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5

며칠 단상

10/6 금
  • 학교에서 두 번째 캠핑. 하지만 하루로 바뀐. 부족한 숯을 고구마용 장작으로 보태가며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 학교를 나오며 창룡문에서 개막한 미디어아트를 지나가며 구경하려고 방향을 틀었다가 차를 세워놓고 놀다가 집으로 갔다. 

10/7 토
  • 학교 캠핑이 당일로 바뀌면서 비게 된 하루. 오후에 대나무 파빌리온 프로그램 지원 요청을 받고 오후 내내 장안공원에 머무르다. 

10/8 일
  • 실패한 용접을 다시 하고, 지하에서 라면을 끓여 먹다. 
  • 골목 아주머니의 제안으로 옆 공터 쓰레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화분 몇 개를 모퉁이에 배치했다. 두고볼 일. 
  • 북지터에 하림밴드가 온다고 해서 저녁 먹고 부리나케 나갔는데, 두 곡밖에 못 들었다. 성곽 중턱에 온이랑 둘이 앉아 보는 공연은 짧았지만 좋았지. 우리집 머리도 보이고. 

10/9 월
  • 처음 참여한 어린이집 체육대회. 잠시 내린 비 때문에 한 시간 늦게 시작했지만, 원활한 진행으로 밀도 있게, 즐겁게 놀았다. 상품이 어른들 위주라 애들이 실망을 했지만. 
  • 집으로 가는 길에 정비가 끝난(시장+주차장) 화서시장에 들러 손님용 고기와 과일을 사고 분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다. 
  • 능행차 교통통제로 집 가는 데 한참 걸리다. 
  • 오후 3시30분쯤 집을 나서 능행차를 보러 갔으나, 한 시간이나 지나야 메인 행렬이 장안문을 지나온다고 해서 성곽에서 놀다가 농협과 한옥기술전시관 근처에서 구경을 하다. 시시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과거를 품어야 할까. 늘 생각한다. 
  • 여섯 시 넘어, 예정된 손님들 도착. 다음 주면 사라질 동네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장안공원 파빌리온에 같이 가다. 
  • 지하에서 화로에 불을 붙이고 날리는 잿속에 담소를 나누다 불이 잦아들고서야 고기를 굽고 와인을 마셨다. 한 병, 두 병, 세 병. 입가심 맥주까지. 실내로 자릴 옮겨가며. 
  • 긍정적이고 맑은 기운을 가진 젊은이들과의 시간이 즐겁다.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 2015)

노년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말이거나 거짓이다. 예를 들어 생생한 몸이 부패하지 않고는 현명해질 수 없다는 듯 노년의 지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그렇다. 노인은 천천히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고 천천히 경직되고 멍청해진다. 이제는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것에 대해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멍청해졌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수 있다면, 다만 두 가지 관점에서 노년이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 쓸모가 있다는 것뿐이다. 우리에겐 담보물들의 나사를 죄어 결국 어느 정도 그럴듯한 전기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기억들을 오랫동안 갈고 연마할 시간이 있다. 또한 우리는 지속되는 몰락과 함께 자기 자신이 귀찮아져서, 인생에서 가졌던 것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것인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도록 어느 날엔가 죽음이 다가오기를 고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멍청해지는 속도보다 부패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경우에만 해당된다. (118-119)

나는 평생 너무 확고하게 자연을 신봉하느라 충분히 좋은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아무리 클로드 로랭의 그림이라 해도 바다를 그린 그림을 보면서 바다 자체에 대해서보다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자연의 기술적 독창성은 제쳐두고라도 내게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가 항상 능가할 수 없는 예술작품으로 여겨졌다. 비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자연 안에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구조역학 전문기사라도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고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모방이다. 콘센트에서 마이크로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모방일 뿐이다. 바퀴조차도 그렇다. 구(球) 모양이 없다면 바퀴도 없다. (135-136)

순수한 감사의 시간은 사랑의 첫 단계이다. 어떤 사랑이나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원했던, 또는 심지어 우리 안에 파묻혀 깨어나지 않은 채 숨어 있던 특성들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가 더불어 사는 데 익숙해 있던 다른 특성들을 몰아낸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소심함과 우리의 악의에서 구원된다. 우리는 가장 사악한 적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의 행복으로 모든 나무와 모든 거리와 모든 순간을 환하게 비추고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한다. 우리는 하늘과 비와 바람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고 또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148)

나는 당시의 내 상태를 나의 자연적인 정상 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속박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강력한 내적 욕구만을 따랐기 때문이다. 프란츠와 내가 그렇게 동물의 세계에 관심을 돌렸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는지 나는 그때 이미 숙고해보았다. 나는 멸종한 독거성 동물에 관심을 가졌고 프란츠는 단일 표본으로서는 생활에 부적격하고 무리를 지어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작은 개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가. (172-173)

개미들의 생활은 매우 이성적으로 질서가 잡혀 있어서, 그것을 정서적으로 미화하고 싶은 아주 작은 욕구에 대해서 일말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173)

"내 아버지가 옳았어. 사람은 인생의 것이지. 그리고 아버지를 위한 인생이 루치에 빙클러였다면 아버지는 그녀의 것이었어." (191)



일본, 후쿠시마, 동일본대지진, 원전, 오염수...

1. 2023년 8월 24일 오후 1시를 기해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를 시작했다. 7,888톤. 
2. 2023년 10월 5일 2차 방류 시작. 7,800톤. 
3. 2023년 11월 2일 3차 방류 시작. 7,729톤. 
4. 2024년 2월 28일 4차 방류 시작. 17일간 7,800톤. 


<후쿠시마 원전 폭발 및 오염수 관련 기사 모음>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대니 사피로, 2022)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다른 일들처럼 실천해야 한다. 글을 쓰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면 내 이름이 박힌 소책자 하나가 겨우 나왔을 것이다.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을 누가 느낄 수 있을까? 마라토너가 달리고 싶은 기분이 될 때까지 기다리나? 교사가 가르치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 차서 일어서는가? 잘 모르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추정컨대 오직 행위만이 생산적이다. 할 일을 하는 것만이 그에 대한 욕구를 가능하게 한다. 선수가 경기복을 입고 스트레칭을 하고 달리기 시작한다. 발명가가 작업실로 터덜터덜 걸어가 등 뒤로 문을 닫는다. 작가가 오로지 작업하기 위한 시간을 내며 작업공간에 앉는다. 그렇게 해서 작가가 영감을 받았을까? 딱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극이 필요한 작가가 산만해지고, 지루해하고, 외로워졌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원고에서 벗어나 정신을 배회시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라는 걸 안다. (105)


나는 연습(practice)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삶이란 온전히 '실천'(practice)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지나야 했다. 글쓰기, 운전하기, 하이킹, 양치, 점심도시락 준비, 침대 정리, 저녁식사 준비, 사랑 나누기, 개 산책시키기, 심지어는 잠자기까지도. 우리는 언제나 실천한다. 오로지 실천뿐이다. (111~112) 


채널을 열어두도록 해. 마냥 즐겁기만 한 예술가는 없어. 어느 때고 무엇에건 만족할 일은 없어. 그저 이상하고 신성한 불만족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뿐이야. 다른 이들보다 더욱 살아 있게 해주는 축복만이 불안만이 있을 뿐이야. ... 어느 때고 무엇에건 만족할 일은 없어. 아주 산뜻하고, 솔직하고, 엄청난 위안이 되는 말이다. 어느 때고 무엇에건 만족할 일은 없다는 말에 엄청난 위안을 받을 사람은 작가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위안을 받았다. 이 말은 내가 결국 이런 일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곱씹게 한다. 나는 결과물과 자신을 분리하는 한편, 최선을 다해 작업해야 하고 채널을 열어두어야 하는 삶과 계약했다. (167)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인물들과 그들의 상황이 어쨌거나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유명한 예술가에 관한 소설을 썼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받아온 정신분석가에 관한 소설도 썼다. 이 인물들을 사랑했고, 이들은 내게 진짜였다. 하지만 평범하지는 않았다. 회고록 <슬로 모션>을 쓰고 다시 소설로 돌아갔을 때, 제이콥이 아팠던 와중에, 내 머릿속에서 뛰놀기 시작한 건 평범한 가족이었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계시는 일상에 있다는 걸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은 그저 자기 일을 보러 나가는 여성이다. 클러리서 댈러웨이를 비범하게 만드는 건 그녀 내면의 삶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도 이를 알고 있었다. 에마 보바리와 샤를 보바리는 곤경에 처한 평범한 사람이다. 포크너는 "자신과 충돌하는 인간 내면의 문제만이 좋은 글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박동하는 심장이라면 필히 내재하고 있을 이런 충돌을 조명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독자에게 공감하고, 하나 되는 감각을 갖고, 발견하게 해주므로. 여기서 우리는 개별성에서 벗어나 인간됨이라는 일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문학이 주는 가장 큰 위안을 얻는다. (175)


나는 제이콥이 자기 부모를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기를 바란다. 하루 하루가 다르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 집에서는 축제 아니면 기근이다. 이 모든 일들이 아이가 커서 생선가게 주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할지도 모른다. 아이는 간절히 안심과 일관성을 바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누가 아이를 탓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이가 예술가라면, 재능과 갈망, 견디는 능력, 무엇보다도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를 융합할 수 있다면, 아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삶이 우리를 선택하니까. (252-253)


이 까칠하고 과민하고 교류에 서툰 사람들이 내 부족이다. 당신이 작가라면 당신의 부족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작가들 사이의 경쟁과 질투라는 걸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다. 우리는 다른 이가 아닌 자기 자신과 경쟁하고 있다. 낭독회나 컨퍼런스나 온라인에서 서로를 만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낯선 존재를 희망을 갖고 인지한다. 우리는 우리가 같은 종족의 구성원이며 살아남으려면 다른 이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비록 혼자서 글을 쓰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일종의 협업이다. (259-260) 


나는 계속 글을 쓸 거예요. 글쓰기는 나를 구원했습니다. 이 장엄하고 분란한 존재에게 활짝 열린 창문이 되어주었고, 내가 손에 쥔 모든 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되어주었지요. 글쓰기는 나를 아늑함과 안전함 너머로, 자기 인식의 한계 너머로 몰아붙여 내 이해 능력을 확장시켜주었습니다. 내 마음을 누그러뜨렸고, 지성을 강화했어요. 글쓰기는 특권이었지요. 내 엉덩이에 채찍질을 해댔고요. 내가 귀중한 명철함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날마다 고통, 무작위, 선한 의지, 운, 기억, 책임감, 친절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내가 그러고 싶건 아니건 말이죠. 글쓰기는 내가 성장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진화해야 한다고요. 더 나아지라고,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몰아붙였죠. 글쓰기는 나의 병이자 약입니다. 내가 겪었던 상실들을 견디게 했고 상실들의 대안이 되어주었죠. 어떤 패턴을 찾아낼 때까지 내가 느꼈던 어떤 혼란을 조금씩 사라지게 하면서요. 아주 가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나를 자랑스럽게 여겼을지도 몰라.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머니를 이해시킬 수 있는 단어를 찾아냈을 수도 있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바꾸고 있어. 나는 죽은 자와 산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에게 손을 내밀고 있어요.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래요,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있습니다. (31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