜찮았기 때문에. 
약간 매웠지만 제법 맛있게 해장국을 비우고는 어리목으로 향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중산간의 날씨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등산화로 갈아 신고 가벼운 마음과 걸음으로 산행을 시작하는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다름 아닌 한라산이었고, 오르게 될 만세동산이나 윗세오름, 영실이 무척 기대가 됐기 때문이었다.


어리목 등산로 초입

등산길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숲길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차츰 고도를 높였다. 숲길이 끝나자 그때부터는 계단이 계속 이어졌는데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보기 좋게 만들어진 등산 안내판이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어느새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제비동산에 도착한 것이다. 하얀 구름이 가득 하늘을 메우고 있었고 구름과는 다른 흐림이 저 밑 제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어 아쉽게도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풍경이 아니었다. 사제비동산에서 만세동산으로 이어지는 구상나무 군락과 너르고 평평한 지형은 한라산의 해발을 잊게 할 만큼 평온해 보였다. 푸릇푸릇한 녹색의 향연들, 이에 질세라 구름의 쉴 새 없는 움직임. 데크를 걸으며 조금이라도 풍경을 놓칠까 나는 기쁘면서도 조급한 마음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리고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제비동산에서 만세동산으로

그런데 구름이, 안개가 더욱더 백록담이 있는 주봉 일대를 강하게 에워싸더니 결국 주변의 모든 풍경을 압도해 버렸다. 덕분에 제주 일대를 굽어볼 수 있다는 만세동산 전망대에서는 휩싸인 안개만을 아쉽게 바라봐야 했다. 하지만 어쩌랴. 다시 발걸음에 힘을 붙여 윗세오름으로 향했다. 여전히 풍경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렇게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해 아쉬운 대로 윗세오름을 보며 컵라면과 초코파이를 사서 데크에 앉았다. 그런데 라면이 익을 동안,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안개가 조금씩 밀려나더니 기어코 웅장하고 다소 외로워 보이기까지 한 한라산 주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흥분한 나는 라면을 급하게 들이키고 앉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다가 참지 못하고 남벽분기점을 향해 걸었다. 점점 주봉과 가까워지는 걸음은 주위의 황홀한 풍경이 더해져 한없이 가벼워졌고, 내 손은 한 장이라도 더 주변 일대를 담으려고 분주해졌다. 


웃세누은오름, 윗세오름은 오름의 이름이 아니다

윗세오름 대피소, 컵라면.물.초코바 등을 판매한다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이에서 본 한라산 주봉은 가히 아름다웠다. 탄식을 몇 번이나 뱉었는지, 과연 내게 그러한 풍경이 존재하기는 했는지 벌써 아련해지는 그 모습들은 돈내코 방향으로 넓게 펼쳐진 한라산 남쪽 일대까지 이어지며 나를 거의 황홀경으로 밀어 넣었다. 사랑스웠다. 한라산과 그것이 곧 제주인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더 갈 수는 없었다. 웃방애오름을 끝으로 다시 발걸음 돌려 윗세오름으로 향했다.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길에서의 한라산 주봉

웃방애오름에서 보는 한라산 주봉

이제는 편안한 감동으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한라산 주봉을 수없이 쳐다보며 걷다 보니 금세 윗세오름 대피소였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곧장 영실로 걸음을 이었다. 그 전에 유홍준이 영실을 다룬 글을 다시 읽었는데, 그러고 나서 영실을 걸으니 그가 왜 제주 풍경의 엄지로 영실을 꼽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봄에 진달래가 만발한 영실 일대의 풍경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온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한다는 영실

윗세오름과 한라산 주봉

오백장군봉의 끝자락에 다다르니 남쪽으로 서귀포 일대의 풍경이 환하게 열렸는데 아쉽게도 풍경은 얼마 가지 못해 안개에 갇혀버렸다. 그렇지만 어렴풋 바다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아쉬움은 더 커지는 동시에 반드시 좀 더 좋은 날에 영실에 와야겠다는 다짐을 절로 하게 됐다. 그런데 중산간 이상의 제주에 '좀 더 좋은 날'이라는 게 과연 성립될 수 있는 말일까.


풍경, 열리다
여름의 오백장군봉

버스를 타려고 조금 서둘러 하산을 했다. 그런데 버스가 영실매표소까지 올라오는 줄 몰랐던 나는 열심히 달린 덕에 20분이나 여유가 있어서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세수도 하며 등산열과 그동안의 희열을 조금은 식힐 수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몸국이 그리고 물회가 먹고 싶었다. 애월로 향했다. 삼영식당으로 가서 자리물회와 몸국을 주문했는데 아주머니께서 친절하게 자리물회는 전어처럼 뼈가 씹힌다고 미리 말씀을 해주셨다. 실제 자리물회는 모습까지 전어와 비슷했는데 씹히는 맛은 전어보다 강했다. 뼈도 두꺼웠고. 하지만 시원한 맛에 거의 들이킬 수준의 속도로 급하게 물회를 먹어치웠다. 참기름을 많이 넣어 물회 특유의 시원함과 자리의 고소함을 좀 더 온전히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 반면 몸국은 대단했다. 우선 그 양부터 그랬고 맛도 어제 먹은 것보다 진했다. 고기도 몸도 한가득 들어 있어서 밥을 조금 남겼는데도 다 먹고 나니 배가 많이 불렀다. 이것이 몸국이구나. 
이제 공항으로 갈 시간. 아직 배는 든든하다. 


2014. 7. 19.

한라산 주봉 일대의 구름들













2014/07/27

대수롭지 않은(?) 갈치 가시에 걸린

카페 그곶을 빠져나와 우리가 향한 곳은 저지예술마을이 아닌 방주교회였다. 이미 많은 것을 한 기분이었고 이타미준의 흔적만 찾고 숙소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그래서 이타미준의 작품이 밀집해 있는 핀크스골프장 근처 방주교회로 향했다. 대체로 차량 통행이 많은 일주도로나 해안도로에 비해 우리가 택한 장소로 향하는 길은 한적해서 좋았다. 



방주교회 가는 길

방주교회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곳은 이름 그대로 종교시설이다. 하지만 누가 찾아올까 싶은 한적한 중산간 마을에 물 위에 떠 있는 듯 반듯하게 서 있는 그 건축물을 건축물로써 대하지 않고 종교 본연의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문득 이 글을 쓰다가 생각해 보니 그렇다. 모든 건물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쓰이기 위해 있는 게 아닌가. 
여튼 물에 비친 다소 차갑고 오롯한 건물을 한 바퀴 빙 돌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안에도 슬쩍 살펴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외부보다 내부가 더 마음에 들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의자의 끝 가운데 단상이 놓여 있고 그 뒤 벽 높은 곳에 십자가가 걸려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가로로 트인 유리창이 건물 바닥에, 그러니까 신도들이 앉아 정면을 응시하면 밖으로부터 끌어들여지는 밝음을 그대로 인지할 수 있게 땅에 들러붙어 있다. 대신 천장을 보니 볕이 없을 동안 밝음 역할을 해야 할 조명은 이를 의식한 듯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지 않고 작게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하지만 무뚝뚝한 표정으로 내부 개방시간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여성 분과 어딜 가나 쉬이 볼 수 있는 매몰찬 사진촬영금지 안내 때문에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렇지만 밖이 좋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천천히 건물을 돌며 이런저런 각도로 사진을 찍어 보아도 계속 쳐다보게 하는 매력을 건물은 조용히 발산하고 있었다. 


방주교회, 이타미준






다음은 드디어 비오토피아. 그곳에서 진짜 이타미준을 우리는 만나야 했지만 예상대로, 그리고 우려대로 (아마도) CCTV로 우릴 감시하고는 부리나케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온 ADT 직원의 제지로 아쉽지만 그곳에서 돌아나와야 했다. 아무리 사유지이라고 하지만 감정이 앞선 불편함은 이성마저 온전치 못하게 하는 바람에 결국 기분이 몹시 상하고 말았다. 無 역시 마찬가지로 이성적으로는 알겠지만 기분은 나쁘다며, 가볍게 내 기분에 승차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쉽게 자동차 시동을 건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無가 좋아하는 안도가 설계한 본태박물관으로 갔다. 바로 옆에는 이타미준이 핀크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같이 설계한 포도호텔의 별관이 공사중이었다(그런데 누가 설계했을까, 이타미준은 세상을 떠났는데). 주차를 하고 만 원이나 하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전시를 관람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리고 전시 자체도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에, 사진을 찍으며 건물 이곳저곳을 살폈다. 전시장엔 들어가지 않고 내리막으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내려가려는데 매표소 직원이 우릴 제지하기 위해 쫓아나왔다. 바깥 공간도 매표를 해야 하는 영역이라나. 차라리 그럴 바에야 아예 주차장에서부터 전시를 보지 않을 사람은 주차도 못하게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無는 이성을 유지했고 그래서 나도 더 이상 내 기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금세 가라앉았다. 어쩌겠는가. 실은 無의, 우리 같은 태도는 추잡스럽다는 말이 더 맞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은 채 공짜에 익숙해진 우리는 돈을 지불하는 것에 대체로 인색하니까. 이제는 숙소가 있는 섭지코지로 향했다. 


본태박물관, 안도 타다오

하지만 비오토피아에서 성산일출봉에 가까운 섭지코지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운전은 無가 했는데 자주 걸리는 신호 때문에, 그리고 조금씩 밀려드는 피로 때문에 조금 기분이 낮아 보였다. 
레드동 4층에 짐을 풀고 조금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일출봉 근처로 갔다. 역시 검색을 해서 갈치조림을 잘한다는 집에 찾아갔는데, 가격이 무척 비쌌다. 한라산 소주와 먹어본 결과 그 정도 값을 치를 만한 맛은 느끼지 못했고 되려 갈치 가시가 목에 걸리는 바람에 고생을 했다. 소주를 사이 좋게 반 병씩 나눠 마셨는데도 無는 계속 병원이 있는 제주나 서귀포 시내로 가자고 했고 나는 일단 숙소에 가서 씻고 비교적 가까운 곳에 걸린 것 같으니 자세히 살펴보자고 했다. 그래도 불편하면 병원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샤워를 하고, 내가 쩍 벌린 입을 아이폰 플래시를 켜고 들여다 본 無는 놀라운 표정으로 가시가 바로 보인다며 편의점에서 사온 핀셋 비슷한 집게로 아주 손쉽게 가시를 제거했다. 무거운 짐을 던 듯함에 후련했지만 약간 어이가 없었다.
순식간에 화사해진 분위기에 음악을 선곡하고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얘기도 나누고 내가 이것저것 읽어주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2014. 7. 19. 카페 이스탄불

카페 그 곶


한담마을을 제대로 찾아 갔는지 모르겠지만, 카페 봄날과 바다라면을 파는 곳 근처에 갔는데 너무 복잡해서 질겁을 하고 차를 돌려 나왔다. 그곳이 결국 한담마을이었을까. 
운전을 최대한 천천히 하며 너른 해변도로에서 비껴나 여전히 2차선인 해변길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지나며 풍경을 스쳤다. 하지만 곁에 있는 바다보다 멀리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라산이 내 의식을 빠르게 압도했다. 그래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도 가까운 바다보다는 멀리 한라산을 거듭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대체로 서귀포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의 모습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나의 시선과 의식과 한라산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은. 

한라산

이제는 가는 방향 그대로 달려 협재와 금능 해변으로 갔다. 먼저 사람들이 버글거리는 협재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차를 세우고 해수욕을 하고 싶다는 가벼운 욕구를 슬며시 누르고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비양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금능해변에서 바라보는 비양도

그리고 금능. 북적이는 협재보다 금능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덥다고 당장에 바다로 뛰어들기에 내 마음은 너무도 자라있었다. 그 마음이 너무나 커서, 뒤의 옅게 예정된 일정들이 눈에 선명히 밟히는 바람에 더 고민 없이 다시 차를 몰고 점심을 먹으러 금능낙원으로 갔다.
금능낙원은 몸국과 고기국수, 밀면을 파는 곳인데 ‘뼛속까지 시원한 밀면’과 함께 오리전문점인 듯한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밖에 자리를 잡고, 몸국과 밀면을 시키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맥주를 한 병 꺼내왔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우리는 맥주를 홀짝이며 제주에 있음을 실감했다. 
음식이 나왔다. 먼저 밀면 육수에 손이 갔다. 달고 시원했다. 그리고 단맛은 뒤로 갈수록 더 손댈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다. 반면 몸국은 더운 날씨에 불편할 뜨거운 음식임에도 희한하게 시원한 맛이 났다. 미역 비슷한 느낌에 시원하고 뜨거운 국물이라.
조금 걷다가 카페 그곶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금능낙원에서 그곶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주차를 하기 전에 이미 그곶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고자 했던 나에 비해 無는 더위에 이미 수긍해 카페에 들어가고자 했고, 그래서 일단 카페에 들어섰는데, 아 느낌이 좋다.

카페 그 곶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기 전에 그곶의 곳곳을 둘러보았는데, 뭔가, 대체로 걸려 있고 대체로 바닥에 놓여 있는 이곳의 인테리어는 복합적이면서도 아늑하고 공간감이 있으면서도 채워진 느낌이다. 서로 맞지 않은 테이블과 의자, 어디서 손 닿는 대로 주워온 듯한 조명들, 그에 반해 차분히 놓여진 건반과 그 위의 선반들, 그리고 좋은 사운드의 스피커와 오래된 오디오. 롯데. 불현듯 시골 우사(牛舍) 사무실로 밀려난 오래된 우리집 오디오 생각이 났다. 그것도 롯데고 여기 있는 것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짐작이 될 정도의 외향을 지니고 있다. 아직 작동이 될까, 그걸 가져와서 이사갈 ㅇㅇ동에 두고 써도 될까. 궁금해진다.

그 곶에서의 시간
본격 제주 잡지, i'm in island now

라떼와 아메리카노 그리고 치아바타를 주문했다. 커피는 그저그랬고 치아바타는 괜찮았다.
금요일이긴 해도, 평일인데 빈 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제법 알려졌나 보다. 아까부터 흐르고 있는 이노센스미션, 좋은 사운드로 들으니 더 좋고 무엇보다 이곳과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린다.
에어를 가져오니 이렇게 틈 날 때마다 기록을 이어갈 수 있어 무엇보다 좋다. 매번 여행을 다녀와서 기록을 해야지, 하는 보통의 미룸과 잊혀짐과는 달리 때맞춰 기록을 할 수 있다는 게 이토록 충분한 만족일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 이곳을 나가면 우리는 저지예술마을을 거쳐 이타미준의 건축이 모여 있는 비오토피아로 갈 예정이다. 과연, 우리는 이타미준을 접할 수 있을 것인가.


2014. 7. 18. 카페 그 곶

초계미술관


초계미술관, 애월, 제주

멀리 제주를 떠나는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잔잔한 바다가 우측으로 넘실거리는 이곳은 애월에 있는 초계미술관이다. 갤러리라고 해야 할까. 조각을 전공했다는 분이 서울에 살면서, 2층은 집이고 1층은 갤러리와 카페가 있는 이곳을 지으셨다고 한다. 블랜딩한 원두로 내려주는 커피는 내 입맛에는 너무 연해서 이따 그곶에 가면 진한 커피를 마셔야지, 라고 생각한다.
공항에서 미리 예약한 렌트차량을 인수 받고 단번에 검색한 대봉식당으로 가 된장찌개에 아침을 먹고는 이곳으로 왔다. 원래 생각은 삼성혈을 보고 너븐숭이를 거쳐 해녀박물관에 들렀다가 섭지코지로 가려고 했는데 막상 식당이 공항에서 우측으로 빠진, 제주 서쪽 방면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동선을 반대로 틀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계획은 없다. 숙소 체크인을 하기 전까지는 발길 닿는 대로, 눈 머무는 대로 천천히 움직이려 한다. 결국 모든 여행에서 도달하게 되는 이런 나의 무책임한 방식에 말 없이 동의해 주는 無가 고맙다. 그런데 단 한 곳, 이타미준의 水, 風, 石 뮤지엄에는 반드시 들르고 싶은데 사유지라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일단 가 보기는 하겠지만, 사유지를 떠나 또 다른 방식으로 제주를 빛내줄 아름다운 건축이라고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커피를 다 마시면, 한담마을에 들렀다가 금능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그곶에 갈 생각이다. 


2014. 7. 18. 초계미술관

2014/07/25

제주로

김포공항으로 가기 위해 공항전철에 탑승했다. 여행을 떠나는 가볍고 설레는 마음과는 별도로 기분이 대체로 우울하다. 그건 직접적으로 아침마다 받아보는 일간지 때문인데 그곳엔 대부분 우울한 소식들로 가득했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 아무 대책 없는 부동산담보대출 및 소득기준대출제한완화에 이어 2 주택 이상 보유자에 대한 전세 과세 후퇴, 앞서 발표된 임대수익자들에 대한 과세 후퇴, 이스라엘의 멈추지 않는 팔레스타인 공습, 무책임한 광역버스 입석 금지 그리고 뒤이은 요금 인상 검토, 어제 광주에서 일어난 헬기 추락 사고에 따른 5명 사망, 어차피 일몰일 게 뻔한 관세화를 앞세운 쌀 시장 전면 개방… 
4시 반쯤, 알람 소리에 깼더니 별안간 천둥번개가 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장마전선이 드디어 북상했나 보군, 하는 생각으로 창밖을 봤더니 마른 하늘이다. 새벽의 여명에 힘입어 여전히 짙은 구름은 멀리 남산을 압도했고 천둥번개와는 무관하다는 듯 드문드문 행인이 눈에 띄었다. 씻고 팀버랜드 모자를 찾고 남은 짐을 꾸리니 시간이 알맞았다. 커피는 못 내렸다. 우산을 가져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등산화만 챙겨 집을 나섰다. 
162번 버스를 타고 이른 아침의 적막에 때때로 천둥번개가 번쩍 쿵쾅하는 분위기를 뚫고 서울역으로 갔다. 다행히 서울역에 내렸을 때에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신문으로 낮게 얼룩진 기분은 無를 만나면 금세 사라져 버리겠지만 이런 사라지는 감각의 희석 때문에 세상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정신을 차리자. 나도 그리고 모두도.


2014. 7. 18. 공항전철

제주에 간다

윤영배를 들으며 제주에 갈 짐을 대충 꾸렸다. 짐 싸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그런지 매번 듬성듬성, 이것저것 꺼내만 놓은 채 정리는 꼭 느지막이 하게 된다. 벌써 자정이 넘었다. 아침 비행기를 타려면 벌써 잠자리에 들었어도 잠이 부족한 시간. 한두 페이지를 보더라도 책 한두 권은 반드시 챙기게 되는데, 이번엔 천상병 시인의 시집 <주막에서>와 박태원의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그리고 최근 감동적으로 읽은 고희범의 <이것이 제주다>를 준비했다. 
윤영배가 언제부터 제주에 내려가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꽤 자주 눈에 띄어서 그가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를테면 홍대 두리반에서, 팔당 두물머리에서, 녹색평론과 가장자리 사무실에서, 사직동 그 가게에서, 밀양에서, 내성천에서, 본업인 음악인으로서 카페나 공연장에서, 그는 쉬지 않고 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그의 삶은 몹시 느긋해서 제주에서 나무나 베고 막걸리나 마시며 쇼스타코비치나 바흐를 듣는다는 그가 언제 이렇게 멋진 음악을 만들고, 언제 그렇게 사회에 폭넓게 전달되지 않는 목소리에 힘을 보태기 위해 동분서주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제주에 간다고 해서 그를 만나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삶을 대하고 있는 모습이 내게는 꽤나 인상적이다. 
어쨌거나 날이 밝으면 나는 작은 백팩을 둘러메고 공항으로 간다. 그리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환상의 섬 제주로 간다. 한라산이 곧 제주인 아름다운 화산섬 제주, 그곳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은 오래된 굴곡진 역사와 빛을 띠고 내게 다가오겠지. 가 보고 싶은 곳이 아주 많지만 늘 그랬듯 발길 닿는 대로 여유를 잃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런데 짧든 길든, 여행길에 처음으로 랩톱을 챙겨갈 생각인데, 얼마나 쓰게 될 것인가. 아니, 양보다는 순간의 느낌을 충실히 기록하기 위함이라 해 두자. 그럼, 이제 자도록.


2014. 7. 18. 밤, 방

성북동을 위하여 - 수화 김환기

樹話, 부암동 환기미술관

순서가 뒤바뀐 듯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1세대 추상화가 수화 김환기를 화가가 아닌 건축물로 먼저 대하고 알았다. 부암동 환기미술관 말이다. 부암동에는 수화가 타계하고 김향안 여사가 생존해 있을 때 건립한 환기미술관이 있는데, 90년대 초, 미술관 건립부지로 그들 부부가 한국전쟁 전후로 살았던 성북동을 생각했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성북동 지세와 유사한 지금의 위치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집을 구하는 친구에게 나는 성북동으로 오기를 권한다. 그러면 대개는 성북동은 안 좋아하는 모양이다. 심한 친구는 성북동은 못살 곳으로만 안다. 교통이 불편한 것을 첫째 흠으로 잡는다. 실은 성북동이 좋다는 것은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뱅뱅 도는 세상이다. 헌데 불편한 성북동으로 왜 오라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차 머리에까지 도보로 20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성북동은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꽃이 피고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 달도 산협의 달은 월광이 다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환기미술관

8월의 쏟아지는 비를 뚫고 처음 찾은 부암동은 덕분에 한적했고 미술관의 분위기는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수화는 더욱 환상적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성북동을 위하여 - 수화 김환기>를 쓰고 있다. 
그때 부암동에서 수화를 처음 만나고 그가 쓴 글을 모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읽고 그의 그림을 접하면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수화가 성북동에 살게 된 이력도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의 성북동엔 그가 김향안 여사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수향산방이 남아 있지 않다(대신 그가 성북동에 살 적에 그렇게 성북동에 와 같이 살자고 했던 혜곡 최순우의 집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재단법인 내셔널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매입,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때때로 그는 나를 성북동 자기 집 이웃으로 이사하라고 권했고 나를 위해서 그는 그의 바로 이웃집을 비롯해서 그럴싸한 집들을 몇 번이나 찾아서 보여 주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성북동 골짜기가 너무 호젓해서 나의 집 식구는 늘 술에 취해 늦게 돌아오는 나를 탓 삼아서 좀처럼 성북동 이사를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북동 수화 이웃으로 이사하는 일은 유산이 되었다. 그가 영영 가 버린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새삼스러워진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천장이 얕은 좁은 지프차 속에서 그 큰 허우대를 활등처럼 구부리고 같이 앉아 공항으로 나가는 동안 그는 털썩거리는 차 속에서 몇 번이고 "거지 같은..." "거지 같은..." 하는 식의 알 듯 모를 듯한 허탕지거리를 뇌까렸고, 나는 수화에게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고 당부를 했다.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최순우, 학고재 

그의 호, 수화의 수(樹), 향안 여사의 향(鄕)을 합하여 이름 지은 수향산방은 원래 미술사학자였던 근원 김용준이 자신이 살던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겨준 집이다. 수화는 이곳에 살며 성북동의 정취를 사랑하였고 그림을 그렸으며 그가 평소 아끼던 항아리를 한가득 놓아두기도 하였다.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에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노시산방이 지금쯤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도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근원수필> 김용준, 열화당 

성북동, 성북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먼저 떠올릴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로 인해 성북동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쉽게 그 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인데, 여기 이산(怡山) 김광섭 시인의 또 다른 시가 있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수화가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한국에서 연락이 오기를,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하니 출품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김향안 여사는 심사위원이라면 모를까 작품 의뢰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화를 냈다 한다. 하지만 수화의 동의로 작품을 출품하게 되고, 그 작품으로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때 수화가 출품한 작품이 이산의 <저녁에> 구절을 인용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뉴욕시절의 추상화들은 대부분 ‘무제’로 남겨졌다. 


2014. 7. 20. 제주, 두모악갤러리 무인찻집에서

2014/07/10

해방과 4·3, 그 비극의 현장 - 큰넓궤와 헛묘

빛 한 점 새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 칠흙 같은 어둠. 눈을 감았다 떠본다.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어둠은 나의 존재 자체를 의심케 한다. 이따금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나의 청각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해 줄 뿐이다. 손을 더듬거려 옆 사람의 존재를 확인한다. 4·3 당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에 숨어 있던 120명 주민들은 동굴 속 어둠에서 죽음의 공포를 달랠 수 있었을까. 
1948년 11월 15일, 안덕면 동광리에서는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마을 유지 10명으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사흘 뒤 마을은 불태워졌다.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목숨을 부지할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해안 마을로 내려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일단 군인들이 없는 산으로 들어가 숨는 길밖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춤추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무등이왓’, 삼을 재배하던 ‘삼밧구석’ 등 안덕면 동광리의 자연마을 사람들은 마을 목장 안에 있는 용암 동굴 큰넓궤에 숨어들었다. 한 사람이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은 동굴은 입구 주변이 나무와 덤불로 덮여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 큰넓궤가 숨을 만하다고 알려지면서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120명이나 됐다. 
굴 입구를 기어 들어가면 넉넉히 일어설 수 있을 만큼 동굴 천장이 높아진다. 5미터쯤 안쪽에 절벽이 나타난다. 4미터 높이의 절벽을 내려가는 일은 쉽지 않다. 발 디딜 곳을 찾으려면 아래에서 적어도 두 사람이 도와줘야 한다. 우리는 가져간 사다리를 이용해 아래로 내려갔다. 절벽 아래에는 날카로운 용암석들이 무더기 지어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에 피해 있던 주민들은 나름대로 내부 수칙을 정해 질서 있게 피난 생활을 했다. 절벽 아래 제법 넓은 공간의 양쪽 벽 아래에는 깨진 항아리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간장, 된장, 식수 등을 담았던 항아리들을 이곳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이 공간의 한쪽 구석 외진 곳은 화장실로 사용됐다. 공간 안쪽에는 1미터 높이의 돌담을 쌓아놓았다. 방호벽이다. 이 방호벽을 지나야 깊은 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잠을 자거나 피신하던 공간은 굴의 깊은 안쪽에 있다. 바위 천장이 낮아 30여 미터를 기어가야 한다. 바닥과 천장 사이가 1미터 정도 되는 곳은 장갑 낀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리를 편 채 기어갈 수 있었지만, 낮은 곳은 높이가 50~60센티미터에 불과해 낮은 포복을 해야 했다. 
힘들게 기어가는 동안 동굴 천장이 조금만 내려앉아도 그대로 깔리거나 갇힐 수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다. 날카로운 바닥에 무릎이 닿지 않게 하려면 손바닥과 발끝으로 기어가야 했다. 몇 미터 가지 못해 무릎으로 기기 시작했다. 숨이 턱에 차올랐다. 중간 지점에서 한참이나 숨을 돌리고서야 넓은 공간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굴 안쪽에는 폭과 길이가 10~30미터쯤 되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큰 굴곡이나 경사는 없었지만 날카로운 용암석이 울퉁불퉁하게 바닥을 이루고 있어서, 두꺼운 이불을 깔았다고 하더라도 반듯이 드러누울 수는 없는 곳이었다. 바닥 형태에 몸을 맞취 웅크린 자세로밖에는 견딜 수 없었을 것 같다. 굴 안에는 오른쪽으로 1.5미터 높이의 또 다른 굴이 뚫려 있어, 2층 구조를 하고 있었다. 당시 큰넓궤에 먼저 들어온 주민들은 1층에,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2층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200여 미터 떨어진 도너리 오름에 보초를 세워 군인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물을 길어오거나 식량을 준비하는 등의 역할을 분담했다. 그렇게 120명이 이곳에서 50일을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을철 수확도, 소, 닭, 돼지 등 기르던 가축도 포기한 채 오로지 산목숨 지키는 것만이 목적이던 주민들에게 큰넓궤는 더 이상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굴에서 나와 마을로 내려갔던 사람이 토벌대에게 붙잡히면서 큰넓궤의 위치가 알려지고 만 것이다. 토벌대의 앞장을 서서 큰넓궤로 향하던 이 사람이 토벌대를 따돌리고 달아나 굴 안으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굴 안에서 이불을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불을 지폈다. 굴 밖으로 매운 연기가 나가자, 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 토벌대는 총만 난사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철수했다. 지혜와 용기로 죽음을 모면한 주민들은 날이 밝기 전 굴을 빠져나와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져 눈 덮인 한라산을 헤매던 주민들은 하나둘씩 토벌대에게 붙잡혔다. 영실 근처에 볼레 오름에 숨어 있던 주민들은 이듬해 1월께 대부분 토벌대에게 사로잡혔다. 동광리 주민들은 산으로 피했던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서귀포의 단추 공장 건물에 갇혀 있다가 정방 폭포 위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다. 
4·3이 끝난 뒤 천행으로 살아남은 유족들은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수소문 끝에 학살 현장을 찾았으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시신들이 바다로 떠내려가기도 했고, 정방 폭포 위 학살터에는 5평 넓이의 구덩이에 유골들이 뒤엉켜 있어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유족들은 죽은 이들의 혼을 불러 헛봉분을 쌓고 묘를 만들었다. 동광육거리 근처 밭에 있는 ‘헛묘’는 임문숙 씨가 어머니와 아내, 사촌 형 부부, 제수 등 아홉 명의 묘를 조성한 것이다.

<이것이 제주다> 고희범, 단비


여름의 제주 여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도 프랑스야!

알제리 독립전쟁이 시작된 1957년은 알베르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였다. 그는 “조국을 배반할 수는 있으나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를 배반할 수는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식민지에도 반대하지만 알제리에서 프랑스인들이 쫓겨나는 것에도 반대한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소설 <페스트>로 알 수 있듯이 카뮈는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이다). 카뮈가 인간관계와 명분 사이에서 주저했다면 사르트르는 단호했다. 
사르트르는 말과 글로 식민지의 반인간성, 반역사성을 강력하게 외쳤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책으로까지 나섰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인들이 갹출한 독립지원금이 들어 있는 돈가방의 전달 책임자를 자원했던 것이다. 프랑스 경찰의 감시를 피해서 그의 책임 아래 국외로 빼돌린 자금은 알제리인들의 무기 구입에 필요한 돈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반역행위였다. 당연히 사르트르를 법적으로 제재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골 측근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이에 대해 드골은 이렇게 간단히 대꾸했다. 
“그냥 놔 두게. 그도 프랑스야!”
‘그도 프랑스야!’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20세기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사람을 만나고 또 그 두 사람이 가장 프랑스적인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과 만난다. 사르트르가 프랑스에서나 나올 수 있는 사상가, 문필가였다면 드골 역시 프랑스에서나 나올 수 있는 정치 지도자였다. 어쩌면 드골이 한 수 위였는지 모른다. 그의 위대성은 “그도 프랑스야!”와 “나는 당신들을 이해했습니다”의 두 마디에 농축되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는 “그도 프랑스인이야!”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도 프랑스야!”라고 말했다. 둘 사이에는 말의 묘미 이상의 차이가 있다. 예컨데 “한총련 학생들도 한국인이야!”와 “한총련 학생들도 한국이야!”의 사이에는 실로 큰 차이가 있지 아니한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한겨레신문사

가장자리

홍세화 선생이 편집인으로 있는 <말과활>을 발행하는 학습 공동체이자 협동조합 <가장자리>에 조합원 가입을 했다.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었는데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드디어 가입신청서를 제출하고 출자금을 납부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하여 각종 모임이나 <가장자리>가 추구하는 것들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앞으로 조합원으로서의 시각으로 <가장자리>를 주시하고 기회가 되는 대로 활동에 참여하며 지켜볼 일이다. 
사무실에 두고 읽는 책이 몇 권 있는데, 요즘은 화장실에 갈 때면 꼭 홍세화 선생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들고 가 한두 꼭지를 읽는다. 아무 데나 펴 읽어도 좋지만 처음부터 천천히 읽고 있다. 읽을 때마다 현실 감각을 일깨워주는 예리한 사회에 대한 시선이 생각의 영역을 확장해 다시금 우리 사회를,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촉매제로써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가장자리>를 처음 알게 된 건 이발사 윤영배 때문이었는데, 괜찮은 공동체인 걸 충분히 알면서도 가입을 미뤄왔던 건 다름 아닌 넘치는 읽을거리들 때문이었다. 특히, <말과활>과 같이 격월로 발간되는 <녹색평론>을 꼼꼼이 읽기에도 벅차하고 있고 매일 받아 보는 일간지도 허투루 읽기 투성이어서, 일간지 구독을 1년만 채우고 조합원으로 가입해 <말과활>을 읽을 생각이었다. 이런 이유가 되지 못하는 이유로 미뤘던 가입을 오늘에야 비로소 하며 다소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건 홍세화 선생에 대한 믿음과 드디어 뜻있는 공감의 영역에 발을 내딛었다는 출발로서의 상쾌 때문일 것이다. 
문득 <녹색평론>을 처음 만난 때가 떠오른다. 남산도서관에서였다. 한참 남산도서관에 주로 다닐 때였고, 그곳 4층의 예술분야 자료실의 너른 창을 통해 남산과 용산 일대를 바라보는 걸 좋아했었다. 그날도 도서관 자료실을 들락거리며 책을 보듬다가, 한없는 감동으로 읽은 책 <아름다운 사랑, 삶 그리고 마무리>의 역자후기에서 본 <녹색평론>에 대한 호기심으로 정기간행물실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한두 권의 간행물을 두고 읽고 있었고 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서가를 빙 둘러보며 살피다가 <녹색평론>을 발견했다. 당시 내가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분명하게 남아 있지 않고 기억도 불분명하지만 그 길로 <녹색평론> 구독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고, 올해부터는 정기구독이 아닌 후원회원으로서 작은 보탬이지만 <녹색평론>을 지지하고 있다.

2014/07/08

주말, 느지막이 집에 들어오니 누나가 거실에 불을 켜둔 채 뻗어 있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그러고 있길래 피곤하면 들어가 자, 라고 했더니 뭐라 중얼거리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뭐라고? 되묻는 내 말에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힘겹다는 듯 꺼낸 단어는 설거지였다. 순간 머리는 회전한다. 아, 나도 피곤한데, 내일은 월요일이고. 하지만 마음은 동정한다. 하루 종일 아이 둘을 보살피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 나는 크림을 온몸에 듬뿍 바르는 동안 고민을 했고 결국 부엌으로 향했다. 개수대에 가득 쌓여 있는 그릇들을 물로 가볍게 행군 후 차근차근 설거지를 하는데 문득 어느 부끄러웠던 때가 떠올랐다. 

며칠 전이었다. 퇴근길 전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얼음과 뒤섞인 자줏빛 액체가 흔들리는 전철의 움직임을 따라 선을 그으며 전철 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자줏빛 액체의 줄기를 따라 고개를 움직여 보니 한 남녀 커플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상대방 탓을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자신들이 공공장소에서 저지른 일을 수습은 해야 할 터. 그런데 마땅한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여성의 가방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얼마 되지 않는 휴지로 남성이 허리를 숙여 수습을 하는 모습을 보자 내 머릿속에는 가방 안에 든 일간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왜 저러지, 왜 하필 이런 데서 티격태격하는 거야, 결국 이렇게 남들 피해줄 거면서, 라는 생각이 앞섰고 선뜻 가방에 든 신문으로 손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자줏빛 액체가 기어코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앞까지 흘러오자 이건 아니다 싶어 신문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미 그들 앞에 앉던 한 중년 남성이 자신이 보던 신문을 건낸 뒤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신문을 꺼내려던 내 손을 거뒀다. 찰나에 가까운 그 시간, 그러니까 잘못이 있든 어쨌든 그것보다 상황 수습이 먼저라는 기본적 생각을 미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일이 떠올랐다. 

역시나 전철을 타고 출근을 하던 아침이었다.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뒤섞인 혼잡한 전철에 앉아 있던 나는 그때에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책에 고정된 시선에 무언가 자꾸만 어른거리는 듯한 모습이 감지되어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바로 앞에 선 대학생으로 보이는 날씬하고 키가 큰 남성이 어지럽고 속이 거북한 듯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약간 비틀거리며 입을 가리고 있었다. ‘왜 이러지' 뭔가 불안했다. 책에 집중할 수 없었고 곧 무슨 일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혼잡한 전철에서 어찌 하는 것보다 내릴 때까지 아무 일 없길 바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불안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여전히 책을 읽는 척하고 있던 시선 앞으로 고체 덩어리가 섞인 불투명하고 걸쭉한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아니나다를까 그 학생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구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피해 혐오스런 눈길로 그 학생을 바라보던 내 귀에 한두 사람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신문지 있으신 분 없어요?”
아, 심한 부끄러움이 날 습격했다. 나는 내 한 몸 더럽혀질까 재빨리 자릴 피했을 뿐인데 그 혼잡한 전철에서도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그 학생이 왜 구토를 하는지, 공공장소인지 어떤지를 떠나 당장의 상황을 수습하고 그를 돕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내가 그에게 혐오스러운 눈길을 던진 건 그가 채 가시지 않은 숙취 때문에 그러는 것일 거라고 단정지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곳곳에서 “여기요" 하는 외침과 함께 신문지가 등장했고 그 학생은 묵묵히 건네 받은 신문지로 자신의 토사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수습이 끝나자 맞은편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은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앉으라며 자리까지 양보를 하셨다. 
나는 나를 덮친 심한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모르며 곧 도착한 정거장에서 하차를 했고 그토록 혼잡했던 전철에서의 타인에 대한 사람들의 따스한 배려에 깊이 감동을 했다. 그때 내 가방엔 역시나 일간지가 있었지만 자릴 피하기에만 급급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감히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2014/07/06

나폴레옹제과점이 있는 한성대입구역

주로 산책으로 연결되는 동네와 성북동은, 나에게는 하나의 공간처럼 여겨지지만 그렇게 본다면 대학로나 낙산공원, 더 나아가 삼청동, 계동까지도 묶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우선 분리하기로 하되 하나처럼 느껴지도록 잇고 싶은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성대입구역이라는 지점을 두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정말 한성대입구역이야말로 내가 걸어 다니곤 하는 많은 장소들을 연결해준다. 우선은 복원한 성북천의 시작 지점이고 집에서 낙산공원에 가려면 스치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대학로에 넘어가거나 집으로 넘어올 때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리고 성북동에 갈 때 명륜동이나 와룡공원에서 가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한성대입구역을 거쳐 가곤 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내게 있어서 주요한 지점인 한성대입구역엔 무엇이 있나? 

우선 나폴레옹제과점이 있다. 빼놓을 수 없는 1번이다. 나폴레옹제과점은 원래 지금 있는 곳에서 낙산성곽 방향인 길 건너편 1층에 작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언젠가 지금의 자리에 건물을 짓더니 명성(?)에 걸맞는 크기로 새로이 자릴 잡았다. 언제부터 내가 그곳에 드나들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빵보다는 케이크가 먼저였다. 지금은 가족이나 지인의 기념일이 있으면 케이크는 꼭 나폴레옹제과점에서 사려고 할 정도로 그곳 케이크에 익숙해지고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엔 바로 먹지 않을 거라면 반드시 냉장보관을 하라는 위대한 통팥빵과 생크림빵이 있다. 지금도 통팥빵을 처음 먹었을 때의 감격이 생생하다. 길쭉하고 날씬한 빵을 가볍게 부여잡고 한 입 물었을 때 전해지는 통팥의 질감과 냉장보관에서 비롯되는 차가운 감촉, 바스러질 것 같은 빵의 조화는 과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빵 나오는 시간을 별로 고려하지 않고 그때 그때의 운에 맡기는 나로서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지 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나폴레옹에 갔을 때 쟁반도 들지 않고 냉장보관 코너로 직행을 했는데 통팥빵이 하나도 없으면 몹시 서운하다.
재료의 솔직함이 전해지는 건 생크림빵도 마찬가지다. 네가 진정 이제껏 먹어왔던 게 팥빵이고 생크림빵이 맞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통팥빵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생크림빵 역시 마치 차갑고 신선한 아이스크림이 빵 사이에 그대로 스며 있는 듯한 맛을 선사하는데 이건 냉장보관의 효과가 극대화된 것임이 분명하다. 원래 팥빵을 좋아하는 나는 우선 통팥빵을 사수하고 생크림빵으로 눈을 돌리는 편인데, 어쨌거나 이 둘의 맛을 본 후터는 다른 곳에서 동종의 빵을 먹기가 약간은 꺼려진다. 

나폴레옹제과점, 한성대입구역

주로 퇴근길에 가끔 책을 읽으러 스타벅스에 가곤 하는데, 내가 자주 가는 스타벅스는 바로 나폴레옹 옆에 위치하고 있다. 대체로 스타벅스는 분위기가 비슷하고 손님이 많은 편이지만 이곳은 선곡도 볼륨의 정도도 괜찮아서 대화 소음이 심하지 않은 곳이라면 두세 시간 정도 책을 읽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또한 바로 옆에 나폴레옹이 있으니 그곳에서 요기할 빵 몇 가지를 사서 가면 시간이 더욱 든든하다. 특히 식사 무렵 스타벅스에 앉아 있으면 다수의 사람들이 스타벅스 커피에 나폴레옹 빵을 먹으며 시간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얼마 전, 동네에서 둘째 조카 돌잔치를 하고 부모님이 내려가시기 전 가볍게 저녁을 먹어야 하기에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다가, 가볍게 먹을 거면 국수나 먹을까요, 하고는 성북동 국시집으로 갔다.
나폴레옹제과점 뒷골목에 가정집 형태로 간판이라고 해야 손바닥보다 조금 큰 게 고작이어서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가 수월치 않은 이곳을 알게 된 건 맛 칼럼을 맛깔나게 쓰는 황교익의 글에서였다. 박정희 정부 시절, 분식의 날이 지정되었던 1969년에 명동에 있는 명동교자와 함께 문을 열었다고 하니 벌써 40년이 넘는 세월이 쌓인 곳이다.
어느 날 산책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들러 처음 국수를 먹었는데, 대체로 슴슴한 엄마의 손맛에 길들여진 내 미각에 이곳 육수는 조금 짰다. 이는 나보다 더 싱거운 미각을 자랑하는 누나를 이곳에 처음 데려왔을 때에도 드러났는데 누나는 국물을 한 수저 입에 넣더니 “왜 이렇게 짜!”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거부감이 들 정도의 짠맛은 아니고 대체로 무난한 편이다. 그리고 기계로 빼낸 면은 가늘고 푹 삶아져 있으며, 양은 제법 많아서 한 그릇 비우고 나면 그윽하게 배가 불러온다.
이곳을 찾는 손님층을 보면 오래된 식당들이 대체로 그렇듯 나이 지긋하신 가족 단위가 많은데 그 분들이 여전히 이곳을 찾는 걸 보면 그래도 맛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 같다.


2014. 7. 6.

2014/07/02

코스타리카 축구대표팀이 브라질월드컵에서 그리스를 꺽고 8강에 진출했다. 
코스타리카. 커피 생산지 정도로만 인지하고 있던 이 나라에 주목하게 된 건 녹색평론을 읽고 나서이다. 군대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 그것도 이미 반 세기도 더 전에.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와 소련으로 양분된 냉전의 시대에 군대를 없앤 나라, 코스타리카. 
과연, 군대가 없는 나라를 우리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군인 세력들이 30년도 넘게 (사실상) 무력통치를 했던 나라 아닌가. 그리고 지금도 북한은 시시때때로 미사일을 발사하고, 서해상에서는 잊을 만하면 충돌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군대가 없다니! 
굉장한 근본주의적인 시각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성찰하게 하는 녹색평론은 얼마 전에는 기본소득으로 나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엔 군대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를 소개하면서 다시 한 번 나를 움찔하게 했다. 그리고 코스타리카에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언젠가 꼭 한 번 가봐야지.’ 

지난 1월, 오랜만에 공감에 당첨이 되었다. 뮤지션은 윤영배. 그를 처음 본 건 3년 전 제천음악영화제에서였다. 장필순과 고찬용, 윤영배가 함께 나와 의림지 옆에 마련된 무대에서 공연을 했는데 장소와 매우 어울리는 공연이었고, 같이 있던 일행은 이발사 - 이발사 하며 윤영배를 응시했다. 그때 나는 윤영배가 이발사라는 걸 알았다. 우습게도 네덜란드 유학 시절 혼자 머릴 깍곤 했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내 아이팟에도 그의 첫 번째 ep는 이발사로, 나중 앨범은 윤영배로 리핑이 되어 있다.) 
이후 윤영배를 몇 번 더 봤는데 또 한 번 잊을 수 없는 공연은 4대강 공사가 한창이던,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 양평 두물머리에서였다. 
오랫동안 두물머리에서 하천점용허가를 받아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4대강 공사의 일환으로 해당 하천부지가 공원조성계획에 포함되면서 농사를 위한 점용허가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다. 그에 맞춰 보수 일간지나 정치인들은 농사용 거름 따위가 팔당상수원으로 무분별하게 유입되고 있다며 4대강 사업에 동조하는 동시에 멀쩡하게 수십 년간 농사를 짓고 있던 사람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발해 두물머리 농부들은 법원에 점용허가 취소 소송을 하는 등 시위를 시작하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말마다 그곳에 가 농사에 참여하며 그들과 함께 했고, 많은 인디밴드들이 그곳에 모여들어 지지 공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이었다. 

중앙선 전철을 타고 양수역에 내려 우산을 쓰고 두물머리를 향해 걸었다. 그곳 사람들의 삶은 두물머리 농부들의 투쟁이나 4대강 사업과는 무관한 듯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어딜 가나, 대체로 삶의 모습이 그렇듯. 
멀지 않았다. 여러 생각에 빠져 있어서 그런지 금세 여기저기 난도질 당한 듯 철거된 비닐하우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비로 진흙탕이 된 비포장 농로를 이리저리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피해 걸으며 폐허가 된 두물머리 농지 일대를 둘러보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떠난 듯 대부분의 비닐하우스가 버려진 듯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몇몇 곳에서는 밥도 지어 먹고, 여전히 농사를 이어가는 듯 생기가 있었다. 두 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끝에 다다르자 내리는 비와 흐린 날씨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한결 짙게 느껴졌다. 빗소릴 들으며, 하염없이 드넓은 강 위로 떨어지는 비를 보며 희망에 닿지 못한 내 부정의 의식을 경계했다. 이곳은 두물머리다. 이곳 덕분에 유기농대회도 열릴 수 있게 된 거다. 상수원보호구역이라는 강력한 규제가 유기농을 태동하게 한 것이다. 20여 년 전 쿠바의 유기농이 그랬듯. 
많지는 않지만, 그리고 비록 작지만 목소리와 발길이 모이고 있었다. 공연은 어느 비닐하우스 안에서 열렸다. 봄눈별의 공연이 끝나고 윤영배와 같이 온 이상순이 함께 무대(라고 할 건 없지만)에 올랐다. 두 사람이 기타를 잡고 몇 곡을 연주하고 나서 말 없는 이상순 대신 윤영배가 몇 마디 말을 했다. 그는 늘 짧게, 앞뒤 없이 말을 한다. 그때 그가 녹색평론 얘길 했다. 다른 말 없이 “녹색평론 보시는 분?”이라고 짧게. 그러면서 나를 포함한 몇몇이 손을 들자, 반가워 하는 눈빛을 보이며 참 좋은 잡지니 많이들 보시라는 말만 했다. 그리고 연주를 이어갔다. 여전히 비는 내렸고 공연을 마친 그들은 비닐하우스 입구 쪽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몇 년 만에 공감 무대에서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새 앨범 <위험한 세계>를 위한 무대였다. 함께 간 지인과 수다를 떠느라 늦게 입장을 해서 측면 자리에 앉아 그의 옆모습만 내내 보았는데, 그때에도 그는 자신 특유의 스타일로 몇 차례 말을 했고, 앵콜 곡까지 마친 그는 무대를 내려가다 멈칫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서는, “군대 없는 나라, 라고 들어봤어요? 그런 나라가 있어요.”하며 은근한 웃음을 짓고는 사라졌다. 

어쨌든 군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가 브라질월드컵 8강에 진출했다. 선전을 기원하며 '언젠간 꼭 가봐야지', 다시 한 번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