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9

6월에, 매일 저녁이면 우리 가족을 산책길로 안내하던 그 좋았던 날씨가 긴 더위를 끝내고 다시 돌아오나 싶었더니 습하고 수시로 비가 떨어지는 날씨가 반복된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틈 나는 대로 산책을 하고 있고 동네 골목의 변화를 살핀다.

어제 저녁에는 동네 요가하우스 선생님께서 집에 오셔서 동네에 관한 얘기를 하시며 설문을 요청해서 그것에 응하며 한 시간 가량 대화를 했다. 이사온 지 6개월이 다 되어 가지만 설문지에 이웃에 관한 사항에 빈약한 답을 하며 같은 식탁에 마주하고 있는 이웃이 반갑게 여겨진 건 아내도 마찬가지였으리.
아파트는 이웃과의 관계적 측면에서 삭막하고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에서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단정에 동의하지 않지만, 단독주택, 더 나아가 동네에 산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의 질에 대해 고민하는 것 자체가 한편으로는 여유가 깃든 삶이라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여유가 있는 이들이 삶의 질에 대해, 더 나아가 동네에 대해 고민하고 관여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는 나를 기쁘게 하는 요소도 많고 나를 화나게 하는 요소도 그에 못지 않게 많다. 그런데 그런 요소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건 우선 그 자체로 즐겁고 반가운 일이다. 주차 문제, 쓰레기 문제, 보행 문제 등 어느 하나 우리 삶과 따로 떼놓고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많은 화두를 던졌지만 마음과 달리 정작 내 생활은 동네 일에 한 발도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으니 사실은 좀 부끄럽다.
어떤 통로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이 떠나기 전에 지하 공간을 보여드리며 공간의 활용에 대해서도 가벼운 제안을 했는데 앞으로 동네 일에 어떤 식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둘째 담이 얼굴이 일주일째 말이 아니다. 소아과에서 처방해준 약으로 해결이 더딘 것 같아 오늘 피부과에도 다녀왔는데 아이가 어려서인지, 아님 현 증상에 대한 뚜렷한 처방을 하기가 아직은 곤란한지, 현재로서는 뭐가 됐든 리도맥스라는 얘길 듣고 병원을 나서는 길은 우울했다. 괜한 우울은 시 환경요원들이 집 앞에 잔뜩 쌓아둔 쓰레기 더미를 보고 그들에게 화를 내게 만들고 비가 내려 잠시 집 주차장에서 회의를 하던 전기 공사 사람들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던지게 한다. 더 우울하다.

습관까지는 아니지만, 가끔 우울한 생각이 들 때 영화 shortbus에 나오는 인물들의 우울한 표정을 무심코 보기도 하는데 오늘은 shortbus soundtrack을 들으며 오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19/09/05

비와 관찰

가을 장마라니.
비를 싫어하진 않지만, 비든 뭐든 다 때가 있는 거니까. 기분상 비를 좋아하는 건 감성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작물이 자라나는 데 필요한 비의 소중함을 보며 자랐기 때문에 마냥 감성적으로만 비를 대하진 않는다.
태양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절기는 우리네 풍습과도 깊은 관련이 있지만 농사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비도 마찬가지다.

아파트에 살 때는 비가 내려도 무심했다. 그게 사실이다. 때로 삽자루를 챙겨 논으로 나서거나 우사의 지붕을 챙기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직접 비와 맞서야 하는 것과 간접적으로 그것을 떠올리는 건 아무래도 차이가 크다.

비가 많이 내린다. 오전에는 하늘이 어찌나 쾌청한지, 비가 올 거라는 예보는 공기의 습도로 충분히 감지가 됐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무심히 집안으로 들어오기 미안할 정도의 날씨였다. 한 시간 남짓. 점심 시간이 지난 지금, 둘째 아이가 두 시간째 곤히 잠들어 있는 지금, 응접실의 라디오를 켜고 커피를 내려 오자마자 규칙적인 소음을 만난다.

똑, 똑, 똑.

아뿔사, 현관이 잔뜩 젖어 있고 도어클로저 쪽에서 물방울이 생기는 족족 현관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밖은 벼락 같은 비, 그리고 집안엔 누수.
누수가 처음은 아니지만 집에 비가 샌다는 게 기분 좋을 리 없다. 1층 사무실 분들과 한참을 관찰하다 집안에 들어왔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아 2층 발코니의 배수를 살피고 밖으로 나가 집 주위를 체크한다. 2층 발코니를 비롯해 가장 많은 물이 빠질 배수구가 한치의 틈도 없이 꽉 찬 채 물을 토해내고 있다.
노출된 외부 천장의 물은 늘 아슬아슬하다. 보수한 현관 하부의 물은 어느 정도 잡혔는지 낌새가 없지만 도로에 면한 쪽의 지하 외부 천장은 바닥에서 튄 물이라고는 의심스러울 정도의 물방울이 잔뜩 맺혀 있다.

물. 내려오고, 어딘가에 부딪치고 튀고 고이고 그 다음에는 어느 틈이든 더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물. 물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급한 대로 현관 도어클로저에는 마른 걸레를 대 물의 낙하를 지연시켰다. 임시방편.
담이가 잠든 동안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며 김금희의 소설이나 읽고자 했던 마음이 엉켜버렸다.
이런 오후의 마음이란.

2019/09/03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하여

강박관념 같은 것이었다. 뭐든 해야 한다고. 주 40시간을 일하고도 주말이 되면 밀린 책을 읽어야 한다고, 어딘가에 가거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따위의 강박에 시달려왔다. 그랬다.
1년간 일을 쉬기로 하고서도 그랬다. 제빵을 배워야지. 카프카와 프루스트를 읽어야지. 지하에서 뭔가를 도모해야지. 뭐 이런 생각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40. 꼬박 한 달을 쉬고 든 생각은 10년 뒤에 한 번 더 일을 쉬어야지. 그리고 쉬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지.
그동안 어떤 강박이 나를 사로잡아 왔던 걸까. 그냥 쉰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은걸. 집이 어지러져 있어도 일단 그냥 둔다. 라디오 들으며 김정선의 에세이를 읽는 게 더 좋으니까. 그렇다고 꼭 해야 할 집안일을 방기하진 않는다. 끼니는 챙겨야 하니 식기세척기는 일찌감치 돌려놓았다.
쉬니까, 많은 생각들이 내려앉는 걸 느낀다. 뒤뜰에 잔디의 속살도 더 보이고, 선큰의 계수나무가 말라가는 것도 더 잘 보인다. 평생 이 집에서 함께 할 나무가 금방 자라지 않는다고 조급해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지금 이 곳에 집을 짓고자 했을 때 내가 우리 집에 바랐던 건 풍경이었다. 그냥 우리 집이 동네에 있는 하나의 풍경이고 싶었다. 우리가 심은 나무도 그렇게 우리 집과 어우러져 동네 풍경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집에서 나도 쉬면서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
그런데 사실, 집에 있는다고 해서 쉬는 게 쉬는 것만은 아니다. 휴직을 했다고 어린이집에서 쫓겨난 둘째를 하루 종일 돌봐야 하고, 끼니와 간식을 챙겨줘야 한다. 서로 답답하니 틈나는 대로 동네를 산책하고 수국과 계수나무에 물을 줘야 한다. 뒤뜰에 매일 동네 개가 저지르고 간 똥을 치워야 하고, 비라도 내리면 집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치워야 할 건 없는지 살핀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날이 저물어서 빛이 물러서고 시간의 밀도가 엷어지는 저녁 무렵의 자유는 서늘하다. 이 시간들은 내가 사는 동네, 일산 한강 하구의 썰물과도 같다. 이 흐린 시야 속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연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_김훈, <연필로 쓰기> 74쪽, 문학동네, 2019

지난 금요일에는 양재동에 가서 오디오를 하나 장만했다. 좋은 소리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좀 더 나은 소리를 가진 오디오에 관심이 컸고 현재 내 수준에 맞는 오디오를 지금 집에 들이고 싶었다. 한 가지 실수가 있었다면, 청음할 때 지금의 오디오보다 열 배는 비싼 오디오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
새로 산 오디오는 시디 소리가 정말 좋은데 요즘 나는 거의 라디오를 듣는다. 아직 새 오디오의 라디오 수신이 썩 내키지는 않는데 좀 더 나아지리라 생각한다. 지금 오디오 자리에 있던 라디오는 아내가 주말 밤에 후다닥 정리한 응접실로 옮겨졌는데, 그곳에 라디오를 엷게 틀어두면 외출했다가 들어올 때 기분이 색다르다. 주파수는 93.1. 클래식을 잘 몰라도 상관 없다.

2019/08/26

오후 세 시의 풍경

주말부터 이어진 두통 때문에 오전 내 느슨해져 있다가 점심을 챙겨 먹고 소파에 앉아 차가운 티를 마시며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는다. 오후 세 시가 되기 전까지의 오늘 하루 풍경. 어쨌든 이발을 해야겠어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30미터 정도 되는 곳에 미용실이 하나 있었다. 안을 슬몃 엿보고는 지나쳤다. 남성 한 명이 커트를 하고 있었고 동네 어르신 두 분이 소파에 앉아 계셨다. 시간이 걸릴 듯했다. 지나쳐 몇 걸음 가지 않아 생각을 바꿨다. 다녀봐야 헛걸음일 테고 아이들 데리러 갈 시간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면 손에 들고 있는 김정선의 <오후 네 시의 풍경>을 읽으며 기다리면 될 터였다. 돌아와 미용실을 문을 열고 "커트 많이 기다려야 해요?"라고 물으니 "금방 돼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행이다. 행운미용실.
살면서 단골이라는 개념은 늘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하지만 머릴 다듬는 행위만큼은 단골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친 적이 없다. 늘 미용실 가는 걸 불편해 했고 귀찮아 했으며 그러다 보니 집에서 가까운 기준으로 사는 곳에 따라 다닌 미용실이 바뀌었다. 서울에서 용인으로 이사오기 전에 삼선교 근처에서 다니던 미용실과 용인에서 광교로 다니던 미용실은 그나마 단골스러움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남한테 내 머리 다듬는 걸 맡기는 건 늘 어색해 했으면서도 박하향이 가득한 샴푸로 머릴 감는 건 개운해서 좋아했다. 그래서 한 때는 에쿠니 가오리 소설의 주인공처럼 샴푸만 하러 갈 수 있는 단골 미용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미용실 소파에 앉아 할머니 두 분과 티비에서 나오는 근대를 무치는 요리 방송을 보며 할머니들의 요리 간섭에 귀 기울이다 보니 금세 내 차례였다. 오후 세 시. 간단하게 내 요구를 전달하고 미용실 아주머니 표정만큼이나 편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오한 때문에 입은 긴팔 탓인지, 그냥 더위 탓인지 땀이 나기 시작했다. 가위로 삭삭 머릴 다듬던 미용사 아주머니가 한쪽으로 가시더니 선풍기를 가져와 내 몸에 씌워진 보자기의 다리 부분을 휙 젖히더니 다리 방향으로 선풍기를 틀어주신다. 시원하다. 인도에서나 보았던 벽과 일체로 된 누렇게 바랜 에어컨은 필요 없었다. 처서도 지나지 않았나. 가벼운 웃음이 났다. 머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 와중에도 소파에 앉은 할머니 두 분 중 한 분은 요리 방송에 말을 보태셨다. 다리로 들어온 바람이 상체 쪽으로도 이어지는지 온몸이 시원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발이 끝났다. 미용사 아주머니는 머릴 다듬는 동안 두 번 질문을 했다. 앞머리 괜찮아요? 구레나룻 괜찮아요? 아무래도 좋았기에 괜찮다고 대답했다. 안경을 안 써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앞서 커트를 한 남성의 경우 이발이 끝나자마자 지폐로 요금을 지불하고 바로 나갔었는데, 내 이발이 끝나니 의문이 들었다. 아 이 곳은 샴푸 서비스는 없는 걸까? 집이 코앞이니 아무렴 어때 하는 마음으로 묻지는 않고 눈치를 잠깐 살폈다. 경우가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 마침 미용사 아주머니께서 샴푸실 쪽으로 가는 것 같아 괜히 머릴 만지는 척하며 주뼛거리고 있는데 빗자루를 가져와 내 잘린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하시길래, 아 이곳은 샴푸 서비스가 없는 게 확실하구나 생각하며 요금을 지불하고 미용실을 빠져나왔다. 
기분 좋은 이발이었다. 

2019/03/01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그러나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목표나 계획 같은 건 없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대개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깨닫게 된다. 링에 오를 때는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_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22-23쪽, 어크로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