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15

제주, 여행의 끝

7시가 조금 넘어 일어난 나는 동네를 산책하고 싶어 리코만 챙겨 숙소를 나섰다. 벌써 숙소 스텝들은 아침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한 시간 가량, 천천히 동네에 난 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고 분위기에 생각을 맡겼다. 언젠가부터 나는 중산간 마을을 떠올리기만 하면 비극이란 단어를 습관처럼 옆에 붙여두곤 했는데 이번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자연사랑미술관, 옛 가시리초등학교

숙소 근처에는 폐교된 학교에 어떤 미술관이 들어서 있었는데 정문 앞에 보니 학교에 대한 이력이 작은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거기엔 가시리초등학교가 4.3 때 폐교되었다가 다시 문을 열었지만 학생 수가 줄어 십여 년 전에 인근 한마음초등학교와 통합되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그렇다. 중산간 마을에서 내가 비극의 기운을 떨칠 수 없는 건 바로 4.3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제주의 풍광에 매료되고, 그것을 즐기기에 앞서 제주가 오랜 시간 지니고 있는 고통스러운 역사에 먼저 관심을 기울이고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주를 올바로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게 도리고 순서다. 
숙소에 돌아와 숙소에서 준비해준 아침으로 팬케이크와 요거트와 커피, 차를 먹고는 씻고 숙소를 나섰다. 나올 때 숙소 여주인이 잠만 자고 떠난다며 아쉬워했으나 이미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움직여야 했다. 너븐숭이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날씨는 그럭저럭, 한적한 도로를 달려 닿은 너븐숭이는 작년 가을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 발길이 거의 미치지 않고 있었다. 그곳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동측 일주도로에서 좌회전하는 신호를 만들고 안내판을 설치하면 훨씬 나아질 텐데, 쾌적한 도로 운영을 위해 아마도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애초에 너븐숭이를 만든 목적이 반쯤은 상실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념관을 만드는 목적이 무엇인가. 더군다나 제주에서 4.3에 대한 떠올림이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고 그래서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현 상태의 접근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기념관에 들어갔더니 사무실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반갑게 맞아주시더니 전시관 관람을 먼저 할 것인지, 13분짜리 영상을 먼저 볼 것인지 묻길래, 영상을 먼저 보겠다고 했더니 기꺼이 디브이디를 틀어주셨다. 개괄적이면서도 심플하게 만들어진 영상을 보고 자리를 뜨려 했더니 할아버지께서 붙잡으신다. 그러면서 4.3사건의 전개과정, 그리고 북촌리 마을의 비극에 대해 알기 쉽게,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셨다. 사실 위주로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을 전달하려고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동안 제주인들 내부에 공공연히 쌓여 왔던 울분이 깊이 내재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랜 시간 동안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던 말 못 할 비극에 대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것이 마지노선이었다. 사실 제 가족을 모두 잃은 슬픔에는 무작정 하소연을 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런 삭힘이 몸에 배어 있는 그 모습에 어떤 위로나 추모의 마음도 보잘것없이 여겨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전면적으로 나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국가의 역할, 지난 횡포, 책임과 무책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정책적으로 뒷바침을 해 줘야 한다. 그게 인간된, 그러한 인간 집단이 모인 나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정부가 할 일이다. 


순이삼촌 문학비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와 애기무덤과 순이삼촌 문학비 일대를 천천히 걸으며 다시 한 번 제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부 삼신인이 벽랑국 세 공주와 연을 맺어 후손을 낳고 농사를 일구며 탐라라는 나라를 세우고, 몽골의 침입에 끝까지 대항하다 결국 속국이 아닌 직접 지배로 귀결된 오랜 역사, 조선 시절 횡포에 가까운 과도한 공물 착취, 수많은 지식인들의 유배지, 제국주의 일제의 야욕에 곳곳이 구멍 난 시리도록 아름다운 섬나라, 이제는 동북아 힘 겨루기의 지리적 요충지로 해군기지가 건설되는 안타까운 제주, 그러한 제주에 대해서 말이다. 
너븐숭이를 무거운 마음으로 떠나 곰막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가까웠고 바다와 바로 인접해 있었다. 식당은 월요일이라 그런지 한적했고 서빙하는 아주머니는 친절했다. 활어회와 회국수, 활우럭탕과 맥주 한 병을 시켜 배부르게 먹고는 우리가 가고 싶어 했던 카페 달빛봉봉베란다로 향했다. 그런데 미리 알고 있던 주소와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주소가 달라 긴가민가하며 미리 알고 있던 곳으로 차를 몰았는데 아니나다를까, 카페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차피 복불복이라 생각하고 간 길이었으니 미련 없이 엑셀을 밟아 삼성혈로 갔다.

삼성혈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들르려고 했던 곳인데, 첫날 아침식사 때문에 동선을 반대로 잡았더니 결국 마지막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야속한 비행기 시간으로 인해 20분에 불과했다. 게다가 전시실에서 상영하는 영상이 13분. 영상을 다 보고나니 울창한 숲길을 산책할 시간은커녕, 둥글게 쳐진 울타리 너머로 멀리 보이는 삼성혈을 보고 떠나기 바빴다. 삼성혈.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의 신화를 간직한 곳. 그게 어느 정도의 허구를 지닌 역사적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비의 섬 제주는 그런 식으로 곳곳에 신비로움을 가득 안고 있다. 앞으로도 제주를 꾸준히 찾겠지만, 올 적마다 그러한 제주의 오랜 이야기들을 들으러 발품을 아끼지 않고 다니고 싶다. 
렌트카를 반납하고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 티켓팅을 했는데 어처구니없게 나란한 좌석이 남아 있지 않아 앞뒤로 앉아야 했다. 비행기는 연결 문제인지 뭔지, 한 시간 가량 지연되어 김포에 도착하니 이미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롯데리아 햄버거를 먹으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 無가 공항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 나도 돌아서 공항전철을 타러 지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끝이 났다. 문득 제주로 가는 쉼 없이 흔들리던 비행기와 궂은 날씨에 결국 번쩍하며 번개까지 맞았던 순간이 떠오르며 슬몃 웃음이 났다. 우리는 언제 또 제주를 찾게 될까. 하지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제주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2014. 7. 21. FIN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에 가더라도 용눈이오름은 먼저 시야에 두고 가고 싶었다. 그런데 우린 용눈이오름에 오르기로 했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소들은 분주하게 무리지어 다니며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작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직 해는 떠 있었지만 이미 서쪽 하늘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하긴 우리가 도착한 시각이 벌써 6시가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니 천천히 오르면 능선쯤에서는 석양을 볼 수 있다는 계산이 쉽게 나온다. 





완만한 동선을 따라 아주 느긋하게 걸었다. 가는 방향 멀리엔 한라산이 왼편으로는 용눈이의 능선과 멀리 성산일출봉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측으로 돌아보면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이 부동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발걸음을 서두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가을에 왔을 때에는 억새가 그곳의 정취를 만끽하는 데 일조했는데 이번엔 푸름이었다. 여름 한가운데의 푸름들, 가을에 자리를 내주기 전의 푸름들은 말 그대로 푸르렀다. 바람이 조금 불었던가. 너도나도 사진을 많이 찍으며 발걸음을 더욱 느리게 붙잡았다. 어느 부부는 웨딩 촬영을 하는지 소들이 이리저리 풀을 뜯어먹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더니 기어코 그들이 관람로를 점령했다. 어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어떤 어른은 재밌다고 연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우리는 동선을 조금 벗어나 동편 언덕에 오르는 여유를 부리며 풍경을 만끽했다. 더 만끽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시간을 더디게 쓰고 있었다. 
드디어 능선에 다다랐는데 소들이 언제 능선까지 점령했는지 풀을 뜯는 소들과 무엇이 그렇게 간지러운지 푯말지주에 죽어라 목을 긁어대는 소들로 마치 장날 시장에라도 나온 듯한 북적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새 해는 점점 멀어져 우리의 눈높이를 낮추고 있었다. 동시에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갔다. 하지만 내 시선을 거듭 사로잡은 건 다랑쉬오름도, 지는 해도, 멀리 일출봉과 우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 먼 바다 - 수평선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주섬의 중심 한라산이었다. 백록담이 있는 한란산 주봉의 실루엣이 오름에 오르는 내내 시선을 사로잡더니 기어코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을 내 작은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발상이고 시도이지만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찍었고 그럴수록 한라산의 신비로움만이 액정에 어렴풋 드러났다. 







능선을 반쯤 돌았을까, 해가 지자 금세 어두워진 주위 탓에 어느덧 모두들 내려가고 능선엔 우리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마 타이밍이 필요했다고 하면 이때였으리라. 초생으로 가고 있을 그믐이 우리 눈앞에 나타날 타이밍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 모든 게 좋았기 때문에 더는 우리에게 무엇도 필요치 않은 듯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울 건 없었다. 이미 가득해진 우리 마음과 감성은 그것이 더해졌다면 넘쳤을지도 모른다. 
가장 높은 능선에 도달하니 이제는 어둠이 금세 안개와 함께 주위를 애워쌌다.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꼈다. 다랑쉬오름은 분화구로 구름을 빨아들이고 있었고 이제껏 잘 보이기만 했던 조금 멀리 있는 모습들은 모두 사라지거나 아련한 불빛으로 바뀌었다. 바다로 다가갈수록 불빛이 많아졌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우리도 아이폰 플래시를 켜고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크게 서두를 수 없었던 건 동선에 수두룩했던 소똥 때문이었다. 이제는 거의 사위가 캄캄해졌고 우리는 내려와 자동차에 앉았다. 어느새 별이 내려앉았다. 별이 내려앉고 귀뚜라미가 쉴 새 없이 울어대는 마당에 급하게 출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속삭임에 가까운 엷은 대화로 시간을 하염없이 축냈다.  


2014. 7. 21.

2014/08/13

의외의사실

얼마 전, 언니네이발관 홈페이지가 먹통이 되었었다. 단순히 도메인이 만료되었을 거라 쉽게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다시 열린 홈페이지에서 이석원의 일기를 보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작년 늦은 여름 무렵, 이석원의 블로그에서 그가 보석 같은 공간이라 표현한 일러스트레이터 김준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 순간 내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기억. 
이석원이 인사동 쌈지길에서 <쌀롱 드 언니네이발관>이라는 가게를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알고 가려고 했을 때는 이미 가게 문을 닫은 후였다. 이발관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이석원이 어떤 계기로 인해 가게를 접고 앨범 작업에 몰입해 그들 앨범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가장 보통의 존재>를 발표하였다고 하는데, 내 머리를 스치는 기억은 그 계기라고 하는 것이 바로 김준의 블로그에서 어떤 자극을 받은 거였던 걸로 남아 있다. 이 기억이 반대로 이석원의 블로그에서 김준의 블로그를 알게 되면서 불현듯 떠올랐는데, 그래서 나의 어렴풋한 기억을 다시 확인하고자 아무리 구글링을 해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발견한 것이 지금은 닫힌, 이발관 홈페이지에 있는 <의외의사실> 페이지였는데, 그곳에는 김준이 한동안 이발관 홈페이지 대문에 실린 그림 작업을 하면서 그린 그림들이 많진 않았지만 가벼운 빛을 내며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의 반가움이란. 
왜냐하면 이석원의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김준의 블로그에서 나는, 언뜻 크게 보이진 않지만 실로 대단한 파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그림들의 가늘고 감각 있는 선과 무엇보다 짧게 남기는 문구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또한 블로그와는 별도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남기는 독서일기는 나의 독서취향과도 너무나 흡사해서 정말 많이 놀랐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독서일기도 거의 매일 살펴보게 된다.  
그때 이석원이 김준의 블로그를 소개한 건 그가 매년 한 해 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 전시하는, 이름하여 <의외의사실> 전시 소식이었는데, 계동에 있는 자그마한 한옥 ‘고방’에서였고 2012년 동안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래서 <2012년의 의외의사실>. 그날 나는 성북동에 갔다가 성곽을 타고 와룡공원을 거쳐 삼청동으로 내려가 계동으로 갔다. 그리고 드디어 중앙고등학교에서 조금 내려오다가 오른편에 있는 ‘고방’에 들렀는데, 그의 그림들이 대체로 내게 전해주는 감동, 그러니까 ‘확’이 아닌 은근한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방금은, 이발관 홈페이지에 있는 <의외의사실>을 다시 보려고 구글링을 하다가 재밌는 걸 찾았는데 이석원이 2008년에 쓴 일기였다. 거기엔 이석원이 5집 <가장 보통의 존재>에 실릴 곡 중 한 곡의 가사를 완성했는데 그 곡에 <의외의사실>이란 제목을 붙이고 싶어서 김준 씨에게 괜찮겠느냔 의사를 물으며 가사를 남겨놓았고, 실제 발표된 앨범에 <의외의 사실>이란 곡이 실려 있다.


하지만 재밌는 건, 김준의 블로그를 쭉 뒤지다 알게 된 사실인데, 올해로 사용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는 블로그의 제목 <의외의사실>을 김준 씨 역시 영국의 소설가이자 버지니아 울프와도 어울렸던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소설에서 발견하였다는 것.
이석원이 <쌀롱 드 언니네이발관>을 운영할 때 그곳에도 김준 씨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없어진, 사실 어디를 가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불특정한 많은 것들이 그냥 그리워지는 새벽이다.

게스트하우스, 타시텔레

타시텔레, 가시리, 표선면, 제주

멋진 숙소다. 이곳이 멋지다고 단정짓듯 말하는 건, 이곳의 위치 때문이다. 한적한 중산간 마을에 동네 고유의 정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다르게 말하면 대체적인 게스트하우스의 분위기가 아닌 원래 이곳에 오래 있었던 느낌이 가득 전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제주 특유의 돌담으로 둘러져 있거나, 제주 바람 때문에 건물들이 바짝 엎드려 있거나 하진 않다. 대신, 타시델레 블로그에 따르면, 이곳은 주인장들이 손수 만든 곳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마당 한켠엔 목재들이 수북이 쌓인 곳도 있었고, 각각의 건물이나 내부 곳곳은 전문가의 손길이 미친 정교함보다는 나름의 정성이 엿보이는 구석이 많았다.
두모악을 나와 광동식당에서 생소금구이 3인분(4인분 같은)에 맥주 한 병을 나눠 먹었다. 고기는 튼실했고 껍질은 야들야들했다. 그래서 먹는, 씹는 맛이 아주 충실했다. 두루치기도 먹고 싶었지만 욕심은 금물, 이미 고기 3인분에 밥까지 먹은 것도 과했다. 제주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하시는 아주머니의 인심은 따스하고 편안했다. 인심이 편안하다. 그런 게 있다. 장사라는 속성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일정 부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보다 원래 친근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분이셨다. 여튼, 맛있게 고기와 밥을 먹고 실컷 부른 배를 식히느라 식당 밖에 있는 마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적당히 쉬었다.
그러고 나서 타시델레로 이동을 했는데, 목적지가 가까워지며 주위를 둘러보니 동네 분위기가 너무 아늑하고 좋았다. 게스트하우스 건물들도 자연스럽게 자릴 잡고 있었고, 체크인을 하러 들어간 공동 공간인 주방과 카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너무 배가 부른 탓인지, 동네나 게스트하우스를 둘러보기는커녕 졸려서 둘 다 침대에 뻗어 두 시간을 내리 자버렸다.


2014. 7. 20.

2014/08/09

카페를 나와 돈암시장에 있는 돈암순대에 들러 저녁 겸 김밥과 순대 그리고 같이 내주는 우거지국을 먹고 된장을 끓일 요량으로 두부 한 모를 샀다. 빨리 걸을 수도 없을 뿐더러 시장의 좁은 골목이었기에 천천히 걸으며 이리저리 둘러본 시장 곳곳은 생의 활기 - 차이는 있겠지만 - 로 가득했다.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도 바람이 몹시 불어댄다. 벌써 가을의 문턱을 두드리기라도 하듯 반바지와 반팔을 입고 있지만 어쩐지 마음과 기분은 여름보다는 가을에 더 가깝다. 
집에 들어와 코타로 오시오의 앨범을 틀어놓고선, 돈암시장에서 사온 두부를 냉장고에 넣으려고 비닐봉지를 옮기는데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돈암순대에서 밥을 안 먹고 왔더라면 조금이라도 잘라 먹었을 텐데, 배가 불렀다. 
그런데 물에 담궈 냉장고에 넣으려고 아직 따뜻한 두부를 만지는 순간 정릉에 살던 때 생각이 났다. 정릉에 있는 집에 가려면 돈암역에 내려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야 했는데, 저녁 무렵 정릉 버스정류장에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면 꼭 그 자리에 두부를 파는 분이 계셨다. 그곳에서 한 번도 두부를 산 적이 없었는데 지금 불현듯 떠오른 기억은 어느 늦은 날, 그날도 두부장수는 있었고, 그 옆에 자전거를 타고 딸을 마중나온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를 가벼운 바람으로 밀치듯 스쳐간 교복 입은 여학생은 아버지에게 미소를 보이며 자전거 뒷좌석에 살며시 앉았다. 그 모습을 므흣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버지는 “출발한다, 꽉 잡아.”라는 말과 함께 힘차게 발을 차며 자전거를 출발시켰다. 행복해 보이던 부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아직 학생이었음에도 처음으로 딸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되풀이하는 기억들이란 대체로 이런 식으로 떠올려지고,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고정된 사물, 인상적인 맛, 포근했던 장면, 유독 푸르렀던 어느 여름날… 이를 상징적으로, 마치 기호처럼 풀어낸 작가가 프루스트가 아닐까. 그의 아름다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이 마들렌 조각이 든 홍차를 입에 가져간 순간 콩브레에서의 추억을 시작으로 온갖 개인의 역사를 떠올렸던 것처럼 나 또한 시장에서 산 따스한 두부 한 모에 손을 댄 순간, 정릉에서의 살 적 기억이 거대한 파도처럼 달려들어 뒷걸음치게 했다. 반가워라, 나의 옛 시절.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4/08/08

감성은 다치지 않았기에

일어나니 몸이 무거웠다. 가슴이 쑤시는 게 거동은 불편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딱히 지난 밤보다 더하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예정대로 제주로 여름 휴가를 떠나는 누나 가족과 동행을 해서 김포공항까지 간 다음 차를 몰고 수원으로 출근을 했다. 
그런데 오전에 근무를 하다 보니 확실히 행동반경이 제약적이었다. 몸이 통증을 호소하며 조금이라도 상체에 힘이 들어가는 행동을 거부하고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점심을 먹고 근처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원장이 둘 있는 병원은 북적북적했다. 로비에 있는 티비에서는 류현진 선발경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느낌상으로,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내 이름이 차트를 든 간호사에 의해 호명되고, 원장실로 들어간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어젯밤, 욕실에 들아가다가 미끄덩, 넘어졌는데 오른쪽 가슴 부위에 먼저 충격이 가해졌고 이후 숨이 막히는 듯하고 힘이 들어갈 때마다 통증을 느낍니다. 

라고.
그랬더니, 원장은 혹시 ‘뚝’하는 소리를 듣진 못했냐고 물었으나 그런 소리는 생각해보지 않았고 들은 것 같지도 않았으며 가슴 부위의 충격 때문에 숨이 턱 막혔던 당시의 고통만 생각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엑스레이를 일단 찍어봅시다, 는 원장의 말이 끝나자 다시 밖으로 나왔더니 이번엔 금방 내 이름이 호명되어 엑스레이를 찍었다. 앞으로 한 번, 뒤로 세 번 정도. 
다시 원장실에 들어가서 같이 엑스레이를 보는데, 원장은 입으로 웅얼거리듯 수를 헤아리더니, 한 곳을 가리키며, 여기, 7번 갈비가 골절됐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아직 금은 갔지만 엑스레이로 드러나지 않은 갈비가 있을 수도 있으니 일주일은 특히 조심히 지내고 나흘 뒤에 다시 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보호대와 주사, 5일치 약을 처방해 주었다. 
우울했다. 나는 엑스레이를 제대로 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의사의 말에만 신경을 썼다. 그의 말에서 지나치게 많은, 그러니까 골절된 갈비뼈가 온전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인지가 내겐 중요했다. 엑스레이는 봐도 내 눈엔 다 같아 보였다. 내가 인지하거나 느낄 수 있는 건 상체에 힘이 가해질 때마다 전해지는 피하고 싶은 통증이었다. 
주사를 맞고, 가슴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병원을 나서자마자 있는 약국에 들어가 처방전을 내고 약을 받고서는 사무실로 다시 오르는 길이 버겁기만 했다. 화창한 하늘과 햇살이 왠지 나에겐 야속하게 생각되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팀장, 과장에게 상태를 얘기하고 조퇴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50킬로미터나 되는 통근거리는 확실히 끔찍했다. 과천-의왕고속도로를 타고 한적하게 달리던 길은 양재 부근에 이르니 조금씩 정체되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에 올라 느리게 달리다가 양재와 서초를 지나니 길이 풀렸다. 그리고 한남대교에 들어섰는데, 정면으로 마주한 남산과 왼편 일대의 연립주택이 빽빽하게 들어붙어 있는 한남동 일대가 옅은 빛깔의 하늘과 가득한 구름들과 어우러져 놀라운 풍경을 선사하고 있었다. 문득 곁을 스치는 한남대교 전망카페에 앉아 있는 이들이 배가 아플 정도로 부러웠다. 하지만 차를 세울 수는 없었다. 단지, 감탄만 하는데도 가슴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2014/08/06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이곳은 내가 다녀갔던 작년 가을보다 더 유명해졌나 보다. 김영갑 자신은, 이곳이 대중적인 곳이 아닌 오고자 하는 사람만 찾는 곳일 거라고 했지만 이미 이곳은 제주 그 어느 곳 못지않게 대중적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불러일으키는 감흥마저 대중적으로 변질되어 내게 와 닿지는 않는다. 감흥은 거의 그대로이나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다. 작년 가을, 내가 무인찻집에서 느꼈던 고요와 침묵의 명상은 안타깝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효하지 않다. 무인찻집이 무인이 아니기 때문이고 클래식라디오 볼륨이 거슬릴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좋다. 그 외 모든 건 그대로이기 때문에. 

김영갑 선생은, 일찍이 20대 때 제주에 미쳐 매해 수없이 제주를 드나드는 걸로 모자라 기어코 제주에 둥지를 트고 기인 같은 행색으로 평생을 제주 중산간 지역을 사진으로 담아내다가 루게릭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진정 제주를 사랑한 분이다. 
이곳 두모악갤러리에서 그의 사진을 보고 당장에 용눈이오름으로 달려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감흥 그대로 제주의 진정한 살갗을 볼 기회를 안타깝게도 놓치는 셈이 된다. 그가 담아낸 제주의 중산간 일대와 특히 많은 애정을 쏟은 용눈이오름에서 제주의 아름다움을 볼 시간을, 제주를 찾는 누구든 누려보기를 나는 바란다. 


2014. 7. 20. 두모악 (유)무인찻집

아침 산책, 성산 일출봉

섭지코지에서의 아침 산책

안도와 제주의 담을 잇는 정낭


상대적인 시간의 법칙에 따라 제주에서의 시간이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다. 오늘은 일요일. 내일이면 3박 4일의 일정 모두 끝이 난다. 
아침이다. 배고픈 상태에서 느긋하게 아침 산책을 했고 안도 타다오가 디자인한 건축물 두 개를 보고 왔다. 그리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자연, 성산 일출봉을 마주했다. 고희범의 책에 따르면, 성산 일출봉은 지금도 침식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제 모습을 잃고 완전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터.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은 성산 일출봉뿐만 아니라 우릴 둘러싼 세계를 모두 변화시키기에도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갑자기 엊그제 우크라이나 동부 상공에서 일어난 민항기 추격 사건이 생각난다. 현재까지 밝혀진 상황으로 보건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인데, 하긴 단순히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것으로 따지자면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 또한 같은 맥락일 것이다. 끔찍한 무력 분쟁의 끝은 결국 무수한 관련 없는 사람들의 희생만 자초할 뿐이다. 친 러시아 파이자 현 우크라이나 정부 반군 세력이 미사일로 추격한 것으로 보이는 이번 민항기 사건은 너무나도 뚜렷한 예이다. 과연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무슨 낯으로 민주주의를 말하고 평화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끔찍하고 비극적인 일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다. 
어제보다 흐린 날씨는 이곳 섭지코지에서 가까운 성산 일출봉을 보기에는 괜찮지만 어제의 한라산은 온데간데 없다. 하지만 아침을 걷는 기분은 언제나처럼 흐뭇했다.





2014.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