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5

더블하트의 추억


동네에 있는 작은 펍에서 그가 건넨 명함을 받고 거기에 그려진 두 개의 하트를 보고는 성인용품을 상징하는 줄 알았다. 뭐야 이 사람. 

그를 처음 만난 건 서울을 떠나 용인으로 이사를 오던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노란 파카를 입고 자신의 집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전화기로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집의 이삿날은 같았다. 그의 집은 우리 집 바로 앞이었다. 
관심 없는 낯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바로 앞 집에 살아 안면이 있는 그를 동네 작은 펍에서 만나야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주차 문제로 내가 들이받았기 때문. 사연은 이렇다. 

이사를 한 동네는 신도시의 단독주택 밀집지였는데 여느 택지지구와는 달리 이곳의 단독주택지는 클러스터 개념을 도입해 대략 열 가구 정도가 둘러싼 클러스터 안에 가구당 한 면의 주차구역이 의무 배정이 되어 있다. 집도 모여 있고 주차장도 모여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집들이 보통 크고 두 가구가 사는 집도 많아 자동차가 적어도 두 대 많게는 세 대도 된다는 점. 듀플렉스에 주인 세대와 같이 사는 우리 같은 경우는 세입자임에도 우리가 클러스터에 배정된 주차 면을 쓰기로 했는데 주인 세대는 알아서 한다더니 두 대나 되는 자동차를 집 옆 도로변에 항시 불법 주차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아무튼. 
그런 주차 환경을 가진 동네였는데, 이사 온 첫날, 우리 클러스터는 10개의 주택지 중 4곳에만 주택이 지어졌고 그렇기 때문에 주차 클러스터 10면 중 아무데나 주차해도 되겠거니 하고 아무데나 주차를 했는데 글쎄 앞집에서 차를 빼달라는 게 아닌가. 주차면 2개을 가리키며 황당하게도 둘 다 자기네 주차면이라며. 그래 '세입자'인 우리로서는 이사 온 첫날이기도 하고 앞집 주인이 자기 거라는데 다른 할 말도 딱히 떠오르지 않아 일단 차를 우리 집 근방의 주차면으로 옮겼다. 속으론 투덜투덜하면서. 아마도 그와의 공식적인 첫 대면이 이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은 이후에 벌어졌다. 이사를 하고 새로운 동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거의 일관되게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클러스터 주차면에 (옆집과 사이 좋게 나란히) 주차를 한 반면 앞집 두 대의 자동차 중 한 대는 자기네 소유라는 두 면에 대각선으로 주차를 하고 다른 한 대는 우리 집 앞이자 그의 집 옆인 도로에 주차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구조가 가능한 건 열 개의 주택지가 모인 클러스터에서 구석에 자리 위치한 우리 집 대지가 완전히 앞집에 가리지 않고 일부가 앞집에서 삐져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자기네가 두 면을 이미 클러스터에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 나란히 사이 좋게 두 대를 대면 될 것을 왜 하필 (본인 집 옆이기도 하지만) 남의 집 앞에 대느냔 말이다.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말이다. 
이런 날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는데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앞집을 디스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둥 왜 저러냐는 둥 앞집 사모님이 운전이 서툴다는 둥 따위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시골에서 부모님이 오시고 서울에서 누나네도 내려와서 소위 집들이 비슷한 행사를 했는데, 주말이면 동네 뒷 편에 있는 성당에 사람들이 몰려 동네 빈 공간이 자동차로 꽉 차곤 해서 누나네 차를 마침 비어 있던 우리 집 앞이자 앞집 옆에 주차했다. 그러고선 집에서 저녁도 먹고 술도 한잔 하면서 있는데 매형한테 전화가 걸려와서는 차를 좀 빼달라는 게 아닌가. 
물론 앞집의 그였고 가뜩이나 그간 감정이 별로 안 좋았는데 엄밀히 도로에 주차된 차를 마치 자기 구역이라도 되는 듯 빼달라고 하니 완전히 화가 나서 순순히(?) 차를 빼러 나간 매형을 따라 나가 그의 면상을 보니 더 화가 솟구쳐 대뜸 고함을 쳤다. 
여기가 당신 땅이냐고. 
그럴리가 있나. 용인시에서 포장한 도로구역인데. 
그런데 일단 한눈에 봐도 어려 보이는 내가 다짜고짜 그렇게 쏘아붙이니 그도 화가 났는지 무슨 어린 놈이 어쩌구저쩌구 하길래 나도 내 나름대로 막말을 쏟아내니 그야말로 분위기가 개판이 되어서 가족들이 나와서 다 말리고 작은 난리가 났다. 같은 화를 지니고 있던 아내도 몇몇 말을 쏟았지만 일단 나의 거친 입과 행동이 우람한 체형의 매형에게 손쉽게 제압당하자 나는 거의 순식간에 집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상황은 어떻게 된지 정확히 모르기도 하거니와 기억도 안 난다. 
그랬다. 나와 그의 인연은. 

다음 날, 듀플렉스라 바로 옆에 살고 있는 주인한테 전화가 와서는 사과를 할 거냐 묻기에 내가 왜 하냐고 답하면서도 맥락과 잘잘못을 떠나 내 막말이 마음에 걸렸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며칠 뒤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서 풀자고. 동네 펍에서. 
그렇게 해서 만난 펍에서 그가 건넨 명함에 그려져 있던 두 개의 하트, 즉 더블하트. 첫째 출산을 앞둔 내가 그 하트를 알아보지 못하자 사뭇 당황한 듯한 그가 조금은 의아(한 건지 자존심이 상한 건지는 모르겠으나)한 표정으로 아기 용품 만드는 회사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게다가 그는 대표이사로 돼 있었다. 그렇구나.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그의 사연도 듣게 되었다. 사연인즉, 클러스터 주차면 두 개가 자기네 소유인 건 클러스터에 있는 또 하나의 주택지가 장모의 것이어서 그렇다는 것이고 아내가 운전이 서툴러 가뜩이나 어려운 주차를 두 면에 편하게 하고 자기 자동차는 집에 따로 만든 주차구역에 할 예정이었는데 뒷집(우리 집이다)에서 데크를 높게 설치하는 바람에 주차구역과 너무 붙어 있어 불가피하게 그 옆에(그러니까 우리 집 앞이자 그의 집 옆이자 도로) 주차를 하게 되었다는 것.
그렇구나.
그렇게 우린(?) 화해(?)를 했고 나름의 오해(?)를 풀었고 그는 그 이후에도 그 자리에 계속 주차를 했다(?). 
더블하트의 명성(?)은 그 이후 주변의 육아하는 사람들을 통해 거듭 알게 되었는데 그 당시 아내는 만삭이었고 곧 첫째를 출산했는데 모유가 풍부했고 또 아이가 유축한 모유를 안 먹으려고 해서 젖병을 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자다 깬 둘째 아이에게 '실패가 없다는 국민' 더블하트 젖병으로 200미리를 먹이고 다시 재우고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그야말로 더블하트의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