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1

라이너 쿤체(Reiner Kunze)

은엉겅퀴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2024/10/13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강지나, 2023)

빈곤은, 특히 세대를 이어 빈곤이 대물림되는 문제는 사회 전반에서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노동 가치보다 자산 가치가 훨씬 높은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기반으로, 50퍼센트에 육박하는 나쁜 일자리가 임금 불평등을 형성하면, 경쟁과 선별 위주의 교육 제도가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부실하고 편협한 복지 제도가 안전망으로서의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데서 빈곤 대물림은 구조화되고 있다. (258)

2024/10/01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2024)

바슐라르의 이 책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들 둘레로 문학적 공간이 생겨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만드는 책. 우리가 유년에 꿈꾸던 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해주는 책.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매혹과 동시에 반감을 주는 책.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간의 시학>은 집에 관한 책이다. 제목을 보며 저자가 건축가거나 시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프랑스의 저명한 과학철학자다.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난 바슐라르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며 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지방의 소읍인 고향에서 중등학교 물리, 화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43세의 늦은 나이에 소르본대학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 교수가 되었다. 

바슐라르는 집념은 무척 강했지만 타인의 말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과학사 강의에서 한 학생으로부터 강의에서 다루는 세계가 너무 살균되어 있다는 불평을 듣고 존재론적 충격에 빠진다. 그날 그는 자신이 그동안 왜 불만족스러웠는지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 세균 들을 들끓게 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던 거지요." (154-155)

문제는 우리가 살림살이를 하면서 이러한 이미지들을 체험할 수 없을 정도로 기계적으로 일한다는 데에 있다. 한 사람이 온 가족의 설거지와 빨랫감을 해치우듯 처리해야 하는 분주한 일과 속에서 노동은 기계적 활동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엔 몽상을 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떠올린다면 바슐라르는 반근대적 몽상가다.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생산성의 논리에 철저히 반대하는 것이 몽상의 논리다. 몽상은 여유 없는 곳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162) 

2024/08/24

나는 왜 내 삶을 조금이라도 흔들어 보려고 하는 걸까. 

숙고 끝에 하는 결정을 이제는 잘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시작은 아주 단순한 질문이었다. 

"왜 안 해요?"

이 질문에 답을 못해서 한다는 게 글로써 우스워 보이지만, 사실이다.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그렇다면 내 안에, 그 무엇인가, 지금쯤의 삶에서, 어떤 갈증이 있었던 것일까. 

언론인 손석희가 진행하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고 있는 주말 아침, 손석희의 미국 경험담을 듣다가 이 글을 쓰고 싶어졌다. 더 정확히는 "새로운 걸 추구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다고 하는 손석희의 말 때문에.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닥친 게 아닐까 싶은 공감에. 

2024/08/01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2014)

모든 사랑은 환영이고, 모든 소통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뤄지는 불가능의 제스처란 것을.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고, 현실은 기껏해야 모호하며, 슬픔은 모두의 삶에 상시적이다. (234)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이다'라는 책의 첫 문장을, 독자는 책을 다 읽은 뒤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불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독서도 일종의 자서전이다.' 우리는 각자 자의식의 짐을 지고 혼자 걷는 사람들이지만 그 처지만큼은 다들 같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타인의 글에서만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대한의 위안이다. (237)

이것은 데이비드 실즈의 글이 아니라, 옮긴이 김명남의 문장이다. 물론(?) 아직 본문을 읽기 전이다. 가끔 옮긴이가 누구냐에 따라 옮긴이의 글을 먼저 읽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런 근사한 옮긴이의 글이라면, 당장 본문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2024/07/14

우리집 셋째

우리 가족은 수원 행궁동에 산다. 

오늘은 퇴근길에 카페에 들러 먹음직스런 케이크를 하나 샀다. 초는 다섯 개. 지금 사는 집에 이사오자마자 돌잔치를 했던 막내는 곧 만 여섯 살이 된다. 그러니 다섯 개의 초는 다름아닌 '집'의 나이인 셈이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이사온 날을 기념해 조촐하게 케이크에 초를 꽂고 '집의 생일'을 축하한다. 

오늘은 둘째인 막내가 말했다.  

"다섯 살이면 우리집 셋째네." 


새집을 짓기 위해 우리가 헐어버린 옛집 주인과 계약을 체결하던 날 부동산을 나와 등기부등본에 걸려 있는 근저당을 말소하기 위해 옛 주인과 동행했다. 옛 주인은 같은 날 집 두 채를 매도했는데 그 중 한 채가 장안문 앞에 있는 정지영커피집이다. 주인과 동행해 먼저 들른 곳은 자동차 부품이 즐비한 그의 가게였는데, 정지영커피집 바로 옆에 있던 그 가게도 지금은 술집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 행궁동에 이사온 2019년만 해도 동네가 지금처럼 번잡하지는 않았지만 변화는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 사이 뒷집 어르신이 지병으로 동네를 떠나시고, 골목 안에 계시던 할머니도 떠났다. 골목의 파수꾼처럼 매의 눈으로 부지런히 동네를 보살피던 어르신마저 떠나자 골목에 있던,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눠 먹던 평상은 치워졌다. 하루는 골목에서 빗질을 하고 있는데 평소에 즐겨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던 골목 건너집 할머니가 아무 기대도 희망도 없는 말투로 말하셨다. 우리 곧 이사간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은 헐리었고 아직 빈 터로 남아 있다. 

부끄럼 많은 첫째 아이가 이사오자마자 찾아가 놀곤 하던, 또래가 살던 골목 안쪽 집은 이제는 동네에 두 개나 들어선 유명한 카페가 되었고,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골목에서 맘껏 놀고 있으면 러닝 셔츠 바람으로 길에 나와 아이들을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공방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만 해도, 이사오고 나서도 한동안은, 우리 집 앞 골목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 중에는 가장 한산했다. 그랬던 길과 골목마저 이렇게 됐으니 신풍장안동의 다른 곳은 말해 무엇하랴. 

아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어쩌면 나는 그걸 몰라서가 아니라 피하고 싶어서 차마 묻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24년 이른 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2016)

"그렇게 큰 집만 설계하다가는 스케일 감각이 이상해지거든."

혼잣말처럼 이구치 씨에게 이야기한 것이 진짜 이유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고 나서 몇 년간 국가가 관여하는 대규모 공사를 위촉받아 침식을 잊고 일했지만, 설계 방침을 둘러싸고 담당 부서와 대립하다가 굴복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만큼 미국에서의 경험과 평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활약한 대부분의 건축가는 미래지향적 도시론이나 문화론을 웅변하면서 잇달아 공공 건축을 낙찰했다. 한편 선생님은 설계 경합을 전제하는 공공 건축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원래가 튀는 건축론을 피력하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디어가 다루는 기회도 저절로 적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의 선생님 건축을 십 년, 이십 년 뒤에 직접 보고 돌아다니면서 무라이 슌스케라는 건축가가 묵묵히 계속해온 일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고도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16)

아스플룬드의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의 디테일은 정면 현관문부터 시작된다. 이용자가 잡는 손잡이에는 아담과 이브의 작은 조각이 있다. 이제 바야흐로 '금단의 과일'인 사과를 먹으려고 하는 아담은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아직 없으니까, 무화과 잎사귀로 숨기지 않고 편안하게 하반신을 드러내고 있다. 도서관 입구 문손잡이에 조금 우습기도 하고 오묘하기도 한 그 순간을 고른 것은 아스플룬드의 작은 장난일까? 도서관에는 그밖에도 의장意匠인지 장난인지 모를 디테일이 모른 척 준비되어 있다. 이용자의 시각과 촉각에 호소하는 이들 디테일은 체감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예컨대 대열람실 개가식 책장 벽면에는 호두나무 벽이 책 뒤 표지 같은 곡면을 이루고 있고 놋쇠를 사용한 아르 데코 스타일의 상감상 상감象嵌은 금박을 입힌 가죽 책표지를 연상시킨다. 입구에서 완만하게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는 촘촘하고 빈틈없이 무두질한 가죽이 감겨 있다. 음료대에는 작은 인체를 조각한 수도꼭지가 달려 있다. 모든 것이 오리지널이고 실용성보다 장식성을 우선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디자인이다. 열람실 책상도, 의자도, 소파도, 벤치도 각각 여러 종류가 있고, 독서등까지 포함하면 조명 디자인만도 열 종류에 가깝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을 들여서 세부를 완성해나갔을까? 조명 회사가 기업으로 성장할 때까지는 조명 디자인도 건축가의 일이었다. 섀시나 수도 관계 제품도 마찬가지였다. 

이 오리지널 디자인들은 아스플룬드의 신경질적인 집착이라기보다 디자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기쁨으로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명도, 가구도, 예전의 건축가에게는 맨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는 즐거운 마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골격이 아니라 살갗이고 윗도리 안감이고, 요리를 완성하는 디저트 같은 것.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들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귀찮기 때문에 연구할 여지가 있다. 아스플룬드나 라이트 시절에 건축가가 마지막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의 촉감과 기억이 선생님한테 계승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232~233) 

2024/03/28

우화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부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유리병을 낚아 올렸어요. 그 병에는 종이 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답니다:

"사람들이여, 나 좀 구해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대양이 나를 파도에 싣고서 무인도에 갖다 버렸답니다. 모래사장에 나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서둘러주세요. 나 여기 있을게요."

"이 쪽지에는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틀림없이 이미 늦었을 거야. 유리병이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녔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첫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적혀 있질 않군. 대양이 한둘도 아니고, 어디를 말하는지 통 알 수 없잖아." 

두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라는 섬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불현듯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편적인 진실이란 원래 그런 법,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_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최성은 옮김 

2024/03/21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2023)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장화 뒤꿈치로 잔디를 뜯고, 차를 몰고 가기 전에 지붕을 철썩 때리고, 침을 뱉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기를 좋아한다. 신경 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12-13)

아빠는 진짜 그러면 좋겠다 싶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17)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27)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28)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69-70)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아저씨가 말한다. "오늘 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아저씨가 웃는다. 이상하고 슬픈 웃음소리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72-73) 

대단히 바쁘지도 그렇다고 아무 일 하지 않고 보내지도 않지만, 올해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있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은 슬프지만, 짬을 내서 책을 -- 이를 테면 고다르의 인터뷰라든가, 서리북에 실린 서평 따위 -- 조각내 읽을 때면 옅은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다음 주 책 모임 때문에 키건의 책을 처음으로 읽게 되었는데 비슷한 분량의 책이 한 권 더 있어 이 책 '맡겨진 소녀(foster)부터 붙잡고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우리가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을 잘 참아내 침묵을 지킨 후에 찾아오는 다행스런 여운 같은 소설. 

2024/03/18

고다르 X 고다르 (데이비드 스테릿, 2010)

다큐멘터리 리얼리즘과 연극이 있고 이 둘은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결국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 리얼리즘을 통해 연극의 구조에 도달할 수도 있고, 연극적 상상력과 허구를 통해 삶의 실재에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위대한 감독들이 어떻게 리얼리즘에서 연극으로, 그리고 다시 그 반대로 옮겨갔는지에 관해 그들의 작품을 눈여겨보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19)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조금 이상한 것을 보는 즉시 그것을 이해하려고 지나친 노력을 하는 것 같다. 사실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훨씬 더 많이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 차를 마시거나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들은 즉시 '좋다, 그런데 왜 그가 차를 마시는 거야?' 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여자는 여자다>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그 영화의 의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화는 의도가 없었다. 테이블 위에 꽃다발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무슨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것도 입증하고 있지 않다. 그 영화가 즐거움을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 영화가 모순적이 되기를, 꼭 함께 있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 나란히 놓여지기를, 즐거운 동시에 슬픈 영화가 되기를 의도했다. 물론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고 이것 혹은 저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법이지만 나는 그 두 가지 모두를 하고 싶었다. (21) 

대사는 보통 촬영 전 마지막 순간에 쓰기 때문에, 배우들이 준비할 시간은 없다. 이 방식이 좋다. 나는 배우가 좋은 연기를 할 때까지 계속 리허설을 시키는 르누아르나 조지 큐커 같은 배우들의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배후로부터 배우가 모르게 다가가는 것이 좋다. 배우가 혼자 해낼 수 있도록 맡겨 놓고 역할을 파악하려는 배우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저절로 나타나는 급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멋진 순간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차츰차츰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나간다. (23) 

'우연'을 동반한 채 일한다는 것은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영화감독들이 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연과 함께 일할 때 아마 한 번은 좋을 수 있지만 백 번이 나쁠 것이다. 그리고 언제 좋고 나쁠지를 모르기 때문에 단지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만을 가질 뿐이다. 우연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통제에 의해 일하는 것 모두를 해보고 싶다. 그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할리우드 감독이라고, 언더그라운드 감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그 둘 사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62) 

우리가 비평을 시작했을 때에는 -- 비평은 영화를 만드는 일에로의 첫 걸음이었다 -- 프랑스 신문의 수많은 비평가들은 미장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대답해야 했다. 우리는 감독은 단지 연출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특별히 중요한 사람, 즉 "씬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그 점을 분명히 할 수 있었고 이제 모든 사람 -- 실력이 있는 감독이든 아니든 -- 들은 미장센을 만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결국 미장센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아마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미학을 가질 수는 없다. (65-66) 

내 의견으로 현재 영화는 더 이상 예술 작품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볼 필요가 있다. (66) 

어떤 재난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후에야 그것을 보고 분석할 수 있으며 이전과는 다르게 되도록 노력할 수 있다.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영어로 말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비행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코드의 언어를 말한다. 유성 영화 때문에 감독들은 차츰 이미지의 중요성과 사운드가 가진 모든 가능성을 잊어버렸다. (68)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론 조사는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가치들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포드 자동차에 대한 여론을 조사하려고 하는데, 포드가 그 조사에 돈을 댄다면, 다른 사람이 돈을 댈 때와는 아주 상이한 방식으로 일이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 사회적 성격의 여론 조사를 할 때는 매우 주의해서 질문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질문이 질문자가 살고 있는 상황과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70)

영화는 촬영된 현실이고 현실에는 어떤 상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상징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삶일 뿐이다. 상징주의는 추상적인 것으로 삶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제작자가 나에게 상징적 영화를 만들 것을 요구한다면 만들 줄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71) 

모든 사람들이 삶에서 차이를 추구하려 하는 반면 사실 우리는 유사성을 추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좀 전에 나는 사운드와 이미지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그 두 가지는 똑같다고 대답했다. 나에게 과학자와 에세이스트는 동일한 존재다. (74) 

개 (김훈, 2021)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를 못한다. 나는 좀 더 자라서 알았다.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불쌍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48)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2021)

좋은 음악은 '나에게 몰래 다가와' 나를 변화시키는 음악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킬 만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둘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힘들의 집합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 있다. 여기서 뜻밖에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을 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나를 통해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안정적이고 뚜렷한 자아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이를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자적 자아 개념을 버린 뒤 이러한 내려놓음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