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문제는 생산영역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졌어요. 1980년대 이후 재생산 영역의 자본화가 된 거죠. 입는 것, 먹는 것, 감정을 교환하는 것, 지식과 가치관을 전수하는 것, 사랑을 나누는 것 등 인간 삶의 사적 영역이 모두 상품화되었죠. 인간이 자율성, 의지, 감정을 갖는 사회적 존재로 되는 전 과정이 시장에 의해 장악되고, 자본은 그로부터 초과 잉여를 쌓아가는 상황, 결국 우리는 손기술이나 숙련, 지혜를 가진 생산자가 아니라 단순한 상품 소비자로 전락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소비만을 부치기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돈'만 갈망하고, '돈'을 위해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조건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지난 7~8년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자본의 재생산적 전환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까 결국 에코페미니즘의 관점, 즉 생명, 돌봄, 상호의존성에 기반을 둔 자존과 자급의 관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이것을 대항의 무기로 삼지 않고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사적인 삶의 영역까지 자본(상품화)에 의존하게 되었는가 보았더니, 임금노동의 강도가 너무 세다는 거예요. 생산영역에서 노동착취가 심해질수록 소비에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과중한 일로 밤늦게 귀가하니까 저녁을 해 먹지 않고 외식을 하게 되잖아요? 자본주의사회의 생산 현장의 비인간화가 우리 삶을 소비주의로, 반생태적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경쟁을 붙이는 업적 중심 평가, 장시간-저임금 등의 노동조건이 개선되는 것은 생태운동의 측면에서도 불가결하다는 거예요. 자본에 의한 삶의 식민화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하고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내 의지에 의해서 내 삶을 내 손으로 영위하는 것,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는 게 된 것입니다.
김현미, <녹색평론 151> 153-154쪽, '에코페미니즘-새판짜기의 비전과 실천', 2016년 11-12월
흥미롭게 읽은 좌담. 좀 더 본질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페미니즘은 자극적이고 그래서 늘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