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8

2016년 겨울의 제주



새벽 다섯 시 반. 잠에서 깼는데 
커튼 너머로 아침의 여명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커튼을 걷고, 거실의 덧창도 활짝 열어젖혔다.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 등 뒤에서 떠오르려는 태양이 하늘은 조금씩 밝게, 
한라산 주위로 이어지는 능선은 더욱 선명하게 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여명이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 
벌써 제주에 닿으려고 하는 항공기들이 드문드문, 여명의 분위기를 더했다. 
아침의 신비로운 여명은 부지런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 
게으른 우리에겐 행운이었다. 




모슬포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쾌한 날씨와 넉넉한 햇빛에 비친 제주의 모습이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게 하지 않아
일단 송악산 둘레를 산책하기로 하고 해변을 따라 차를 몰았다. 
내내 시선에 잡히는 송악산과 한라산, 그리고
푸른 하늘은 매순간 가슴을 벅차게 했다. 
하지만 송악산으로 믿고 있던 산은 알고 보니 산방산이었다. 




비양도에 그 무엇이 시선을 끄는 경우는 드물었다. 


+

보말죽 한 그릇을 먹고, 비양도 섬 한 바퀴 산책을 했다. 
제 머리를 드러내지 않은 한라산은 신비로워 보였고, 
수평선과 높이를 같이 하는 해안가에서 시나브로 오르기 시작해
중산간을 지나 여럿 오름을 거쳐 한라봉에 이르기까지의 아름다운 모습은
왜 제주섬 전체를 한라산이라 해도 무방한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몸은 비양도에 있었지만 시선은 제주본섬에 머무르며 산책을 이어갔다. 
과연 그런 걸까, 
사람도 한 발 물러서서 보았을 때 좀 더 잘 볼 수 있게 되는 걸까?


윌리엄 트래버, <여름의 끝>

마을 사람들은 라스모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 마을을 뜨는 쪽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더블린이나 코크나 리머릭으로, 잉글랜드로, 어떤 이들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수가 되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 또한 과장이었다. 
윌리엄 트래버, <여름의 끝>, 민은영 옮김, 한겨례출판, 2016

트래버의 소설은 처음이다. 트래버도 처음이다. 이로써 아일랜드 작가 한 명을 더 알게 되었다.
<여름의 끝>은 짧고 차분한 소설이다. 평온한 주말, 오후의 볕을 따사로이 받으며 읽었으면 단숨에 읽을 법도 했을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기에 '불완전한 환경'에서 독서를 이어가다 보니 오래 걸렸다.
소설의 배경은 아일랜드 라스모이. 소설의 차분함은 배경에서 기인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말하는 건 왠지 피상적이다. 엘리의 사랑은 코널티의 아픔으로 연결되고, 아픔이란 궤도에는 딜러핸도 올라 있다. 엘리의 사랑은 플로리언의 사랑과 어긋나 있되 그 어긋남은 미련일 수 있고, 그렇기에 결국 소설의 제목인 끝은 뭉퉁하다.
소설의 분위기란, 그래서 배경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비쳐 나온다. 읽는 동안 나는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할 때가 있었다. 왜? 지금 내가 머무르는 곳의 계절이 소설의 계절과, 소설의 이야기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의 매서운 추위가 이야기를 더욱 오롯하게 하는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은근함을 좋아하는 내게 이 소설은 작가만큼이나 반가워야 할 터이나, 계절을 조금만 당겨놓았으면, 하는 생각에 책장을 덮고도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조금 더 은근함을 남겨두고 싶어진다.

2016/11/09

서울은 내게 친숙한 도시다.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서울에 살았고, 사는 동안 서울의 많은 곳을 좋아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야말로 내겐 서울의 이미지요, 서울의 목소리다. 하지만 지금, 올림픽대로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의 서울에 대한 친숙함이 이제는 그리움 또는 애정 가득한 편안함으로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물론 지긋지긋한 서울의 복잡함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교통 정체로 대변되지만, 더 이상 서울에서 일상을 영위하지 않게 된 지금은 이마저도 서울이지 -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서울이 내 안에서 두 번째 고향 같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면, 용인, 아니 그보다는 수원이 삶터이자 일터로서 그동안 서울이 맡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수원이 아닌 이곳 서울에서 실감한다. 이제 나는 수원에 산다.


여의도 다녀오는 길에

2016/11/05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그 꽃 말이에요 /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 떨어지는 꽃송이가 /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 못 떠나실 거예요 /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동백나무의 꽃이 지는 모습은 보는 이들 누구에게나 선연하게 가슴에 남는다. 꽃잎 하나 상하지 않은 그 붉은 꽃 덩어리가 그대로 툭툭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모습을 두고 가장 극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제주도나 이웃 일본에서는 이를 불길하게 여기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꽃이 떨어지는 모습이 목이 잘려 사형을 당하는 불길한 인상을 주며 또 이 나무를 심으면 집에 도둑이 든다 하여 꺼리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싱싱하던 이 꽃이 갑자기 떨어지는 것을 연상하여 갑자기 생기는 불행한 일은 춘사(椿事)라고 한다. '춘椿'은 동백나무를 가리킨다. 
이유미, <우리 나무 백가지> 41쪽, 현암사(개정증보판) 

천천히, 하루에 한두 나무 정도씩 읽고 있다. 나무들의 사연이 어찌나 흥미로운지!

몸의 반응에 순응하며 사는 것, 서른 중반을 지나 그것을 실감하며 그럴 때마다 나의 의지 없음을 탓하는 통시에 다니엘 페낙의 훌륭한 소설 <몸의 일기>(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를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렇게 진솔하게, 내가 내 몸을 느끼듯 쓸 수 있다면. 쓰기의 진실이란 사실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온몸이 반응하는 그대로 써내려 가는 그것, 말이다.

몸이 역사다. 역사는 흘러온 것이 아니다. 문제제기 될 뿐이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침략에서 돌아올 때 사랑하는 조제핀에게 편지를 보낸다. "곧 도착할 테니 씻지 말고 기다리시오." 냄새를 제칠 만큼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원래 후각은 근대에 와서 가장 억압당한 감각이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목욕, 위생, 소독이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정희진의 어떤 메모, 한겨레신문

내일은 오랜만에 '광장'에 가야겠다.

2016/10/08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돌려 말하지 마라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이 세월호다
자본과 권력은 이미 우리들의 모든 삶에서
평형수를 덜어냈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덜어내고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성을 주입했다
그렇게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노동자 세월호에 태워진 이들이 900만 명이다
사회의 모든 곳에서
'안전'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어야 할 곳들을 덜어내고
그곳에 '무한 이윤'이라는 탐욕을 채워 넣었다
이런 자본의 재해 속에서
오늘도 하루 일곱 명씩 산재라는 이름으로
착실히 침몰하고 있다
생계 비관이라는 이름으로
그간 수많은 노동자 민중들이 알아서 좌초해가야 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이들이 지하 선실에 가두어진
이 참혹한 세월의 너른 갑판 위에서
자본만이 무한히 안전하고 배부른 세상이었다
그들의 안전만을 위한 구조 변경은
언제나 법으로 보장되었다
무한한 자본의 안전을 위해
정리해고 비정규직화가 법제화되었다
돈이 되지 않는 모든 안전의 업무가
평화의 업무가 평등의 업무가 외주화되었다
경영상의 위기 시 선장인 자본가들의 탈출은 언제나 합법이었고
함께 살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구조 신호를 외면당했고
불법으로 매도되고 탄압당했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자본의 이동은 언제나 자유로운 합법이었고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만 전가되었다
그런 자본의 무한한 축적을 위해
세상 전체가 기울고 있고 침몰해가고 있다
그 잔혹한 생존의 난바다 속에서
사람들의 생목숨이 수장당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돌려 말하지 마라
이 구조 전체가 단죄받아야 한다
사회 전체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이 처참한 세월호에서 다시 그들만 탈출하려는
이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위험한 세월호의
선장으로 기관장으로 갑판원으로 조타수로 나서야 한다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평형수로 에어포켓으로
다이빙벨로 긴급히 나서야 한다
이 세월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이 자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송경동

2016/10/07

Waltz for Debby


2016년 6월 14일 저녁
분만실에서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들었던 음악은 빌 에반스 트리오의 <Waltz for Debby>였다.
그리고 오늘, 씨디를 샀는데, 나중에 아이가 크면, 그래서 혼자서도 음악을 즐기며 들을 나이가 되면, 선물해 주고 싶다.

그날 지속된 이 그룹의 상상력의 열매는 이 음악을 반복적으로 듣게끔 만들었으며, 감상자의 정신적, 정서적 지구력을 계속 환기시켜 주었다. 각각의 작품들은 마술 세계의 결정체를 확보하고 있었다. 1970년대 에반스 트리오에서 잠깐 드럼을 연주했던 빌 굿윈이 말했듯이. "빌, 스콧 그리고 폴 모티안이 함께 하면 그들은 무얼 할 것인가를 미리 알고 있는 듯했으며, 즉석에서 만들어진 사운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즉각적인 신뢰감이었다." 이 유산은 빌 에반스 최고의 시절로 불리고 있으며,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풍성한 녹음 속으로 빠져들 때 우리는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정점과 에반스가 평생을 통해 추구했던 성과에 대한 하나의 매개체를 목격하게 된다. 느낌의 깊이, 그룹 내부의 친밀감, 그리고 부드러운 촉감의 미적인 개념에 있어서 이 녹음들은 견줄 수 없는 영원함을 지닐 것이다. 
열흘 뒤 늦은 밤, 스콧 라파로는 뉴욕 주 북부에 위치해 있는 그의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 제네바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20번 국도에서 동쪽으로 향한 한 시골길에서 그는 나무와 충돌했고,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에반스와 모티안은 모두 그 소식에 넋을 잃었다. 이는 라파로라는 한 개인의 상실일 뿐만 아니라 베이스 주자를 분신으로 여겼던 에반스의 이상적인 삼두체제의 종말이었다. 그 충격으로 에반스 그룹의 창의성이 일으켰던 불꽃은 무참히 꺼졌으며, 이 베이스 주자의 죽음은 에반스 자신 속에서도 그 무언가를 살해했다.
"사람들이 재즈를 지적인 이론으로 분석하려고 할 때 난 당혹스럽다. 그건 아니다. 재즈는 느낌이다."
"원칙과 자유는 섬세하고 창조적으로 섞여야 하며 정말로 훌륭한 결과를 낳아야 한다. 난 모든 음악이 낭만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인 감상주의에 빠지면 낭만성은 방해받게 된다. 반면에 원칙에 의해 운용되는 낭만성은 가장 아름다운 미적 대상이다. 이러한 조화가 이 특별한 트리오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난 생각한다."

피터 페팅거, <빌 에반스, 재즈의 초상> p.201-202, p.204, 황덕호 옮김, 을유문화사   
 
못 말리는 습성대로, 빌 에반스를 '읽는다.'

2016/10/04

스코트가 자주 사용한 좋은 말이 있어요. "당신이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친절하라."예요. 그 말은 살아가는 원칙으로 삼기에 괜찮은 말이지요. 올더스 헉슬러는 육십인가 칠십이 넘어서 그의 모든 공부와 작품과 연구를 모두 무색케 하는,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조금 더 친절해지는 것임을 깨닫고서 느낀 당황에 대해서 썼어요. 버트란드 러셀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도 그 말을 하기를 난처해 했지요. 사랑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기초라고-. 한 사람이 숲속에서 농부로 살면서 전혀 세상에 나가지 않았어도 친절과 단순함의 삶을 살았다면 공헌을 한 거예요. 세상을 더 나쁜 장소로 만든 게 아니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한 거지요. 
스코트의 백 번째 생일에 이웃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조그만 행렬을 이루고 왔어요. 그 깃발 중의 하나에 이렇게 씌어 있었어요.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되었다."

헬렌 니어링, '아흔 살의 관점', <녹색평론선집 2> 415-416쪽, 녹색평론사 

2016/10/03

예전에 비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우리가 살고 있는 방은 무척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그 집과 방이 계속 좁다고 느껴지고, 계속 좀 더 늘리길 원합니다. 사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고 다니는 여러 가지 짐들이 늘어난 때문입니다. 침대, 책상, 소파 등등 비대해진 가구들과 가전제품들, 평생 안고 다니는 여러 가지 집에 대한 공연한 강박들이 우리의 집을 키우고 더불어 우리의 근심도 키워낸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강박 속에서 살아왔던가요. 사회 속에서, 관계 속에서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약간의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 강박들 때문에 우리는 결국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걷고, 뛰고, 자고, 생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집에 대해서는, 일정한 나이에 일정한 크기의 일정한 형식의 집에 살아야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삶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그런 강박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혹은 자신만의 공간으로서 작은 집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의식의 전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작은 집이란 단순히 규모가 작은 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이며, 자기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더욱 깊이 배어 있습니다.
집을 통해 자기가 완성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몸을 스스로 거울에 비쳐보지 않은 채, 남들이 나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로, 혹은 남들의 몸을 보고 자신의 몸으로 착각하여 지은 집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야말로, 나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임형남+노은주, <사람을 살리는 집> 75-76쪽, 예담  
 

2016/10/02

왜 뇌가 피로해지는 것일까? 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뇌의 구피질과 신피질의 알력과 갈등이 주원인이다. 인간의 뇌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뇌간이다. 뇌간은 호흡, 심장 박동, 혈압 조절, 체온 조절 등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2층은 대뇌변연계로 감정을 다스리고, 식욕, 성욕 등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본능을 주관한다. 기억도 변연계에 있는 해마의 역할이다. 맨 위 3층은 대뇌신피질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감정과 충동을 조절한다.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뇌로, 이것이 있어 인간이 고도의 정신 기능과 창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뇌의 피로를 이해하려면 뇌를 3층 구조가 아닌 3층의 신피질, 2층의 변연계와 1층의 뇌간을 합친 구피질로 구분하는 것이 편하다. 신피질이 지적 중추로 의지, 의욕, 판단을 담당하는 '인간의 뇌'라면 구피질은 생명 중추로 감정과 본능을 주관하는 '동물 뇌'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인간 뇌와 동물 뇌는 서로 협조하기도 하지만 서로 반발하는 경우도 많다. 아침에 구피질은 "조금만 더 자자."고 유혹하는 반면 신피질은 "안 돼.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이야."라며 맞선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나 질책을 받으면 구피질은 "당장 사표를 던져. 일할 데가 여기뿐이야."라며 화를 내지만 신피질은 감정을 추스르고 계속 회사에서 일하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현대인은 끊임없이 구피질의 유혹을 신피질의 이성으로 제어하면서 산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너무 피로해 쉬자는 구피질의 당연한 요구를 무시할 때도 많다. 평소에는 신피질이 구피질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신피질과 구피질의 충돌로 뇌에 피로가 쌓이고 쌓여 그로기 상태가 되면 구피질은 더 이상 신피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구피질의 역할은 생명을 지키는 것이어서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신피질이 아무리 사정을 해도 듣지 않는다.

이시형.김준성, <의사가 권하고 건축가가 짓다> 60-61쪽, 한빛라이프

2016/09/29

루이스 칸

"저는 이렇게 믿어요. 한 인간이 지니는 가장 커다란 가치란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줄 아는 데 있다고 말이지요. 제가 해 온 방법은 정말로 저만의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제 것을 흉내를 낸다면 여러분은 몇 번이고 수없이 죽는 짓을 하는 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내가 내 자신을 흉내를 내 봐야 별로 잘 될 것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가 하는 일이라는 게 정말 완전하지 못한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정말 소중합니다.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닌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만 속하지 않은 이것이 우리가 만든 작품 중에서 더욱 좋은 부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만 속하지 않은 이것은 누구나 쓸 수 있는 보물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보물을 생각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저 그 보물을 생각한 것뿐입니다. 여러분이 어쩌면 그 사람일지 모르겠군요. 왜냐하면 그 보물을 정말 모든 사람에게 속한 보편적인 공동성의 한 부분이니까요."
김광현, <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52쪽, 공간서가 
 
본래 두 개의 연구동 사이에 있는 이 중정은 연구자들이 휴식하고 산보하는 장으로 나무를 심고 그 나무 밑에서 조용히 묵상도 할 수 있는 정원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 광장에는 아무 것도 두지 않고 '하늘을 향한 파사드'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멕시코의 건축가인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án의 조언을 받아들여 트레버틴을 깐 광장으로 바꾸었다. 칸은 이런 변경안에 매우 만족하였으며, 또 건축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조형에 크게 감탄하고 있다. 그런데 칸을 돕던 구조기술자 어거스트 코멘던트August Komendant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나는 몇 사람의 과학자에게 이 변경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들은 모두 돌로 된 광장보다는 정원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주변에 메마른 땅이 펼쳐져 있으니 아름다운 정원이야말로 이 장소에 어울린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언젠가 이곳이 정원으로 바뀌게 되기를 기대한다." 
같은 책 95-96쪽  

© 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

2016/09/27

ㄷ벤치

꼬박 반 년을 다닌 오밀목공방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건 연귀짜임을 이용한 벤치였다.
만든 과정은 이랬다.
우선 만들고 싶은 형태와 개략적인 크기를 떠올리고, 스케치업으로 정확한 사이즈를 잡아 디자인을 완성한다. 그런 다음 필요한 목재의 사이즈를 확인할 수 있게 집성을 하게 될 개별 목재들을 별도 분리시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페이지에 담아 인쇄를 한다.
이런 식이다.

스케치업으로 완성한 도면

1주차
그걸 들고 공방에 가니, 선생님께서 도면을 보더니 기다란 제재목 세 개와 다소 짧은 제재목 하나를 내준다. 그리곤 말한다. 어떻게 재단할지 생각해 보세요.
그래 한참을 제재목을 보며 머릴 굴린다. 이건 이렇게 잘라 상판으로 하고, 저건 저렇게 잘라 다리로 한 다음....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렇게 다 목재를 해체시키면 연귀짜임 벤치의 멋인 결을 살릴 수가 없다.
그 얘길 선생님께 했더니 '그 말'을 기다렸다며, 숙련되지 않은 사람이 하기엔 목재 다루기가 쉽지 않겠지만 결을 살리겠다면 한 번 해 보라고 했다. 하긴 기껏해야 500 정도 길이의 목재만 대패로 다루다가 이번엔 한 번에 2000이 넘는 목재를 기계로 다뤄야 하니, 만만하진 않겠지. 하지만 작업의 방향이 서니 이번엔 전체적인 윤곽이 먼저 머릿속으로 달려들었다.
먼저 결을 살리며 원하는 너비를 얻기 위해 제재목 세 개는 그대로 집성해야 하고, 추가로 주어진 하나의 목재는 상판의 하중을 지지하기 위한 보로 쓴다. 그리고 기왕 결을 살리기로 한 거, 완성 되었을 때 보다 나은 무늬를 얻기 위해 작업대 위에 제재목 세 개를 올려놓고 요리조리 위치를 바꿔가며 고민을 이어간다. 이 과정이, 어떻게 집성을 할지, 각각의 제재목이 놓이는 위치를 얻기 위한 선택의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최선의 답은 각자의 취향이기에, 온전히 내가 선택하기 나름이지만.
결정을 하고! 설계한 두께로 만들기 위해 먼저 수압대패로 한쪽 면을 잡는다. 작업은 일단 단순해서, 제재목 세 개의 작업은 동일하다. 하지만 2미터가 넘는 목재를 수압대패로 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목재가 휘어있어, 약간의 요령이 없으면 굉장히 더딘 작업이 될 수도 있다.

2주차 
이번엔 자동대패로 반대쪽 면을 잡을 차례. 역시 목재의 길이가 작업에 장애요소였다. 수치를 잡아가며, 세 개의 제재목을 번갈아 자동대패에 밀어넣으면, 반대편에서 선생님이 목재를 잡아두는 식이다. 이 작업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
두께가 잡힌 제재목 세 개를 집성하기 위해 수압대패로 집성될 면도 같이 잡게 되는데, 막상 대패 작업을 하고 작업대에 제재목을 놓고 집성할 면을 맞대 보니, 아뿔싸 틈이 생긴다. 그래 다시 수압대패로 면을 잡는데, 해도 해도 잡히지 않는다.

3주차
어떻게든 오늘은 면을 잡고 집성을 합시다, 라고 선생님은 작업 시작 전에 내게 말했지만, 여전히 면은 잡히지 않고, 틈이 벌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한다. 여러 갈래로 원인을 추측하고 방식을 바꿔 면을 잡아보지만, 여전히 잡히지 않는다. 결국 보다 못한 선생님이 팔을 걷어붙이고 대패 작업을 조금 하더니, 이 정도면 되겠다 한다. 그래 드디어 집성.
비스킷 끼울 위치를 표시하고, 홈을 만든다음 본드를 바르고 집성. 클램프로 잡아둔 다음, 남은 제재목 하나로 보 작업을 하려는 내게 선생님은 보 작업은 급하지 않으니 장부를 딸 지그를 만들라 하신다. 그러니까 보가 다리와 만날 지점에 암장부를 만들기 위한 틀을 짜두잔 얘기다. 작업은 어렵지 않다. 장부 작업을 하게 될 트리머가 다닐 길을 만드는 게 목적인데, 합판을 직각을 유지한 채 트리머 날 두께를 고려한 암장부의 크기로 틀을 만들면 된다. 날 두께는 한쪽이 2밀리이니, 직사각형의 암장부 크기가 지그에서는 가로 세로 4밀리씩 크게 된다.

4주차 
지난 주에 집성해둔 목재는 클램프를 제거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집성된 목재 간 단차가 제법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비스킷을 똑같은 깊이에 심었으니 단차는 없어야 하는데, 대패 작업의 오류의 결과인지, 유독 단차가 심한 부분이 있었다. 이걸 잡아야 했다. 노출되는 면은 마지막에 하면 되니, 결과물에서는 잘 보이지 않게 될 안쪽 면의 단차를 대팻날과 샌딩기로 꽤 오랜 시간 동안 잡아나갔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더디기도 하고, 공을 들인 만큼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작업이기도 했다. 여전히 집성된 목재는 2미터가 넘었고, 어라, 너비는 집성하기 전 반복된 수압대패 작업 때문인지 양 끝단의 길이가 달랐다.
단차를 얼추 잡고는, 슬라이딩 테이블쏘의 톱날을 45도로 기울인 다음 목재를 삼등분했다.

5주차 
과정 하나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이제는 좀 더 디테일한 작업으로 들어간다. 우선 이미 만들어둔 지그를 이용해 양쪽 다리가 될 부분에 위치를 잡고 트리머로 암장부를 따냈다. 암장부 위치에 오차가 있으면 상판의 하중을 지지해야 할 보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될 수도 있기에, 위치를 거듭 확인한 뒤 작업 완료. 그러고는 수압, 자동대패로 보의 두께를 잡고, 숫장부 길이를 고려해 테이블쏘로 재단한 뒤 테이블쏘의 톱날 높이를 조정한 다음 숫장부를 땄다. 따는 중간 중간 암장부와 맞춰보며 오차를 줄이는 과정이 수반되었다.

6주차 
지그 크기에 약간의 오차가 있어 장부의 수치를 수정해야 했다. 숫장부의 길이도 잡고, 두께도 조금 더 다듬은 다음 암장부와 잘 맞는지 체크했다. 그러고 나서 전체적으로 잘 맞는지 보기 위해 비스킷으로 연결 부위 작업을 한 후 가집성을 했다. 대체로 잘 맞았다.
트리머 작업이 하나 더 남았다. 다리 하단부. 처음에 설계를 할 땐 생각하지 못했다가 공방에 있는 벤치를 보고 설계에 반영한 건데, 소위 꽉막힌 ㄷ벤치의 답답함을 줄일 수 있는 요소였다. 다리 폭 양쪽 90밀리 안쪽으로, 15밀리 정도의 깊이로 다리 하단부를 따내기 위해 간단한 지그를 만든 다음 라우터로 따냈다. 그런데 라우터는 트리머보다 두꺼운 날 두께가 말해주듯, 밀 때 드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거의 몸으로 밀 듯 해야 했는데, 그래도 나가는 속도가 더뎌 잘린 면이 검게 타버렸다. 잘 보이지 않는 면이라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7주차 
이제 작업이 막바지다. 최종 집성을 하기 전, 보를 비롯해 집성을 하면 작업이 어려울 안쪽 면을 샌딩기로 거듭 마감을 했다. 처음엔 120방으로, 그 다음엔 320방으로. 약간 신경 쓰이는 단차는 대팻날로 조금 더 잡으려 했으나 작업이 막바지라는 점, 어차피 안쪽 면이라는 점이 완성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했다.
드디어 집성이다. 긴장 또 긴장. 장부 작업을 할 때 마무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보의 숫장부 양쪽 길이에 조금 차이가 생겼는데, 그래서 장부의 위치가 바뀌면 곤란했다. 그래 표시를 한다고 보에는 분필로, 암장부 쪽에는 샤프로 번호를 매겨놨는데, 이런, 막상 하얀색 목공 본드를 바르니 보에 있는 분필 표시가 확인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나는 몹시 당황했고, 집성을 도운 선생님은 손으로 본드 자국을 밀어내 보았지만 그래도 표시가 보이지 않자 맞춰 보자며 보를 암장부 양쪽 직접 끼워보며 결국 위치를 찾아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미 본드가 마르고 있었다. 서둘러 집성을 해야 했다. 먼저 다리와 보의 장부를 잡고, 완전히 결합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상판을 맞췄다. 모든 결합부가 맞는 것을 확인한 뒤 미리 준비해둔 클램프로 가로, 세로, 높이를 잡아가며 조이기 시작했다. 연귀는 클램프 작업이 중요하다고, 선생님께서 누누이 강조하던 그 작업이었다. 긴장도 되고, 어쩔 줄 몰라하는 내가 우왕좌왕 하는 사이, 선생님은 신속하게 위치를 잡아가며 내게 보조 작업을 지시했다. 선생님이 클램프의 한쪽을 잡으면 내가 반대편을 맞춰 잡는 식이었다. 가장 중요한 연귀 부분을 다 잡고 보니, 보가 상판과 2~3밀리 정도는 떠 있었다. 클램프 하나가 추가로 동원되었다. 상판 가운데를 가로질러, 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집성 작업이 끝났다. 아니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집성 부위 바깥으로 밀려난 본드를 제거하는 일. 이걸 제거하지 않으면 나중에 마감 작업을 할 때 그 부위는 오일이 먹히질 않아 표가 난다.

8주차 
두 달에 걸친 작업의 마지막 날. 공방에 도착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사실 지난 주 집성을 했을 때 내심 연귀 짜임 부분의 틈이 생긴 게 제법 신경이 쓰였었는데, 웬걸 클램프가 제거된 나의 벤치는 생각보다(?) 아니 꽤나 잘 집성이 되어 있었다. 연귀 부분도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고, 마지막에 추가로 댄 클램프 덕분에 보도 상판에 잘 붙어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마감 작업을 위해 먼저 대팻날을 꺼내들어야 했다. 노출되고 직접적으로 신체와 닿는 상판의 남은 단차를 없어야 했기 때문에. 그래 대팻날로 단차 부위를 긁어내며 거듭 손으로 단차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오랜 작업 시간 동안 목재가 변형된 부분도 감안해야 했다. 600짜리 철자를 상판에 얹어보니, 예상은 했지만 상판은 이미 완전한 평면이 아니었다. 하지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도는 물론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좀 더 대패 작업을 한 뒤, 샌딩기로 120방, 320방 사포를 연이어 사용하며 마감 작업을 했다.
콤프레셔로 찌꺼기를 제거한 뒤 두 번의 오일 작업. 드디어 끝났다.

오일이 마르기 전 차에 실어 집에 가져오자마자 마른 헝겁으로 표면에 남은 거친 오일 자국을 닦아냈다. 그리고 벤치가 사용될 2층 서재로 옮겨 남은 오일을 말렸다.

서재에 놓인 ㄷ벤치

결이 무너지지 않게 하고 싶었다

안쪽은 새까맣게 타버린 하단부

고르고 고른 결의 배치

상판 밑엔 보가 있다


2016/09/21

열병을 털어내고 찾아온, 
온이의 백일 



오랜만에 생두를 샀다. 그리고 로스팅. 예가체프 110그램 정도.
반 노동에 가까운 직화 로스팅엔 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생두마다 팝핑의 정도나 시기가 어쩜 그렇게 다른지.
그리고 이론상으로 불리는 1차 팝핑이니, 2차 팝핑은 실제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팔을 휘젓다 보면 감각이 무뎌지고 얼른 커피가 볶였으면 하는 마음에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조금 차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1차 팝핑이 따가울 정도로 쏘는 소리가 드문드문 간헐적으로 난다면,
2차 팝핑은 이제는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정신없이 발사되듯 터지는 소리가 난다.

바야흐로 따뜻한 커피의 계절이 돌아왔다.

2016/09/03

언니네 이발관이 새 앨범 녹음에 들어갔다.
5집 '가장 보통의 존재'이후 얼마 만인지. 그 동안 이석원은 세 권의 책을 냈다.
이석원이 매번 마지막 앨범이라고 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의 신보를 접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새 앨범을 기다린다.



이날, 제주 중산간에서 울려 퍼지던 소리는 어찌나 맑고 선선했던지.  

2016/08/28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

파울 클레 :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수묵담채화, 1920)


며칠 전 전화를 걸어온 아버지가 보내달라는 책, 이안 부루마가 쓴 <0년 : 현대의 탄생, 1945년>(신보영 옮김, 글항아리)이 재밌을 것 같아 도서관에 가서 빌려왔다. 아침을 먹고 데크에서 커피를 마시며 조금 읽으려고 폈는데 서두에 쓰인 벤야민의 글에 그만 관심을 빼앗기고 말았다. 역사철학테제의 글 가운데 하나로, 전에도 읽은 바 있는 글이지만 이 글은 파울 클레의 그림을 묘사하는 글이기도 해서, 베를린에서 사온 도록까지 꺼내 클레의 그림도 다시 보고, 벤야민의 글도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흐린 주말의 오전이다.


파울 클레(Paul Klee)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339쪽, 최성만 옮김, '발터 벤야민 선집 5', 도서출판 길 

2016/08/21

diver's heaven

우리가 이곳에 도착을 했을 때 시간은 아직 낮이 되기 전이었다. 아주 엷은 비가 시나브로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대장님이 컨펌해준 예약은 확인하지 못하고 별도로 방을 구해야 했다. 그래서 106호. 완전한 서향에 발코니로 나가 서너 번 넘어지면 곧장 미지근한 바다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 잠을 잤고 부러 깨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번 여행의 가장 온전한 목적이기에. 물론 조금의 아쉬움은 있다. 이름하야 장소성을 띈 그것은 바로 다이빙에 관한 것인데, 이곳 차량들 번호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Diver's Heaven 



다이버들의 천국이 된 축 라군(Chuuk Lagoon) 일대는 그 자체로 슬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기록된 역사 이래,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도 모자라 전쟁에 동원되고, 땅과 바다를 고스란히 내주어야 했기에. 말이 없는 투명하고 푸른 바다는 더없이 찬란하기에 찬란한 슬픔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지배의 역사 막바지에 그야말로 전장이 된 축 라군에는 여전히, 당연하게도 태평양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상흔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마이크로네시아에 명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여행지로 마이크로네시아를 택하고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지인들마다 - 물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것일 테지만 -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나, 하고 물으면 마이크로네시아란 답에 그곳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또 설명이 이어져야 한다. 왜 그곳을 택했는지, 그곳엔 뭐가 있는지 등등. 
그 중에 마이크로네시아를 인지하고 있거나, 혹 가길 희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다이버였으니, 마이크로네시아야말로 Diver's Heaven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해야 할지, 나로선 난감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축 라군의 곳곳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 침몰하거나 곤두박질친 군함과 군항기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바다 생물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녹슬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곳을 헤엄쳐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다이버들이 있기에 그곳이 Diver's Heaven이라고 스스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고. 

micronesia

구글어스에서도 한참을 끌어당겨야 겨우 눈에 띄는 작은 섬들의 집합, 마이크로네시아는 그 이름이 넌지시 암시하듯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연방이다. 지금의 연방에는 얍Yab, 축Chuuk, 폰베이Phonpei, 코스레Kosrae 네 개의 주가 있다. 주도는 폰베이.
현재 남아 있는 기록된 역사는 마이크로네시아에 최초로 방문(1521년)한 유럽인 항해자 마젤란에 대한 것과 1986년 미국의 신탁통치로부터 완전한 독립국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기를 제외하면, 모두 외부에 의한 지배로 점철되어 있다.
마이크로네시아의 섬들을 지배했던 나라는 스페인, 독일, 일본, 미국이었다.
대부분의 스페인의 식민지들처럼 일찍이 스페인령이 되었던 마이크로네시아는 쿠바 독립전쟁에 개입한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후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괌, 필리핀, 푸에르토리코가 미국으로 넘어간 것과는 달리 어정쩡하게 스페인에게 남았다가 독일에게 넘겨지게 된다. 스페인이 독일에 연방을 팔아넘긴 것이다. 1899년의 일.
그랬던 마이크로네시아의 주인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세계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일본이 등장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1902년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하는데 이는 영국과 일본이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고 동아시아에서의 양국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었다. 이 동맹을 계기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일본은 중국의 '칭다오 전투'에서 영국군과 연합해 독일군을 무찌르고 중국 산동성에 있던 독일인들을 붙잡았다. 그 후 일본 해군함대는 당시 독일이 보유하고 있던 동아시아의 함대를 공격하고, 태평양 및 인도양에서의 연합군 측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1914년 10월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팔라우 등 마이크로네시아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1930년대 일본 해군은 본격적으로 '남양군도'에 비행장, 방호시설, 항구 및 기타 군사시설 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이 섬들을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 부르며, 일본 본토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했다. 이 시기에 일본이 구축한 여러 시설은 태평양 전쟁 시 일본 공군과 해군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권문상.이미진.강대훈, <마이크로네시아 연방국> 38쪽,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그렇게 일본의 전략적 요충지로써 그 몫을 톡톡히 하던 마이크로네시아는 결국 미국과 일본의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 우리 나라가 해방 후 그랬던 것처럼 - 미국의 신탁통치령이 된다. 우리 나라와 다른 점은 그 기간이 길었다는 것뿐.

2016/08/10

웨노의 추억

창간호부터 한 호도 빼놓지 않고 보고 있는 잡지가 있다.

I'm in island now!!
real JEJU iiin 

저녁을 먹는 식탁에서 잡지를 보던 無가 어떤 페이지를 슬쩍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엔 한눈에 보아도 어딘지 알 법한 장소가 투명하게 실려있었다.




마이크로네시아 축(Micronesia Chuuk Lagoon)이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한 남자에게 예기치 않게 '사건'이 찾아왔다. 1990년대 즈음, 우리 나라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상은 돈이면 다 되는, 그것이 전부인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런 세상이 싫었던 남자는 갑자기 태평양 위의 외딴섬으로 도망쳤다. 이름마저 생소한 '추크 섬'이 그가 떠나온 곳이었다. 무척 낯선 곳이었고, 어쩌면 그래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단지 현실에서 도망쳐 나올, 그 현실과는 몹시 다른 먼 곳이 필요했다. 단순한 도피처에 불과했던 추크 섬에서의 생활은 올해로 벌써 20년을 채웠다. 괌을 통해서만 당도할 수 있는 오지의 섬, 추크는 이제 그의 삶 전부가 되었다. 원주민을 만나 결혼도 하였고, 아이를 둔 어엿한 가장도 되었다. 섬의 일상은 여느 곳과 다르지 않다. 아침이면 출근할 채비를 하고, 퇴근을 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오후 4시 즈음이면 일과를 마친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공허한 시간이 일찍 시작된다. 전지 시설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아서 밤이 찾아오면, 칠흑 같은 어둠을 깨뜨릴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다. 그저 해와 달이 이끄는 자연의 시간에 몸을 맡긴다. 캄캄하고 조용한 밤마다 그의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생각의 꼬리잡기는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했고, 책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iiin 2016, Summer>,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잡지에 실린 인터뷰의 주인공이 이병률과 김훈의 제안으로 쓰게 되었다는 책의 제목이다.

글을 읽으며 놀란 동시에 어렴풋하게 드는 짐작(?)이 있었다.

혹시 웨노에서 우릴 픽업하고 안내해 주셨던 그분이 아닐까? 

오늘 아침에는 無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인간극장에 그가 나온다고. 無는 그분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래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서재에 올라와 본격적으로 기억과 기록을 뒤졌다.

웨노에 가기 전, 결국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닿은 현지 연구소 대장님께서 우리가 블루라군에 묵고 있을 때 메시지를 보내 오사쿠라섬에서의 바비큐 파티에 초대를 해 주셨는데 그때 메시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토요일 8시경 블루라군 로비 입구에 기다리시면 직원 xxx선생이 픽업할 것입니다. 

웨노섬에 가기 위하여

몇 해 전, 트위터에서 이병률 시인이 소설가 김훈과 이름도 생소한 '축'이라는 섬에 간다고 남긴 짧은 문장을 보았다. 아니 이건 또 뭐야. 궁금증이 동했다. 그래 구글링을 해보았지만 찾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내 궁금증도 금세 동나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시인과 소설가가 떠났던 이야기는 중앙일보에 기사로 실렸다. 

결혼을 결심하고 여행지의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그때였다, 나의 궁금증이 동나지 않았음을 알았던 건. 無가 전적으로 동의해 주었기에 무리없이 마이크로네시아행을 결정할 수 있었지만, 그리고 항공권도 예매를 했건만, 정보가 없었다, 어디에도. 간혹 괌을 통해 마이크로네시아에 다녀온 포스팅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주로 주도인 폰베이나 얍에 대한 거였다. 하지만 우리는 축주에 있는 웨노섬에 가기로 한 게 아닌가. 반복되는 구글링 끝에 어렵게 찾은 정보는 약간 희망적이었다. 웨노섬에 정부 연구기관이 있다는 정보였기에. 여행 일주일 전이었다.

한국해양연구원 부설연구소가 웨노섬에 있다는 걸 알고, 해양연구원에 전화를 걸었다. 조심스럽게 사정을 얘기하고 지역 정보를 좀 얻을 수 있는지 문의를 했더니 상대편에서는 약간의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어려운 선택을 하셨네요."

그 분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최근에 큰 태풍을 겪은 후라 섬 전체가 아수라장이고 여전히 복구 중이지만 속도가 느리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도 아직 많다... 등등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여행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간단한 지역 정보를 메일로 받고 현장에 상주하신다는 연구소 대장님의 메일주소를 알아냈다. 그리고 당장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해양기술원 xxx선생님 통해서 연락처를 받고 메일 드립니다. 
저는 다음 주말에 결혼식을 앞두고 있고, 
축으로의 신혼여행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없어서 
해양기술원에 전화를 했다가 xxx선생님께 이런저런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3월 말에 태풍 때문에 현지 피해가 크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그게 어느 정도인지? 
여행을 가도 무리가 없는지?
현재 현지 상황은 어떤지 등에 대해 궁금해서 여쭙고자 메일을 드립니다. 
숙소는 블루라곤에 묵을 예정인데, 사이트를 통해서 예약 요청을 했는데도 (사흘 전) 
아직 연락이 없어서 조금 답답하기도 하고요. 
만일 축 상황이 여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면, 
폰베이행 항공권을 추가로 끊어서 경로를 바꾸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26일 출국, 축에 27일 입국 예정이고요. 
현지 상황에 대한 정보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

2016/08/03

박경리 선생님을 생전에 처음 만나 뵀을 때 하신 말씀이 생생합니다. 대뜸 "환경이라는 말 참 안 좋아." 그러시는 겁니다. "환경이라는 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환경부가 어디 가서 뭐 재기나 하고, 인간은 쏙 빼놓고 바깥에 둘러싼 것만 가지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생태라는 개념을 가지고 가야 해. 환경부가 아니라 생태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태학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하신 말씀이겠지만, 그 말씀이 너무 정확하게 와 닿았어요. 2002년 한국 생태학회가 세계생태학대회를 유치했어요. 운영위원장을 맡아 해외 석학들을 섭외하는 역할을 맡았거든요. 박경리 선생님을 가장 중요한 기조연설자로 모셨어요. 그날 먼저 하신 말씀도 환경과 생태의 차이점이었어요. 또 생물이 중심에 있어야 하고, 생물과 환경이 관계 맺음 하는 게 진짜고, 주변만 보는 것은 의미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세계적 생태학자들이 다 일어서 박수치더라고요. 소설가 입에서 명확한 이야기가 나오니 감탄한 거죠. "자연이라는 원금을 까먹지 말아야 한다. 이자만 가지고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후손들에게 우리가 누린 자연을 그대로 선물해줘야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239호, 최재천, 특집 대담 '생태 취미, 자연에 들어서는 징검다리' 중에서 


어제 저녁, 퇴근하고 현관 앞에 놓인 이번 호를 가져다가 거실에 대충 앉아 이리저리 살피는데 반가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국립수목원에서 일하시는 박사님의 인터뷰 기사. 그리고 기억에 남은 이 대목.

대학원생들과 이른 봄 광덕산에 꽃을 보러 갔다가 너무 이른 봄에는 산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밟고 다니는 땅에서 식물들이 올라오고 있거든요. 식물은 번식을 위해서 꽃을 피우는 거예요. 요즘엔 여러 요인으로 나비나 벌 같은 수분자를 만나기 어려워요. 




자연, 푸르른 숲 가까이 집을 짓고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며 살고 싶다.

2016/08/02

사실 건물 앉히기에 가장 곤란한 곳이 바로 평평하고 네모난 땅이다. 신도시에서 분양하는 택지들이 대개 그렇다. 아무리 둘러봐도 다 똑같이 생긴 땅이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이라면 맹물이고 종이라면 백지다. 자연이 만든 우아한 경사지를 기필코 쑹덩쑹덩 잘라 야만적 옹벽을 앞뒤로 세우고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한국 택지 개발의 정의인 듯도 하다. 이런 땅 위에 건물을 얹어야 할 때가 가장 당혹스럽다. 좋은 답은 훌륭한 질문에서 나오는 법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인 건 그 절묘한 질문 때문이다. 그런데 평평하고 네모난 땅은 입을 굳게 닫고 있다. 필사적으로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다. 초면의 과묵한 상대는 얼마나 불편한 존재겠는가. 그에 비해 이렇게 경사 급하고 이상한 땅은 수다스럽게 많은 질문을 쏟아내는 중이다. 이런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궁금해하는 것이다. 
서현, <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짓기> 25쪽, 효형출판

건축 의뢰에서부터 대지를 보고 한 채의 건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서현의 세모난 책. 인상적인 집이지만, 결과물보다 그럴 듯한 과정이 더욱 흥미롭다. 건축가야말로, 그럴 듯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땅의 질문에 대한 답이 건축물이 되기에 너무도 척박한 우리의 도시는 오늘도 숨이 막힌다. 그렇지만 도시는 그렇게 지탱된다. 그리고 우리는 도시에서 살아간다.

공간에 대한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단지 복잡한 심상과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연상 작용까지도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공간을 마주한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기억의 둑이 탁 터지는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가 보고 경험했던 수많은 방과 풍경들이 일시에 흘러나왔다. 뿐만 아니라 조와 내가 이 공간을 만들어 내느라 들였던 그 많은 시간과 추억까지도 한꺼번에 떠올랐다. 
마이클 폴란, <주말 집 짓기> 321쪽, 배경린 옮김, 펜연필독약

폴란의 책을 재밌게 읽고 있다. 벌써 다 읽었어야 하는 책을 괜히 끌고 있는 셈인데, 좀 더 붙잡아두고 싶은 구절들이 있다.


집에 틀어박혀 있어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삶,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충족되지 않는 헛헛함이 무언가 내 손으로 직접 해 보고 싶다는 예기치 못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문학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에 대한 필요를 반영했다면, 그 공간을 손수 만들고 싶다는 소망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일이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인데, 요즘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의 일 역시 세상과의 관계를 추상적이고 비본질적이며 간접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타인이 쓴 글, 혹은 타인이 한 말을 다시 쓰고 고치고 다듬는 일을 하면서 보내다 보면,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제3자가 돼 버린 기분마저 들었다. '진짜 일'이었지만 늘 그렇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던 것은, 내가 하는 일이 나라는 인간에 대해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마치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목과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내 몸뚱이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내 일이 현실 세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는 느낌도 잘 들지 않았다. 정보화시대에 다소 구닥다리 사고방식일 수 있지만, 그래도 진정한 노동이란 역시 물리적인 생산이 필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정보 서비스직 종사자'라고 표현할 때마다, 망치나 끌을 쥐어 들고 문장 나부랭이보다 덜 가상적인 어떤 것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같은 책 33-34쪽


바슐라르는 1958년 그의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집이 주는 가장 큰 이점을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집이란 몽상의 보금자리요, 몽상가의 은신처이며, 평화롭게 꿈꿀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다." 너무도 간단한 말이지만, 이 글을 접한 순간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이며 되찾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책 38쪽 
 
주로 머리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폴란처럼 생각하는 때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사고가 실천으로 이어질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몸의 진실' 혹은 '육체 노동의 진실'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폴란이 2년 반이란 시간 동안 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온몸으로 느끼고 알아가고 체험하고자 했던 그 과정 자체가 내겐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덧붙이자면 폴란의 글은 참 담백하다.

2016/07/1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옥, 카슈미르


오늘 낮에 읽은 프레시안 기사 제목이다.  
카슈미르에 대해서는 거칠게 알고 있었지만, 그것도 인도 여행을 하던 십 년 전 얘기고, 실로 간만에 카슈미르에 대한 기사를 읽으니 그 지역의 비극적 역사에 숨이 막혀온다. 
그렇지만 십 년 전 나는 막무가내 여행자. 두 번째 찾은 인도에서의 가장 궁극적 목적지는 레Leh였고, 그곳에 가는 길에 들른 곳이 바로 카슈미르의 주도 스리나가르였다. 분쟁이 심해 경비가 삼엄하다는 그곳에, 지금 생각하면 굳이 갈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달 호수에서 보낸 이박삼일의 기억은 그런 위험 따위는 뒷전으로 밀어둘 만큼 경계가 흐릿한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분명한 기억은, 당시만 해도 스리나가르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달 호수에 떠 있는 숙소에 묵으며 숙식을 해결하고, 당연하게 이동을 하려면 시카라라고 부르는 배를 타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운치는 넘치지만 그 운치의 내부를 채우는 건 지독한 고독감 따위라는 것. 왜냐하면 당시 호수 위에서 마치 갇힌 듯이 지내는 게 나중에는 몹시도 따분하게 생각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거야말로 고독을 밀어내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더, 더, 더, 끄집어내 기억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지난 노트를 들춰봐도 당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질 않다. 오래된 사진을 꺼내보며 추억을 보듬을 수밖에.




2016/07/12

길 떠나는 이에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에 발을 내딛는다는 것. 그 무한한 긴장, 기대와 걱정. 배낭의 무게는 거기에서 결정된다. 나는 無用의 결혼식에 부친 詩에 이렇게 썼다. 


   벗이여, 
   이제 우리 긴 여행을 떠나자
   겨우내 얼었던 땅과 나무
   대지를 풍요롭게 하네
   살아있음을 실감케 하는 
   햇살, 바람의 손짓 따라
   떠나자, 여행을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따르는 믿음과 사랑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마음과 손과
   발이 대신하리
   우리는 기꺼이 연대하리
   짐을 꾸리자, 벗이여
   우리 앞에 놓여진 그윽한 길
   발을 내딛는 순간, 삶은
   여행이 되리  


그렇다. 얼마든지 삶은 여행에 비유될 수 있다. 같은 장소를 가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게 여행이듯 삶도 얼마든지 그렇다.
어제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K였던 J가 오후 느즈막이 집에 들렀다. 집에서 가장 시원한, 식탁에 자릴 잡고 앉아 냉장고에 든 맥주를 모두 비우며, 앞으로의 시간과 누군가의 경험에 대해 논했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 있지?)
주제넘게도, 내가 한두 마디 거들 수 있었던 건 고작 서너 해 더 먹은 세월의 겹일 뿐인데도, 나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말은 거만하다.
집과 아이와, 어떤 느슨한 결속에 대해. 그리고 '때時'에 대해.
조금은, 조금이라도, 변화하는 방향으로 삶의 머리를 틀고 싶다는 누워있는 생각.
맥주를 다 비우고 동네 산책을 하고, 오후에 내려둔 커피를 나눠 마시고, J는 떠났다.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지?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을 데리고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얘기를 했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에스트라공은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벗겨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잠들어버린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바라본다)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다시 얻어맞은 얘기나 할 테고 내게서 당근이나 얻어먹겠지... (사이)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에스트라공을 바라본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두자고. (사이) 이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구나. (사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지?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151-152쪽, 오증자 옮김, 민음사

오랫동안 읽고 싶어했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베케트. 이름이 주는 뉘앙스 때문인지, 나는 지금껏 베케트가 프랑스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일랜드 태생. 그러니까 버나드 쇼에 이어서 연이어 희곡을, 그것도 아일랜드 출신 작가의 작품을 읽은 셈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제임스 조이스, 조지 버나드 쇼, 사뮈엘 베케트까지. 후에 오스카 와일드를 읽을 기회도 있겠지.
아직은 생소한 희곡이라는 장르의 맛은, 아무래도 무대 위에서 만끽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쇼의 <피그말리온도>도 그랬지만, <고도를 기다리며> 역시 읽는 맛보다 무대에 올려진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과연 이 생경한 대화들을 배우들이 어떻게 소화해나갈지, 자뭇 궁금하다.

그리고 내게 베케트를 기억하게 하는 또 하나,

출처: National Portrait Gallery(npg.org.uk)

2016/07/02

나의 생존 증명서는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06/29

이숲생활

이하hija는 에스파뇰로 딸이란 뜻이다.

우리가 결혼을 앞두고 여행을 남미로 가면 어떨까 하고, 무작정 합정동에 있는 '가장자리'에서 에스파뇰을 배울 때였다. 한 권의 책을 같이 보며, 게으르게 수업에 참여했었는데, 어느날 수업시간에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이하hija와 이호hijo였다. 딸과 아들. 그때 이하의 태명은 정해졌다. (나중에 이하가 알면 서운해 하겠지만, 사실 성별을 알기 전까지는 이호라 칭했었다.)
출산에 너무 임박하지 않게 이사를 하기 위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보고 3월에 이사하기까지, 처음엔 나름 고향 다음으로 오래 살았던 서울을 떠나는 게 어쩐지 서운했었는데 막상 이삿날이 되자 어서 빨리 지긋지긋한 이삿짐 정리를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사를 하게 된 동네는, 거의 의도적이었지만 처형네 집과 아주 가깝고, 기적적으로 자연 공원이 가까이 동네를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맛이 있었다. 그리고 이사를 결정하고 나서부터는, 새로 이사하게 될 집에 이름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이숲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 와 이하를 낳고 자라는 모습을 보게 될 터이니 '이'를 붙이고 싶었고, 숲이 가까우니 이숲. 간단하고 부르기 쉽고 무엇보다 어감이 맘에 들었다. 비록 빌려 사용하는 집이지만, 우리만의 이름을 짓고 칭하며 사니 금세 친구처럼 친숙해진다.

그리고 이사를 온 지 석 달 후에 이하가 태어났다. 이제 날이 밝으면 조리원에서 퇴실하고, 본격적인 이숲생활이 시작된다. 이하와 함께.

2016/06/25



이하는 잘 먹고 잘 싼다.

대참사의 날.


이숲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개인생활로 시작한 게 목공.
소박하고 작은 재주 정도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다행히 아직은 재미가 있다.
시작하고 처음 만든 스툴.
스툴이라 부르지 못하는,


뭐든, 해 보고 나면 달라보이는 것.
목공을 시작하고 지금껏 손쉽게 지나치고,
그저 취향대로만 가구를 분류하곤 했던 내가
이제는 사소한 디자인 하나 하나가 새롭게 보인다.
김광석이 그랬던가, 딸아이가 태어나고 보니 거리에 사람들이
쉽게 보이지 않더라고.



이 작은 발로,
어디 가려니 이하야.

2016/06/19

당신, 이라는 문장

매일같이 당신을 중얼거립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의 문장이었으면 나는 당신과 하나의 문장에서 살고 싶습니다 몇 개의 간단한 문장 부호로 수식하는 것 말고 우리에게는 인용도 참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도치와 철지난 은유로 싱거운 농담을 하면서 매일같이 당신을 씁니다 어느 날 당신은 마침표와 동시에 다시 시작되기도 하고 언제는 아주 끝난 것만 같아 두렵습니다 나는 뜨겁고 맛있는 문장을 지어 되도록 끼니는 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없는 문장은 쓰는 대로 서랍에 넣어두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맨 아래 칸은 비우던 기억이 납니다 영영 못 쓰게 되어버린 열쇠 제목이 지워진 영화표 가버린 봄날의 고궁 입장권 일회용 카메라 말린 꽃잎 따위를 찾아냈습니다 이제 맨 아래 서랍이라면 한사코 비어 있길 바라지만 오늘도 한참을 머뭇거리다 당신 옆에 쉼표를 놓아 두었습니다 나는 다음 칸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쉼표처럼 웅크려 앉는 당신 그보다 먼저는 아주 작고 동그란 점에서 시작되었을 당신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시작되는 문장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있고 쉼표가 있고 그 옆에 내가 있는 문장 나와 당신 말고는 누구도 쓴 적이 없는 문장을 더는 읽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깜빡이고 있습니다 거기서 한참 아득해져 있나요 맨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당신, 
유진목, <연애의 책>, 삼인 

한 권의 시집을 통째 읽는 맛이, 오랜만이어서 얼마나 달던지.
그렇게 달고 좋아서 오히려 눈물겹다.

피그말리온, 조지 버나드 쇼

히긴스: 알파벳을 발음해 봐. 
리자: 알파벳은 나도 알아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세요? 어린애를 가르치듯이 할 필요 없어요.
히긴스: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알파벳을 발음해 보라고.
피커링: 해봐요, 둘리틀 양, 곧 이해하게 될 거야.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해요. 선생님 방식대로 가르치게 해요.  
리자: 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아이, 버이, 커이, 더이 -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열린책들, 2011)은 알파벳을 '아이, 버이, 커이, 더이 -'로 발음하던 일라이자를 음성학자 히긴스가 불과 몇 개월을 가르침으로써 상류층이 즐비한 가든파티에서 멋진 숙녀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이야기다. 만일 이 같은 '성공'을 끝으로 희곡이 마무리되었다면 싱겁지 그지없었겠지만, 쇼는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수가 원하는 방식 즉,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해피 엔딩' - 히긴스와 리자의 사랑 -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도 않았다. 대신 히긴스와의 수업을 통해 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 일라이자의 변화된 모습을 바탕으로 영국 사회를 비롯해 인간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여지를 남겨두었다. 

리자: 난 약간의 친절을 원해요. 난 천하고 무식한 아이고, 당신은 유식한 신사인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당신 발톱의 때는 아니에요. 내가 그 일을 했는데, (자신의 표현을 바로 잡으며) 내가 그 일을 했던 건 옷을 얻거나 택시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가 같이 있으면 즐겁고, 내가 선생님을, 좋아해서, 좋아하게 돼서 했던 거예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고 우리가 신분이 다르다는 걸 잊은 것도 아니에요. 단지 더 친해졌으면 했던 거예요. 
리자: 아, 당신은 잔인한 폭군이에요. 당신하고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모든 걸 나한테 불리하게 바꿔 놓아요. 나는 항상 잘못한 거죠. 하지만 당신도 자신이 남을 괴롭히는 폭군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죠. 내가 당신이 말하는 그 시궁창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그리고 세상에 당신하고 대령님 말고는 진정한 친구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두 분을 만난 후에 내가 미천한 남자와 같이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척하면서 나를 모욕하는 건 사악하고 잔인한 거예요. 내가 아버지 집 말고는 갈 데가 없으니까 윔폴 거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나를 발밑에 두고 짓밟고 무시해도 된다고 확신하지는 마세요. 난 프레디랑 결혼하겠어요. 내가 그를 부양할 수 있게 되면 바로요. 

2016/06/17

조리원에서의 시간은 대체로 갑갑하지만,
신생아실이 소독하는 시간 - 18:30~20:30 - 에
우리 방에 와 있는 이하를 돌보는 동안은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기분이 든다.
오늘은 선잠이 들었다 짜증 섞인 투로 울며 깨며를 반복하다
신생아실로 돌아갔다.

2016년 6월 14일 저녁 8시 48분
이하hija가 태어났다.

2016/06/05

십일 년 전, 먼 땅 인도에서 만나 지금껏 만남을 이어오던 홍과 정민이 어제 결혼식을 올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의 겹이 그들에게 쌓였는가. 남은 인도팀의 일원인 우리에게는 그들의 행복한 여정이 참으로 다행이고 기쁨이다. 그건 그렇고 그들이 결혼식 2부로 마련한 서면의 공간 The Brick House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비가 내려서 정원을 한껏 활용하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날씨가 그렇다면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고, 그곳에서의 흥취를 견디지 못한 나는 열차표를 뒤로 미뤄야 했다. 비록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살가움을 느꼈다. 축복된 공기를 흐름을 느꼈다. 앞으로의 그들 삶 앞에도 그와 같은 흐름이 자주 찾아오길.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운동 시합이란 자주 개인의 사소한 대립이나 이해관계를 넘어 어떤 맹목적인 집단 의지 같은 것을 형성하는 데엔 큰 공헌을 하는 수가 있다. 거대하고 맹목적인 집단 의지 속에 잡다한 개인의 불평이나 의식의 편향 같은 건 일거에 깨끗이 해소되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끔 특정 집단의 작은 불평이나 이해 갈등을 해소시키고 그 집단에게 목적하는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엉뚱한 스포츠 행사를 이용하는 수가 있다. 그야 물론 모든 스포츠 행사가 그 스포츠 고유의 목적 이외에 여러 가지 다른 부수적인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당연했다. 이 섬에 대해 말한다면 원장은 그 스포츠 행사를 통해 원생 개개인 간 또는 병사 지대와 직원 지대 간의, 원장과 원생들 간의 인간적인 신뢰감을 회복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에 대한 투철한 자신감을 길러주는 데에 보다 큰 목적이 있었다. 조원장 자신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원장의 동기가 어디에 있었든 상욱은 역시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151쪽, 문학과지성사

몇 년 전에 읽으려고 사둔 책을 최근 몇 달 사이 김현의 전집을 이리저리 들춰보다가 자주 눈에 띈 이청준이라는 이름 때문에 겨우 집어들어 읽게 되었다. 독서는 많은 경우 이런 식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경우의 독서는 '적중'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살아있었지만 살아도 알지 못했을 시절 5공이 펼친 3S정책을 생각한다. 하지만 어디 5공뿐이랴. 지금도 간혹 나는 '국가대표'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스포츠의 막강한 힘을 볼 때면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 자신도 거기에 편승하고 있는 게 확실한 가슴 뜀을 느끼며 진실로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집단에 몸서리를 치고 만다. 별 수 없는 일일까. 

1960년, 같은 교양학부 강의실에서 1년을 함께 보냈는데도, 그때의 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는 김승옥이 자취하고 있던 성북동 산기슭의 허름한 집의 자취방 윗목에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던 그이다. 학보로 군대를 갔다가 제대한 뒤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우리가 그때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 속에 자기가 지켜야 할 무슨 엄청난 것이라도 간직한 듯,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서로들 가능하면 말을 삼가려 하고 있었던 시기라, 자신들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여서 근 20여 년을 사귀어오면서도 나는 그가 그의 글 속에 피력한 과거 외에는 그의 과거를 거의 모른다. 그때 우리는 아마 소주를 마시며 그 당시에 발표되던 소설 얘기를 했을 것이다. 
20여 년간 그와 사귀어오면서, 아니 그와 술을 마셔오면서 내가 언제나 그의 의견에 승복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와 여러 번 다퉜고 그 다툼을 때로는 절교 상태로까지 우리의 관계를 몰고 갔다. 그때마다 그는 작품으로써 다시 그의 의견을 나에게 되물었다. 때로 그 작품들은 나를 감동시키기도 하였고 때로는 나를 더욱 실망시키기도 하였다. 한 호로서 창간과 동시에 종간이 되어버린 <68문학>을 내놓고 그것의 앞날의 방향에 대해 심한 논쟁을 한 끝에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서로 퍼붓고 헤어진 후 거의 1년이 넘어서 그는 나에게 <소문의 벽>을 보여줬다. 그것을 읽고 나는 감동했다. 우리의 우정은 그때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와 같은 작가를 친구로 갖고 있는 게 즐겁다. 그는 언제나 작품으로써 질문에 대답하는 그런 작가이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다음과 같은 문학이다.
문학은 언제나 자유롭고 새로운 시선으로 우리의 삶과 세계를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힘이 없이 총체적인 넓이로 바라보고 경험하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삶을 그 삶의 본래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되돌아가 살게 하여야 한다.
김현, <문학과 유토피아> 242~245쪽, 문학과지성사, 이청준에 대한 세 편의 글 '욕망과 금기' 
 

2016/01/24

김현, 기형도

김현의 치열한 글을 읽다보면 치열하지도, 고르지도 못한 책읽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과 부끄럽게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래왔듯, 언제나 부끄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르다고 해야 할까. 작아(작은것이 아름답다)의 표현대로 해오름달, 1월은 새로운 무엇이 없나 하고 분주하게 주위를 살핀다. 더군다나 그런 해오름달의 습관에 '책'읽기와 '글'쓰기가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잡다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필요한 장소는 자연스레 '산'이 되었고, 몇몇 겨울산의 후보들이 있었지만 내가 택한 곳은 빛고을 무등산이었다. 아, '무등산은 알고 있다'고 했던가. 
헌데 문제의 날, 오늘 내가 눈을 뜬 시각은 이미 열차가 대전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절망적이었다. 결국 나의 빈자리만이 홀로 광주에 간 셈이다. 쓸쓸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열차표를 취소했다. 거의 하루 종일 절망적인 상태를 유지하다가 떠오른 사람이 기형도였다. 그런데 김현을 읽는 중에 기형도가 떠오르니 두 사람의 (공적) 관계 생각이 났다. 그 공적 관계란 당연히 젊은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기형도와 그런 젊은 시인이 쓴 시를 비평하는 김현의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적 관계마저 오래 가지 못했다. 기형도는 첫 시집을 준비하던 중 종로의 극장에서 죽은 채 발견이 되었고, 그가 죽자 준비 중이던 시집이 졸지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고 시집이 되며, 김현은 시 해설(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을 전달하며 시집의 제목은 <입 속의 검은 잎>으로 하자고 했다 한다. 그랬던 김현마저 이듬해 암 투병 끝에 죽음을 맞는다.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측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 이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_기형도, <죽은 구름> 


그런 신인들 중에서 기형도의 <죽은 구름>(문예중앙, 1988년 봄호)은 돋보인다. 그의 시의 원리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실존의 덧없음을 그것을 표상해줄 수 있을 주변 묘사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왜 리얼리즘인가 하면, 이 세계 밖의 어떤 것도 그가 상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왜 그로테스크한가 하면 그가 묘사하는 것에 따르면 삶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의 현실주의는 이하석의 그것과 혈연관계에 있지만, 이하석이 중산층의 성적 부패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게, 기형도는 주검의 육체적 부패에 더 집착하고 있다. 그래서 이하석의 현실주의보다 그의 그것은 훨씬 더 절망적이고 기괴하다. 인간은 더러운 창을 스쳐 지나가는 미치광이 구름과도 같다. 그의 동반자는 고양이나 늙은 개뿐이다. 그의 그 전언은 끔찍스러운 전언이다.
_김현, <행복한 책읽기> 199~200쪽, 문학과지성사, 2015 


김현은 이미 그때 중앙일보 문학월평을 통해 기형도의 시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 기형도가 바로 월평을 담당하는 기자인데, 자신의 시가 크게 다뤄지자 당황했다. 천하의 비평가 김현이 그의 시를 호평한 것이야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워낙 결벽증이 심했던 그인지라, 그 원고를 신문에 내는 것을 주저했다. 그래서 그는 김현에게 전화를 걸어 우선 고맙습니다, 라고 한 뒤 '그러나'로 시작되는 말을 어렵게 꺼내야 했다. 그러나, 정말 그러나 김현은 "내가 기형을 잘봐주려고 글을 썼다고 믿을 사람은 문단에 아무도 없을 거요. 정 싣기가 어렵다면 원고를 돌려주세요"라고 말했다. 이미 지면은 그 자리가 비워진 채로 원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그는 결국 정규웅 부장에게 구조신호를 보냈다. 정 부장은 김현의 양해를 얻어 원고에서 기형도 부분은 맨 뒤로 돌리고 양을 줄이는 선에서 월평을 신문에 내보냈다.
_박해현,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 169~170쪽, 문학과지성사, 2009


난데없는 동아일보의 짧은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기형도가 죽었단다. 아니 이게 웬일이야. 한 달 전에 그와 같이 술 마실 때의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울고 싶은 듯, 찡그리고 싶은 듯,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묘한 표정이었다. 아니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자리를 옮긴 것이 그렇게 가슴 아팠단 말인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 혼자 영화를 보다 죽다니!  
_김현, <행복한 책읽기> 272쪽, 문학과지성사, 2015 

2016/01/01

영춘, 영춘

아침에 사우나 대신 드라이브를 택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하의 아침. 창밖으로 여명이 가시기 시작했고, 여전히 달은 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우린 나섰다. 영하 십일도. 
어제 영춘에서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다시 영춘행. 옆구리에 붙어 세월을 흐르는 남한강은 얼어붙은 듯 보였다. 단양읍내에서 영춘까지는 넉넉잡아 삽십분. 문이 굳게 닫힌 영춘향교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북벽으로 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름들이 각자 내력이 있거나 이유가 있듯 북벽 또한 그랬다. 그 이름 그대로, 북벽은 낯선 이도 낯설어 하지 않도록 지어진 순수한 이름이었다. 오래된 느티나무와 마주보고 있는 북벽은 그 사이로 남한강물을 느릿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표면에는 은은한 물안개가 방랑하고 있었고, 물가 깊이가 옅은 곳은 적당히 얼어붙어 있었다. 영하 삽십도. 손이 시리고 추웠지만, 북벽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좋았다. 저 깊은 산 너머에서는 아침 해가 부지런히, 강원의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럴수록, 물안개와 얼어붙은 강물과 함께 고정된 북벽은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단양읍내로 돌아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편 오르막으로 난 길이 있었다. 그래, 영춘은 원래 굽어지는 남한강으로 인해 일종의 고립된 섬 같은 곳이었다. 그런 곳이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두 개 생기면서 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게 되었다. 그러니 다리를 건너지 않고 빠지게 되는 오르막은 옛길인 셈이다. 그 길로 올라섰다. 이제 막 해가 제 빛을 활기차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 그곳에서의 발길은 얼마나 무거웠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