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다른 일들처럼 실천해야 한다. 글을 쓰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면 내 이름이 박힌 소책자 하나가 겨우 나왔을 것이다.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을 누가 느낄 수 있을까? 마라토너가 달리고 싶은 기분이 될 때까지 기다리나? 교사가 가르치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 차서 일어서는가? 잘 모르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추정컨대 오직 행위만이 생산적이다. 할 일을 하는 것만이 그에 대한 욕구를 가능하게 한다. 선수가 경기복을 입고 스트레칭을 하고 달리기 시작한다. 발명가가 작업실로 터덜터덜 걸어가 등 뒤로 문을 닫는다. 작가가 오로지 작업하기 위한 시간을 내며 작업공간에 앉는다. 그렇게 해서 작가가 영감을 받았을까? 딱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극이 필요한 작가가 산만해지고, 지루해하고, 외로워졌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원고에서 벗어나 정신을 배회시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라는 걸 안다. (105)
나는 연습(practice)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삶이란 온전히 '실천'(practice)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지나야 했다. 글쓰기, 운전하기, 하이킹, 양치, 점심도시락 준비, 침대 정리, 저녁식사 준비, 사랑 나누기, 개 산책시키기, 심지어는 잠자기까지도. 우리는 언제나 실천한다. 오로지 실천뿐이다. (111~112)
채널을 열어두도록 해. 마냥 즐겁기만 한 예술가는 없어. 어느 때고 무엇에건 만족할 일은 없어. 그저 이상하고 신성한 불만족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뿐이야. 다른 이들보다 더욱 살아 있게 해주는 축복만이 불안만이 있을 뿐이야. ... 어느 때고 무엇에건 만족할 일은 없어. 아주 산뜻하고, 솔직하고, 엄청난 위안이 되는 말이다. 어느 때고 무엇에건 만족할 일은 없다는 말에 엄청난 위안을 받을 사람은 작가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위안을 받았다. 이 말은 내가 결국 이런 일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곱씹게 한다. 나는 결과물과 자신을 분리하는 한편, 최선을 다해 작업해야 하고 채널을 열어두어야 하는 삶과 계약했다. (167)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인물들과 그들의 상황이 어쨌거나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유명한 예술가에 관한 소설을 썼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받아온 정신분석가에 관한 소설도 썼다. 이 인물들을 사랑했고, 이들은 내게 진짜였다. 하지만 평범하지는 않았다. 회고록 <슬로 모션>을 쓰고 다시 소설로 돌아갔을 때, 제이콥이 아팠던 와중에, 내 머릿속에서 뛰놀기 시작한 건 평범한 가족이었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계시는 일상에 있다는 걸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은 그저 자기 일을 보러 나가는 여성이다. 클러리서 댈러웨이를 비범하게 만드는 건 그녀 내면의 삶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도 이를 알고 있었다. 에마 보바리와 샤를 보바리는 곤경에 처한 평범한 사람이다. 포크너는 "자신과 충돌하는 인간 내면의 문제만이 좋은 글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박동하는 심장이라면 필히 내재하고 있을 이런 충돌을 조명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독자에게 공감하고, 하나 되는 감각을 갖고, 발견하게 해주므로. 여기서 우리는 개별성에서 벗어나 인간됨이라는 일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문학이 주는 가장 큰 위안을 얻는다. (175)
나는 제이콥이 자기 부모를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기를 바란다. 하루 하루가 다르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 집에서는 축제 아니면 기근이다. 이 모든 일들이 아이가 커서 생선가게 주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할지도 모른다. 아이는 간절히 안심과 일관성을 바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누가 아이를 탓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이가 예술가라면, 재능과 갈망, 견디는 능력, 무엇보다도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를 융합할 수 있다면, 아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삶이 우리를 선택하니까. (252-253)
이 까칠하고 과민하고 교류에 서툰 사람들이 내 부족이다. 당신이 작가라면 당신의 부족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작가들 사이의 경쟁과 질투라는 걸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다. 우리는 다른 이가 아닌 자기 자신과 경쟁하고 있다. 낭독회나 컨퍼런스나 온라인에서 서로를 만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낯선 존재를 희망을 갖고 인지한다. 우리는 우리가 같은 종족의 구성원이며 살아남으려면 다른 이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비록 혼자서 글을 쓰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일종의 협업이다. (259-260)
나는 계속 글을 쓸 거예요. 글쓰기는 나를 구원했습니다. 이 장엄하고 분란한 존재에게 활짝 열린 창문이 되어주었고, 내가 손에 쥔 모든 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되어주었지요. 글쓰기는 나를 아늑함과 안전함 너머로, 자기 인식의 한계 너머로 몰아붙여 내 이해 능력을 확장시켜주었습니다. 내 마음을 누그러뜨렸고, 지성을 강화했어요. 글쓰기는 특권이었지요. 내 엉덩이에 채찍질을 해댔고요. 내가 귀중한 명철함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날마다 고통, 무작위, 선한 의지, 운, 기억, 책임감, 친절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내가 그러고 싶건 아니건 말이죠. 글쓰기는 내가 성장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진화해야 한다고요. 더 나아지라고,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몰아붙였죠. 글쓰기는 나의 병이자 약입니다. 내가 겪었던 상실들을 견디게 했고 상실들의 대안이 되어주었죠. 어떤 패턴을 찾아낼 때까지 내가 느꼈던 어떤 혼란을 조금씩 사라지게 하면서요. 아주 가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나를 자랑스럽게 여겼을지도 몰라.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머니를 이해시킬 수 있는 단어를 찾아냈을 수도 있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바꾸고 있어. 나는 죽은 자와 산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에게 손을 내밀고 있어요.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래요,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있습니다. (31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