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8

2016년 겨울의 제주



새벽 다섯 시 반. 잠에서 깼는데 
커튼 너머로 아침의 여명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커튼을 걷고, 거실의 덧창도 활짝 열어젖혔다.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 등 뒤에서 떠오르려는 태양이 하늘은 조금씩 밝게, 
한라산 주위로 이어지는 능선은 더욱 선명하게 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여명이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 
벌써 제주에 닿으려고 하는 항공기들이 드문드문, 여명의 분위기를 더했다. 
아침의 신비로운 여명은 부지런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 
게으른 우리에겐 행운이었다. 




모슬포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날씨가 어찌나 좋은지
쾌한 날씨와 넉넉한 햇빛에 비친 제주의 모습이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게 하지 않아
일단 송악산 둘레를 산책하기로 하고 해변을 따라 차를 몰았다. 
내내 시선에 잡히는 송악산과 한라산, 그리고
푸른 하늘은 매순간 가슴을 벅차게 했다. 
하지만 송악산으로 믿고 있던 산은 알고 보니 산방산이었다. 




비양도에 그 무엇이 시선을 끄는 경우는 드물었다. 


+

보말죽 한 그릇을 먹고, 비양도 섬 한 바퀴 산책을 했다. 
제 머리를 드러내지 않은 한라산은 신비로워 보였고, 
수평선과 높이를 같이 하는 해안가에서 시나브로 오르기 시작해
중산간을 지나 여럿 오름을 거쳐 한라봉에 이르기까지의 아름다운 모습은
왜 제주섬 전체를 한라산이라 해도 무방한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몸은 비양도에 있었지만 시선은 제주본섬에 머무르며 산책을 이어갔다. 
과연 그런 걸까, 
사람도 한 발 물러서서 보았을 때 좀 더 잘 볼 수 있게 되는 걸까?


윌리엄 트래버, <여름의 끝>

마을 사람들은 라스모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 마을을 뜨는 쪽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더블린이나 코크나 리머릭으로, 잉글랜드로, 어떤 이들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수가 되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 또한 과장이었다. 
윌리엄 트래버, <여름의 끝>, 민은영 옮김, 한겨례출판, 2016

트래버의 소설은 처음이다. 트래버도 처음이다. 이로써 아일랜드 작가 한 명을 더 알게 되었다.
<여름의 끝>은 짧고 차분한 소설이다. 평온한 주말, 오후의 볕을 따사로이 받으며 읽었으면 단숨에 읽을 법도 했을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기에 '불완전한 환경'에서 독서를 이어가다 보니 오래 걸렸다.
소설의 배경은 아일랜드 라스모이. 소설의 차분함은 배경에서 기인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말하는 건 왠지 피상적이다. 엘리의 사랑은 코널티의 아픔으로 연결되고, 아픔이란 궤도에는 딜러핸도 올라 있다. 엘리의 사랑은 플로리언의 사랑과 어긋나 있되 그 어긋남은 미련일 수 있고, 그렇기에 결국 소설의 제목인 끝은 뭉퉁하다.
소설의 분위기란, 그래서 배경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비쳐 나온다. 읽는 동안 나는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할 때가 있었다. 왜? 지금 내가 머무르는 곳의 계절이 소설의 계절과, 소설의 이야기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의 매서운 추위가 이야기를 더욱 오롯하게 하는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은근함을 좋아하는 내게 이 소설은 작가만큼이나 반가워야 할 터이나, 계절을 조금만 당겨놓았으면, 하는 생각에 책장을 덮고도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조금 더 은근함을 남겨두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