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29

마탄사스의 석양은 핑크빛

다시 돌아올 아바나를 아침 일찍 산책하며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아침은 대체로 고요했지만 이른 바다는 짙은 색을 띤 악마의 모습으로 포효하고 있었다. 말레콘 너머 바닷길을 따라 20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엔, 독재자 바티스타를 몰아낸 1959년 쿠바 혁명 후 오랫동안 쿠바를 어쩌지 못해 아등바등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가 거대한 숨을 토해내고 있다.

적게는 60여 차례, 많게는 6천여 차례에 달한다는 CIA의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 기도는 이미 식상한 스토리이고, 60년대 초반 아바나 항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상선을 폭파한 이래로 심심찮게 유사한 종류의 테러가 있어왔다. 70년대에는 쿠바 국적의 민항기가 폭탄 테러로 추락했고 90년대에는 북부의 해안도시인 카르데나스에 무장 게릴라들이 침투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아바나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고 1997년에는 아바나와 바라데로의 호텔과 식당, 나이트클럽 등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 이런 테러에는 주로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들을 앞세우고 있지만 CIA와 마이애미의 반카스트로 조직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 유재현, 강)

동네 골목길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숙소로 돌아가 까사 주인 아주머니가 끓여준 커피를 마시며 떠날 준비를 했다. 어디로 가냐고 묻길래 마탄사스에 간다고 했더니, 기차역과 터미널에 전화를 걸어 시간을 알아봐 주셨다. 기차는 없다고 했고 버스를 타야 한다며 알려준 아주머니의 친절에 마음이 후텁해졌다.

숙소 주인 부부, 아바나
아침의 갈림길, 아바나, 쿠바, 2007

늘 그랬듯, 터미널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보이는 낯선 풍경을 로모에 담으며 여유를 부리다 보니 의외로 제법 많이 걷게 됐고 조금 더워져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한 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했더니 당최 알아듣질 못하는 거였다.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상점 주인 뒤에 있는 냉장고 문을 직접 열어젖히며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고는 계산을 치르려 했더니 그제서야 주인은 아, '엘라도(helado)'하며 미소를 짓는다. 

에스파뇰에는 명사, 대명사, 형용사, 관사에 성(性) 구별(別)이 있는데, 명사를 예로 들면 주로 남성명사는 'o'로, 여성명사는 'a'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친밀한, 친구란 뜻을 가진 amigo(a)가 그렇다. 나는 쿠바를 여행하는 내내 아미고와 치노(Chino, 중국사람)란 말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비아술(Viazul)을 타고 아바나를 빠져나가며, 도로에 진을 치고 있는 수많은 히치하이커들을 뒤로 하며 다시 돌아올 때를 기약한다.

쿠바의 버스는 비아술과 아스트로가 있는데, 비아술은 관광객 전용 버스로 유명한 도시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렌트를 하지 않는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이용할 수밖에 없는 버스다. 그리고 아스트로는 비아술과 대비되는 로컬버스인데 내가 갔을 때만 해도 관광을 목적으로 한 외국인은 탈 수가 없었다. 아바나에서 곧장 비아술을 탄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혼자 있는 시간은 스스로를 비춰주는 거울 앞에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마탄사스에 도착해 고즈넉한 길을 걸으며 우선 숙소를 잡기로 한다. 하지만 아바나에서처럼 론리에 소개된 숙소는 모두 방이 없었고, 역시 아바나에서처럼 까사에 계신 분들의 도움으로 아늑한 가정집에 발코니가 딸린 작은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쿠바에서 호텔이 아닌 까사 빠티쿨라라고 불리는 가정집에 딸린 방을 구하는 건 간단하다. 그렇게 숙박을 치는 집엔 까사의 마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사 마크가 붙은 곳 외에도 숙박을 치는 곳이 의외로 많았고 마탄사스에서 머문 곳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가격은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대체로 비슷했다.

까사 마크, 바라코아

비아술을 타고 마탄사스로 들어오며 마주친 풍경들이 아주 운치가 있어서 산책하기에 제격인 곳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조금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충 방에 짐을 풀고 가벼운 차림으로 숙소를 나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저녁이 가까운 무렵의 오후가 되자 골목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한다. 어떤 곳에서는 이미 춤의 파도가 덩실덩실, 또 어떤 곳에서는 꼬마 아이들이 골목길 야구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멀리, 언뜻 비치는 빛의 색을 따라 닿은 곳에서는 석양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나는 석양을 보는 게 언제나 좋았다. 아마도 인도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그 마음은 인도 웬만한 도시 어딜 가나 있는 선셋포인트에서의 시간을 매일 즐겨서일 텐데, 일상에서는 그 무렵이 아련하기만 하다. 석양이 좋은 건, 물론 보기에 아름답기도 하지만 오후에도 저녁에도 속하지 않고 경계에, 비록 아주 잠깐이지만, 머무른다는 느낌 때문에 그렇다. 마치 여명이 그렇듯.
그렇게 석양에 넋을 잃고 있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더니 한 소년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미소짓는 소년, 마탄사스, 쿠바, 2007
마탄사스의 석양

+
쿠바를 그리워만 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정도가 지난 무렵 수첩을 뒤져 주소가 적혀 있는 곳 모두에 인화한 사진을 보냈는데, 아바나의 숙소 주인 부부는 잘 받아보았을까, 나를 기억은 하고 있을까?  


2014. 3. 29. 

2014/03/23

영화

철학자 들뢰즈는 단언적으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어떤 영화도 자기가 만들어진 대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영화가 던져진 역사로부터 벗어나고, 자기가 만들어진 땅을 떠날 때, 그 영화들의 대부분은 치매에 걸리게 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과 이야기에만 매달리게 된다. 자기를 영화 마니아라고 소개하는 분이 아는 게 영화밖에 없을 때 그분에게 영화를 설명하기는 매우 힘들어진다. 이건 경험적인 이야기이다.
어떤 영화에 대해서도 결론지으면 안 된다.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나빠도 그렇다고 결론지으면 안 된다. 긴 시간을 두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화를 본 다음 그 영화를 버리는 것은 영화에 대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사실 영화가 디브이디가 된 다음 영화를 버리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냥 버리면 된다. 그러나 자신이 버리는 것은 디스크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세상이라는 영화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지 말아야 할 행동 중의 하나는 영화에 별점을 매기는 것이다. 영화에 별점을 매기는 순간 그 영화는 그 점수의 단정적인 무게 아래 생각의 활동을 멈추는 것이다. 영화는 자꾸만 생각해야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다음 여배우와 하룻밤을 보낸 동수는 "생각을 더 해야 해,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이라고 말한다(홍상수의 <극장전>). 그렇다 생각을 더 해야 한다. 그것만이 영화를 보고 나서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당신이 생각을 멈출 때 당신은 영화를 본 시간만큼 사실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를 많이 볼수록 당신은 살아 있으면서 죽은 것이다. 그것이 남의 삶을 훔쳐본 영화의 복수일 것이다.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납량 특집이 어디 있겠는가? 당신은 죽으러 영화를 보러 가실 참인가, 아니면 그 유혹 속에서 살아서 버틸 것인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정성일, 바다출판사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 그는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그리하여 시는 어떤 가난 혹은 빈곤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힘, 그것이 시이다. 그 부정이 아무리 난폭하고 파괴적인 형태를 띤다 할지라도 그것은 동시에 꿈꾸는 건강한 힘이다. 그리하여 가난과, 그 가난이 부정된 상태인 꿈 사이에서 시인은, 상처에 대한 응시의 결과인, 가장 지독한 리얼리즘의 산물인 상상력으로써 시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배고파 울 때에 같이 운다든가,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는 것뿐이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소위 가장 건설적인 일은 꿈꾸는 것이 고작이며, 그것도 아픔과 상처를 응시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정의 거울을 통해 비추이는 꿈일 뿐이다.


<이 時代의 사랑> 최승자, 문학과지성사 

2014/03/15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아바나의 아침이 밝았다.
혁명박물관, 카피톨리오 등 아바나의 주요 볼거리들이 몰려 있는 센트로 아바나 지역은 다시 아바나에 돌아왔을 때 숙소를 그쪽으로 잡고 둘러보기로 했기에, 혁명광장에나 우선 들를 생각으로 숙소를 나섰다. 말레콘에 가까웠던 숙소였기에, 밖으로 나오자 잔뜩 흐린 날씨에 걸맞는 바람이 말레콘에서 잽싸게 불어오곤 했다. 아무 감각이나 알아봄 없이 눈에 띄는 식당에 가서 커피와 샌드위치, 생수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잔이 생각날 만큼 작고 앙증맞은 잔에 담긴 커피는 진한 맛을 냈고, 샌드위치는 전자렌즈에 반쯤 익힌 듯했다. 그런데 7페소(컨버터블을 말한다). 아바나의 물가를 여지없이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쿠바의 화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쿠바인(Cuban)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페소(peso)와 여행객들을 위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붕괴 이후 관광시장을 개방하며 만들어진 컨버터블 페소(Cuban convertible peso). 쿠바를 여행하다 보면 육안으로도 일반 페소와 컨버터블 페소를 쓰는 곳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두 페소 간 체감하게 되는 물가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컨버터블 페소는 거의 달러와 맞먹는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일반 페소는 그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싼 편이다. 처음엔 잘 모르는 상태에서 컨버터블로만 환전을 했었는데 여행을 하며 요령이 생겨 일반 페소도 넉넉히 환전을 해 경비를 아낄 수 있었다. 

아직 아바나의 아침은 생기가 돌기 전이었다. 하는 수 없이 말레콘을 서성이다 마눌루라는 낚시 청년을 만났으니, 별 통하지도 않는 대화를 억지로 해가며 함께 산책을 하다 괜찮은 곳이 있다는 녀석의 꾐(처음엔 몰랐다)에 들어간 곳에서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서나 나올 법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이미 그로 인해 분위기 하나는 끝내주는 인상을 풍기며 모히또를 팔고 있었다. 아, 모히또.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고는 한 잔 더 마셔도 되냐는 마눌루를 겨우 제지하며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혼자가 되고 보니, '당했군.'이란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그렇게 쿠바에서 처음 모히또를 마셨다. 기억도 나지 않는, 떨떠름한 맛의 모히또를. 

쿠바에서 처음 모히또를 맛보게 한 청년, 마눌루

Plaza de La Revolución 
혁명광장의 한쪽엔 체(Che Guevara)의 철골 모습이 인상적인 내무부 건물이, 건너편엔 거대한 호세 마르띠(José Martí)의 동상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앉아 있고 그 뒤로 메모리얼이 우뚝 솟아 있다. 메모리얼에는 전망대도, 체를 추모하는 공간도 함께 있다. 
호세 마르띠는 누구인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는 체 게바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쿠바에서는 시인 - 언론인 - 정치인으로서 에스파냐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쓴 진정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음을 쿠바 어디를 가나 쉬 알 수 있다. 이를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게 1페소짜리 지폐에 그려진 그의 모습이다. 1페소는 쿠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지폐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는 현재를 살아가는 쿠바인들과 늘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이 재밌게 생각됐던 건, 체 게바라의 경우 3페소 지폐와 동전에 그려져 있는데 1페소나 10페소 짜리에 비해 잘 쓰이지 않다보니 체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인기와 더불어 하나의 상품이 되어 버렸다. 나는 운이 좋게도(?) 산티아고에서 바나나를 사며 순진한(?) 상점 주인이 거슬러준 잔돈에 3페소 동전이 섞여 있었다. 물론 내가 순진한 것일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3페소 동전만 유통이 사라졌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아바나에서는 체 게바라 동전을 살 생각이 없냐며 묻곤 하던 쿠바인들이 몇 있었다.

체 게바라가 그려진 3페소 동전
호세 마르띠 메모리얼, 아바나, 쿠바, 2007
어디서나 기억되는 체 게바라
호세 마르띠 메모리얼 로비에 위치한 체를 위한 공간
호세 마르띠 메모리얼에서 바라본 베다도(Vedado)

Parque Lennon
레논 공원에 가기 위해 혁명 광장을 벗어나 걸음을 내딛었다. 아바나에서는 지도상으로 꽤나 멀어보이는 곳도 워낙 구역들이 잘게 나뉘어져 있어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레논 공원에 도착하니 우거진 나무가 한층 밝아진 날씨와 어우러져 소규모 숲처럼 아늑함을 주었고 곳곳에 비치된 철제 벤치는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띄엄띄엄 걷는 사람들도 보이고, 나 역시 오후의 여유를 만끽하며 공원을 거닐었다. 
그곳엔 공원 이름에 꼭 맞는 레논의 동상이 철제 벤치에 앉은 채로 있는데 어째 모습이 어색하다 했더니 어라, 레논의 트레이드마크인 안경이 없었다. 어리둥절해 하며 사진을 찍으려 로모를 꺼내 들었는데 어느새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오시더니 어라, 셔츠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는 게 아닌가. 허허. 할아버지는 말없이 표정이 없는 레논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살며시 안경을 씌우고는 나더러 레논 옆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내 카메라를 넌지시 가리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친절에 가득 밀려 나오는 웃음을 조금씩 나눠 뱉으며 슬쩍, 레논의 옆에 앉았다. 얼핏 보기에도 할아버지가 잡은 로모의 각은 치켜올라가 있었지만 말없이 그의 모습을 응시했다. 

레논 공원, 아바나, 쿠바, 2007
친절한 레논 안경 담당 할아버지

로모를 주인에게 되돌려준 할아버지는 다시 레논에게서 안경을 벗기고는 원래(?)의 위치인 그의 셔츠 주머니에 집어넣고 반대편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할아버지의 시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왠지 나는 비흡연자임에도 불구하고 시가 향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차마 한 대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가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이 손짓으로 그를 벤치에 앉히고는 사진을 찍어드렸다(미처 전해드리진 못했지만). 아침에 얼떨결에 마눌루에게 살짝 당한 분을 할아버지의 친절이 말끔히 해소해 줬다. 기분이 마구 좋아진 나는 황급히 달려 가까운 곳에 있는 가게에서 주스 두 개를 사 할아버지와 사이좋게 나눠 마시며 그 기분을 이어갔다. 

미리 생각했던 일정을 마쳤으나 아직 해도 지지 않았고 오후가 한 뼘 이상 남아 있었기에 공원에서 일기도 쓰고 책도 읽을 생각으로 한적한 공원 구석에 앉았다. 시간의 흐름이 눈앞에 보일 듯, 잡힐 듯했고 낯선 곳에서 느끼는 그런 기분을 나는 언제나 사랑하였다.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책도 읽고 졸기도 하며 있었는데 어느새 앞에 보니 백발의 노인 한 분이 앉아 계셨다. 할머니 역시 책을 읽고 계셨는데 곁에는 할머니와 아주 잘 어울리는 검은 개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이방인으로서 이방인을 도촬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금세 눈치챈 할머니는 나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표정의 미소를 지어보였고 나 또한 웃으며 검지 손가락을 들어 한 컷을 (더) 부탁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한참을 레논 공원에서 머무르다 왔던 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 말레콘을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어느새 저물어 있었다. 말레콘에, 아바나에 어스름이 닥치고 저녁이 찾아왔다.

Malecón, La Habana, Cuba, 2007

숙소에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주인은 들어오지 않았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문이 열린 다른 방에서 엎어져 쉬고 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주인이 들어와서 전혀 다른 열쇠로 문을 열어 주었다(내게 주었던 열쇠는 정체가 뭘까). 날이 밝으면 아침 산책을 하고 아바나를 떠난다. 어차피 쿠바를 떠나기 위해 다시 돌아와야 하므로 아바나에 처음부터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언론(심지어 구글맵까지)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La Habana)'를 영어 발음 그대로 '하바나'로 쓰는 경우가 많다. '빠리(Paris)'를 '패리스'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지만, 에스파뇰에서 'H'는 묵음이니 '아바나'로 부르고 쓰는 게 맞다. 대신 에스파뇰에서 'ㅎ' 발음은 'J'가 담당한다. 호세(José) 마르띠처럼. 참고로 쿠바를 대표하는 럼(Rum)인 아바나 클럽(Havana Club)은 수도 아바나와는 철자가 다르다.

아직 비우지 않은, 아바나 클럽

<노트에 남은, 말레콘에서의 생각>
요즘 같이 기류에 편승하는 시대에 자신만의 정체성을 간직한다는 건 드문일일 것이다. 말 그대로 비슷한 옷을 입고, 남들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않고. 자라면서 언제부턴가 아빠의 질문에, 또는 요구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뭔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지라도, 그 길을 직접 가보고 나서 내가 스스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우린 시간 맞춰 찍어내는, 틀에 박힌 거푸집에 의해 생산되는 덩어리 따위는 아니다. 어느 누구도 우릴 만들어낼 순 없다.
사실 여행, 독서, 산책, 사색. 이런 요소들이 더해지면서 나는 몰라보게 자신에게 변화가 왔음을 느꼈다. 얕지만 짧은 기간 채식도 시도해 보았고, 어느 곳이건 혼자 걸어보면서 스스로와 마주 할 수 있었으며, 자그마한 책에서지만 몇몇의 위대한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가장 크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실은, 나는 남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기존의 주변 사람들이 싫게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좀 더 내가 원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런 사람이고 싶다. 내 자신에게 무슨 큰 변화 따위를 주려고 이 짓을 하는 게 아니다. 여전히 이곳에서도 난 그저 평범하고 소심한 인간일 뿐이다. 난 그저, 여행이란 행위가 즐겁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온통 내겐 설익은 과일 마냥 떫은 맛뿐이다. 이런 곳을 걷는 게 좋을 뿐이고 이런 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무엇보다 짜릿하다. 예전에 인도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도 얘기했듯 난 그저, 그곳에 있는 게 좋을 뿐이다. 어떤 몽상가적인, 낯선 꿈을 꾸며, 여러 날을 헤매이자. 돌아갈 그날까지.
여기에서나 한국에서나 새벽은 내게 친숙하다.


2014. 3. 15. 
매년 1월 초에는 프랑크푸르트 근처, 노이-이젠부르그의 동부, 호이젠슈탐에 있는 중학교 체육관에서 기이한 축제가 열린다. 루프탄자 항공사 여객들이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은 여행가방을 경매하는 것이다. 경찰이 미리 수색하여 그 속에 무기나 마약, 혹은 시체 따위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다시 밀봉해놓은 가방들이다. 반면에 이 가방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닫아놓은 가방을 보여준 다음 그 무게만을 공개한다. 그러나 일단 구입이 결정되면 가방은 즉시 개봉되어 낄낄대는 관중들 앞에 그 내용물이 쏟아진다. 그야말로 도깨비상자다. 그것은 또한 사생활 속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가는 일이요, 많게든 적게든 내면적이고 시사적이며 잡다하게 뒤섞인 몇몇 물건들을 통하여 재구성한 한 운명의 발견이기도 하다.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설 연휴 동안 받아만 놓고 미처 읽지 못한 문예지를 뒤적이다가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 중에서 매우 이색적인 경매 이야기를 보고 혼자서 웃은 일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는 온갖 것을 다 경매에 부쳐서 잊혀진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이 이익을 보는가 하면 이미 죽은 사람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도 한다.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왕년의 스타의 연애편지나 착용하던 신발, 속옷 등속이 고가로 팔렸다는 해외토픽을 접하면 그걸 그렇게 비싸게 사서 어디다 쓰려는 걸까 공연한 걱정이 되기도 하고, 생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면이 드러난 편지가 공개되는 걸 보면 세속의 호기심은 저승길까지 마다 않고 쫓아다니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투르니에가 쓴 경매는 그런 큰 이익이나 세인의 호기심을 겨냥한 게 아니라 지극히 사소하고 유쾌한, 서민적인 축제 같은 경매에 대해서이다.

<잃어버린 여행가방> 박완서, 실천문학사




플래너리 오코너는 <단편 소설 쓰기>라는 소박한 제목이 붙은 에세이에서, 글쓰기란 발견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단편 소설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자기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자기가 보기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무언가를 쓰기 시작할 때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있을지 의심스럽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착한 시골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었다. 작품이 끝나기 직전까지, 자기도 그것이 어떻게 끝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녀가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쓴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나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거기에 대해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편 소설을 쓸 때 이런 방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나 자신의 결점이 드러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털어놓은 글을 읽고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글쓰기에 대하여> 레이먼드 카버, 안종설 옮김, 집사재

2014/03/02

그리고 아바나

벤쿠버를 거쳐 토론토 공항에서 제법 긴 시간을 기다려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토론토의 날씨가 아주 맑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커피와 머핀으로 주린 배를 조금 채우고 드디어 아바나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맨 뒷좌석. 한참을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창을 올리자 어느새 항공기가 아주 낮게 비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쿠바 대지 위를 날기 시작한다. 온통 푸른색으로 뒤덮인 대지 곳곳에 박힌 야구장이 '우리야말로 진정한 야구왕이지!'하며 너스레를 떠는 듯했다. 그리고 몸이 떨리는 진동과 함께 항공기가 호세 마르띠 공항에 착륙하자 기내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무사 착륙을 환호하는 이들의 '순수'가 아직 어리둥절한 내겐 신기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웰컴이었다.

(쿠바에서는 입국심사를 할 때 여권이 아닌 여행 내내 소지하고 다녀야 하는 별도의 종이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그리고 다시 쿠바를 떠날 때 그것을 반납하게 되는데, 이로써 여권상으로는 내가 쿠바에 다녀온 사실이 없는 셈이다. 그 종이를 사진에 담아두지 못한 나는, 쿠바가 그리울 때면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애쓰곤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박한 호세 마르띠 공항을 빠져나오자 열대기후 특유의 후텁지근한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졌지만 아바나의 공기를 채 실감하기도 전에 엄중한 시선으로 근무를 하고 있던 공항 직원이 택시를 잡아주었다. 여전히 '협상'에 익숙한 나는 제스처와 함께 요금 할인을 시도해 보았지만 'Down'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을 전혀 설득시키지 못하고 택시에 탑승, 이윽고 그윽한 엔진 소리를 뱉으며 택시가 출발하자 배기통에서는 반 세기 이상 묵은 매연이 뿜어져 나왔다.
택시가 베다도 지역으로 들어서자 호세 마르띠 메모리얼과 아바나 혁명광장, 그리고 그곳 건물에 걸린 철골 윤곽의 체의 모습이 쿠바에 왔음을, 이곳이 쿠바임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으나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믿기에는 모든 게 아직은 너무 낯설기만 했다.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고 만져야 했으며 느낄 수 있어야 했다.

혁명광장, 아바나, 쿠바, 2007

예약한 숙소도 없이 우선 지리적 균형감각을 찾기 위해 유명하다는 호텔 나시오날로 가자고 했고, 베다도를 관통해 멀리 말레콘이 시야에 들어오자 곧 호텔에 도착을 했다. 하지만 그곳에 묵을 생각은 없었기에 택시에서 내린 나는 곧장 돌아서 말레콘을 향해 걸었다. 우선은 그곳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고 조금씩 부서지는 파도의 부스러기가 피부에 와닿을 때의 그 느낌이 낯설면서도 기분을 좋게 했지만 제법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 때문에 말레콘에 걸터앉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숙소를 잡기 위해 론리에 소개된 몇 곳에 가봤지만 가는 곳마다 빈방이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까사' 마크가 붙은 곳을 찾아다니며 그곳 분들의 알음알음으로 겨우 방을 구했는데 너무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하나 같이 친절한 그들이었기에 가격 협상은 생각지도 않았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뻗어 내리 7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났더니 숙소 주인이 '한국에서 걸어왔냐며, 죽은 줄 알았다'고 우스개 소릴 하셨다. 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에 여전히 비몽사몽인 내게 Cuba라 적힌 론리만이 이곳이 다름아닌 쿠바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2014.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