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24

김현, 기형도

김현의 치열한 글을 읽다보면 치열하지도, 고르지도 못한 책읽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과 부끄럽게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래왔듯, 언제나 부끄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르다고 해야 할까. 작아(작은것이 아름답다)의 표현대로 해오름달, 1월은 새로운 무엇이 없나 하고 분주하게 주위를 살핀다. 더군다나 그런 해오름달의 습관에 '책'읽기와 '글'쓰기가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잡다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필요한 장소는 자연스레 '산'이 되었고, 몇몇 겨울산의 후보들이 있었지만 내가 택한 곳은 빛고을 무등산이었다. 아, '무등산은 알고 있다'고 했던가. 
헌데 문제의 날, 오늘 내가 눈을 뜬 시각은 이미 열차가 대전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절망적이었다. 결국 나의 빈자리만이 홀로 광주에 간 셈이다. 쓸쓸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열차표를 취소했다. 거의 하루 종일 절망적인 상태를 유지하다가 떠오른 사람이 기형도였다. 그런데 김현을 읽는 중에 기형도가 떠오르니 두 사람의 (공적) 관계 생각이 났다. 그 공적 관계란 당연히 젊은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기형도와 그런 젊은 시인이 쓴 시를 비평하는 김현의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적 관계마저 오래 가지 못했다. 기형도는 첫 시집을 준비하던 중 종로의 극장에서 죽은 채 발견이 되었고, 그가 죽자 준비 중이던 시집이 졸지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고 시집이 되며, 김현은 시 해설(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을 전달하며 시집의 제목은 <입 속의 검은 잎>으로 하자고 했다 한다. 그랬던 김현마저 이듬해 암 투병 끝에 죽음을 맞는다.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측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 이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_기형도, <죽은 구름> 


그런 신인들 중에서 기형도의 <죽은 구름>(문예중앙, 1988년 봄호)은 돋보인다. 그의 시의 원리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실존의 덧없음을 그것을 표상해줄 수 있을 주변 묘사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왜 리얼리즘인가 하면, 이 세계 밖의 어떤 것도 그가 상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왜 그로테스크한가 하면 그가 묘사하는 것에 따르면 삶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의 현실주의는 이하석의 그것과 혈연관계에 있지만, 이하석이 중산층의 성적 부패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게, 기형도는 주검의 육체적 부패에 더 집착하고 있다. 그래서 이하석의 현실주의보다 그의 그것은 훨씬 더 절망적이고 기괴하다. 인간은 더러운 창을 스쳐 지나가는 미치광이 구름과도 같다. 그의 동반자는 고양이나 늙은 개뿐이다. 그의 그 전언은 끔찍스러운 전언이다.
_김현, <행복한 책읽기> 199~200쪽, 문학과지성사, 2015 


김현은 이미 그때 중앙일보 문학월평을 통해 기형도의 시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 기형도가 바로 월평을 담당하는 기자인데, 자신의 시가 크게 다뤄지자 당황했다. 천하의 비평가 김현이 그의 시를 호평한 것이야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워낙 결벽증이 심했던 그인지라, 그 원고를 신문에 내는 것을 주저했다. 그래서 그는 김현에게 전화를 걸어 우선 고맙습니다, 라고 한 뒤 '그러나'로 시작되는 말을 어렵게 꺼내야 했다. 그러나, 정말 그러나 김현은 "내가 기형을 잘봐주려고 글을 썼다고 믿을 사람은 문단에 아무도 없을 거요. 정 싣기가 어렵다면 원고를 돌려주세요"라고 말했다. 이미 지면은 그 자리가 비워진 채로 원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그는 결국 정규웅 부장에게 구조신호를 보냈다. 정 부장은 김현의 양해를 얻어 원고에서 기형도 부분은 맨 뒤로 돌리고 양을 줄이는 선에서 월평을 신문에 내보냈다.
_박해현,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 169~170쪽, 문학과지성사, 2009


난데없는 동아일보의 짧은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기형도가 죽었단다. 아니 이게 웬일이야. 한 달 전에 그와 같이 술 마실 때의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울고 싶은 듯, 찡그리고 싶은 듯,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묘한 표정이었다. 아니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자리를 옮긴 것이 그렇게 가슴 아팠단 말인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 혼자 영화를 보다 죽다니!  
_김현, <행복한 책읽기> 272쪽, 문학과지성사, 2015 

2016/01/01

영춘, 영춘

아침에 사우나 대신 드라이브를 택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하의 아침. 창밖으로 여명이 가시기 시작했고, 여전히 달은 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우린 나섰다. 영하 십일도. 
어제 영춘에서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다시 영춘행. 옆구리에 붙어 세월을 흐르는 남한강은 얼어붙은 듯 보였다. 단양읍내에서 영춘까지는 넉넉잡아 삽십분. 문이 굳게 닫힌 영춘향교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북벽으로 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름들이 각자 내력이 있거나 이유가 있듯 북벽 또한 그랬다. 그 이름 그대로, 북벽은 낯선 이도 낯설어 하지 않도록 지어진 순수한 이름이었다. 오래된 느티나무와 마주보고 있는 북벽은 그 사이로 남한강물을 느릿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표면에는 은은한 물안개가 방랑하고 있었고, 물가 깊이가 옅은 곳은 적당히 얼어붙어 있었다. 영하 삽십도. 손이 시리고 추웠지만, 북벽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좋았다. 저 깊은 산 너머에서는 아침 해가 부지런히, 강원의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럴수록, 물안개와 얼어붙은 강물과 함께 고정된 북벽은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단양읍내로 돌아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편 오르막으로 난 길이 있었다. 그래, 영춘은 원래 굽어지는 남한강으로 인해 일종의 고립된 섬 같은 곳이었다. 그런 곳이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두 개 생기면서 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게 되었다. 그러니 다리를 건너지 않고 빠지게 되는 오르막은 옛길인 셈이다. 그 길로 올라섰다. 이제 막 해가 제 빛을 활기차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 그곳에서의 발길은 얼마나 무거웠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