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6

오후 세 시의 풍경

주말부터 이어진 두통 때문에 오전 내 느슨해져 있다가 점심을 챙겨 먹고 소파에 앉아 차가운 티를 마시며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는다. 오후 세 시가 되기 전까지의 오늘 하루 풍경. 어쨌든 이발을 해야겠어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30미터 정도 되는 곳에 미용실이 하나 있었다. 안을 슬몃 엿보고는 지나쳤다. 남성 한 명이 커트를 하고 있었고 동네 어르신 두 분이 소파에 앉아 계셨다. 시간이 걸릴 듯했다. 지나쳐 몇 걸음 가지 않아 생각을 바꿨다. 다녀봐야 헛걸음일 테고 아이들 데리러 갈 시간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면 손에 들고 있는 김정선의 <오후 네 시의 풍경>을 읽으며 기다리면 될 터였다. 돌아와 미용실을 문을 열고 "커트 많이 기다려야 해요?"라고 물으니 "금방 돼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행이다. 행운미용실.
살면서 단골이라는 개념은 늘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하지만 머릴 다듬는 행위만큼은 단골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친 적이 없다. 늘 미용실 가는 걸 불편해 했고 귀찮아 했으며 그러다 보니 집에서 가까운 기준으로 사는 곳에 따라 다닌 미용실이 바뀌었다. 서울에서 용인으로 이사오기 전에 삼선교 근처에서 다니던 미용실과 용인에서 광교로 다니던 미용실은 그나마 단골스러움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남한테 내 머리 다듬는 걸 맡기는 건 늘 어색해 했으면서도 박하향이 가득한 샴푸로 머릴 감는 건 개운해서 좋아했다. 그래서 한 때는 에쿠니 가오리 소설의 주인공처럼 샴푸만 하러 갈 수 있는 단골 미용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미용실 소파에 앉아 할머니 두 분과 티비에서 나오는 근대를 무치는 요리 방송을 보며 할머니들의 요리 간섭에 귀 기울이다 보니 금세 내 차례였다. 오후 세 시. 간단하게 내 요구를 전달하고 미용실 아주머니 표정만큼이나 편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데 오한 때문에 입은 긴팔 탓인지, 그냥 더위 탓인지 땀이 나기 시작했다. 가위로 삭삭 머릴 다듬던 미용사 아주머니가 한쪽으로 가시더니 선풍기를 가져와 내 몸에 씌워진 보자기의 다리 부분을 휙 젖히더니 다리 방향으로 선풍기를 틀어주신다. 시원하다. 인도에서나 보았던 벽과 일체로 된 누렇게 바랜 에어컨은 필요 없었다. 처서도 지나지 않았나. 가벼운 웃음이 났다. 머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 와중에도 소파에 앉은 할머니 두 분 중 한 분은 요리 방송에 말을 보태셨다. 다리로 들어온 바람이 상체 쪽으로도 이어지는지 온몸이 시원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발이 끝났다. 미용사 아주머니는 머릴 다듬는 동안 두 번 질문을 했다. 앞머리 괜찮아요? 구레나룻 괜찮아요? 아무래도 좋았기에 괜찮다고 대답했다. 안경을 안 써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앞서 커트를 한 남성의 경우 이발이 끝나자마자 지폐로 요금을 지불하고 바로 나갔었는데, 내 이발이 끝나니 의문이 들었다. 아 이 곳은 샴푸 서비스는 없는 걸까? 집이 코앞이니 아무렴 어때 하는 마음으로 묻지는 않고 눈치를 잠깐 살폈다. 경우가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 마침 미용사 아주머니께서 샴푸실 쪽으로 가는 것 같아 괜히 머릴 만지는 척하며 주뼛거리고 있는데 빗자루를 가져와 내 잘린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하시길래, 아 이곳은 샴푸 서비스가 없는 게 확실하구나 생각하며 요금을 지불하고 미용실을 빠져나왔다. 
기분 좋은 이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