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밸리에서의 아침은 길고도 짧았다. 결국 산책, 산책, 산책은 전날 저녁의 짧음으로 영구화 되었고, 우리는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고서는 곧장 콘도를 벗어나 우리의 진짜 목적인 뮤지엄 산으로 향했다. 날씨는 좋았다. 볕은 화창했으나 하늘은 그리 파랗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곧 가게 될 뮤지엄 산에서 더욱 환상적이었을 테지만 어쨌든 하늘은 익히 아는 가을하늘처럼 푸르지 않았다.
뮤지엄 산의 입구. 자작나무와 억새가 어우러져 빛을 골고루 받고 있는 측면, 뮤지엄 산이라고 소박하게 적힌 - 앞으로 꾸준히 보게 될 돌이 박힌 갈색의 정면, 그리고 그 갈색의 돌벽으로 둘러싸인 외면.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 주차를 하고, 놀랍게도 오전이었음에도 주차장은 거의 만차였다, 다시 입구 쪽으로 나와 처음부터 천천히 뮤지엄 일대를 더듬었다.
웰컴센터, 라고 이름 붙인 매표소에는 천장에 뚫린 창으로 곧은 빛이 비추고 있었고 그곳에서 뮤지엄과 제임스 터렐관 통합권을 구입했다. 차갑지만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내부는 발걸음을 서두를 수 없게끔 기하학적으로 잘 짜여져 있었다.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며 머뭇거리다가 뮤지엄숍을 지나 드디어 플라워가든으로 이어지는 야외 공간으로 발길을 향했다.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강렬한 빨강의 조형물. 마크 디 수베로의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 작년에 뮤지엄이 준공되었을 때 본 기사에서 이제는 유명하고 이곳의 트레이트 마크처럼 되어 버린 플라워가든의 모습이 시야에 겹쳐졌다. 먼곳의 산등성과 조화를 이룬 플라워가든의 키 작은 꽃, 그리고 빨강의 조형물. 지금은 가을이지만 플라워가든의 주인공은 아마도 봄꽃일 테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양측으로 앙증맞은 자갈 측구가 이어지는 길은 이제 곧 모습을 드러낼 뮤지엄 본관에 앞서 하얗고 날씬한 자작나무 숲으로 안내했다. 플라워가든의 지면에 들러붙은 푸른 잔디와 키 큰 자작나무 숲은 극명한 대비였다. 마치 드넓은 초원에서 비좁은 오솔길로 접어드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어디선가 눈에 띄지 않은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선율의, 어쩌면 알지도 모를 듯한 음악이 들려오고, 자작나무는 소리 없이 서 있다가도 옅은 바람에 높은 곳에 매달린 가지의 잎이 가볍게 흔들렸다. 바람이, 혹은 비가 세차게 몰아치면, 자작나무는 미친 듯 제 잎을 흩날리며 몸부림치겠지.
주위를 둘러보면 강원의 겹겹으로 이어지는 산능선들로 둘러싸인 뮤지엄은, 그래서 평온한 가을 날씨와 어우러지며 아늑했다. 그리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뮤지엄 본관. 안도 특유의 노출콘크리트 담과 엇갈리게 서 있는 게이트가 테두리를 감싸고 있는 워터가든과 함께 수줍게 인사한다.
어서오시오.
천천히,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조금 더 들여 돌아오시오, 라고, 안도의 담장은 낮지만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그래 담장을 따라 둘레를 돌아 거의 180도를 꺽어 뮤지엄 본관을 마주한다. 플라워가든에 있는 조형물에 이어지는 역시나 강렬한 빨강의 조형물이 정오의 빛을 가득 받아 제 색을 내뿜고 있고, 워터가든의 은은한 물결은 그곳에 비치는 본관의 갈색 벽을 소리없이 흔든다. 한켠에 마련된 저녁 공연의 세트, 자칫 너무 웅장해 보일 본관의 건물을 쓰다듬어주는 듯한 기울어진 벽면, 얕게 머릴 눌러쓴 지붕, 그 밑의 빛을 끌어들이는 창. 우리는 안도의 의도가 천천히, 평온하게 진입하시오, 라고 한다면 그보다 더욱 천천히, 더욱 평온하게 걸음을 한 발 또 한 발 입구를 향해 내딛었다. 그리고 마주하는 곧게 뻗은 직사각형의 노출 기둥. 손이 베일 것 같이 차가운 느낌의 그것이 갈색 벽과 정면의 유리와 조화를 이루며 입구에 다다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표를 내밀고 본관에 들어서니 우측으로는 카페 테라스가, 좌측으로는 페이퍼갤러리 입구가, 정면으로는 가벼운 로비가 알맞은 크기로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주린 배를 추스리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 테라스가 갔다. 내부는 크고 복잡하진 않았지만 의외로 시끄러워서 야외로 나갔다. 운이 좋게도 금방 그늘이 드리워진 자리가 생기고, 우리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워터가든 가운데 자리 잡은 야외 테라스는 멀리로는 길게 이어진 산들의 능선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고 가까이로는 계단식으로 이어지는 워터가든을 품고 있었다. 바람이 좋았다. 볕도 좋았다. 샌드위치도 심플하니 맛이 좋았다. 커피도 괜찮았다. 기분은 이 모든 것을 따르기 위해 들떠 있었다.
본관의 전시 <사유로서의 형식>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선 사전 예약된 제임스 터렐관으로 먼저 갔다. 기울어진 벽면을 따라, 스톤가든을 지나 지하로 스며드는 제임스 터렐관은, 이미 그곳의 성격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인원을 제한하는 운영 덕에 관람객은 많지 않았고 예약된 시간이 되자 다시 한 번 표를 체크하고서는 난간에 스며든 빛을 따라 둥그런 모습을 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첫 번째 공간 ‘스카이 스페이스’. 그곳은 그저 하늘이 동그랗게 난 구멍을 통해 그대로 비치는 공간일 뿐이었다. 단지 그랬다. 그때에는. 그리고 이어진 공간 ‘호라이즌 룸’. 계단을 따라 네모로 잘려나간 경계를 벗어나니, 저 멀리로 오크밸리의 풍경은 물론 드넓은 자연세계가 펼쳐진다. 그저 터렐의 공간은 그곳으로 인도할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개의 공간에서 우리는 빛을 보고 그것의 변화를 목도하며 직접 그것을 체험하게 된다. 신비하여라. 다시 처음의 공간, 스카이스페이스로 돌아오니 어느새 공간에 놓인 빛도 사람도 바뀌어 있다. 우리와 함께 공간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언제 다 빠져나갔는지 온데간데 없고 새로 입장한 사람들과 천장이 닫히고 인공 빛으로 채색이 된 하늘이 존재한다. 호라이즌 룸의 사각형 밖도 닫혀있고, 우리는 인공 빛에 의지해 서로를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빛은 의식하지 않은 순간 바뀌어 있고 또 바뀌려고 하는 사이, 아니 바뀌는 중에 밖으로 나왔다. 그랬더니 세상이 그렇게 현실적으로 아름다워보일 수 없었다. 놀라운 건 이렇게 하나의 체험이 세상을 보는 눈을 이토록 다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톤가든을 올 때와 반대로 돌아 나가는데 언제 왔는지 한 무리의 고등학생 소녀들이 떠들썩하게 단풍나무 아래서 가을의 색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선 우리에게 달려와 사진을 찍어달라며 핑크빛 카메라를 내밀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선 역광인 우리가 서 있던 곳이 아닌 그들이 있는 곳까지 움직여야 했다. 최대한 그들이 크게, 나무와 함께 나올 수 있게 앞으로 불러들인 다음 두 번, 찰칵. 보답으로 우리도 사진을 얻게 되었다. 찰칵.
이제 본관 전시를 보기에 앞서 출출해진 우리는 다시 운이 좋게 테라스에 자릴 잡고 맥주 한 병과 빵 하나를 나눠 먹었다. 벌써 오후가 깊어가고 있었다. 해는 기울었고 그만큼의 그늘이 테라스에 드리워져 있었다. 워터가든의 잔잔한 물결도 어느덧 온기가 느껴지기보다는 손을 대면 물씬 초겨울의 정취가 느껴질 듯 냉랭하게 보였다. 오래 앉아 있지 않았다. 페이퍼갤러리와 기획 전시인 <사유로서의 형식>을 관람해야 했기 때문.
페이퍼갤러리는 뮤지엄 산의 주인인 한솔제지가 수집해온 종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료들이 전시된 공간이었다. 종이. 그것은 중국에서 만들어져 아시아로,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일찍이 문자가 있었고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온 중국에서 종이가 먼저 발명이 되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본관의 공간은 전시를 보러 가는 둘레와 그곳을 빠져나오면 늘 보이는 트인 창 그리고 그 앞의 의자가 꾸준히 반복이 되었다. 그러나 둘레는 급격하게 꺽어지며 시나브로 오르는 경사와 길게 뻗은 직선의 폭이 좁게 느껴지는 길과 길이 만나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가도록 짜여져 있었다. 하지만 내내 공간과 공간에 스미는 빛이 주는 풍요에 감탄을 하면서도, 우리는 지쳐버렸다. 그래서 기획 전시를 볼 무렵쯤 되어서는 너무 지친 나머지 걸음의 속도를 높이기에 이르렀고, 보이는 의자에 쉬어야 했으며 어느새 신속하게 마지막 전시 공간인 1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래도 아쉬움 없는 관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전시를 본 건지, 공간 자체를 구경한 건지 분명하게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넉넉하게 만족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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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낮은 창과 미술관에 온 아해들 |
다섯시가 다 되어 본관을 빠져나온 우리를 맞은 건 쌀쌀한 공기와 어렴풋 들리는 피아노 소리, 분주하게 야외 공연 준비를 하는 뮤지엄 스텝들의 모습이었다. 피곤했지만 아쉬운 눈빛으로 본관을 거듭 돌아보며 왔던 길을 되돌아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플라워가든을 거쳐 웰컴센터로 돌아왔다.
한기가 가득 느껴지는 오후와 저녁의 교차점이었다. 우리는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서울에 가는 길에 여주에 들러 막국수를 먹기로 하고서는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은 한적한 2차선, 굽이길이 수없이 이어지는 길을 알려주었고 지나는 자동차가 거의 없는 그 길을 한 시간 가량 달리고 달려 여주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우리가 들른 행정구역은 다이내믹했는데, 원주에서 시작해 횡성을 스치고 양평을 건너서야 여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행정구역의 경계가 우리가 거쳐온 길만큼이나 구불구불한 모양이었다.
홍원막국수. 단 번에 검색을 해서 찾아간 그곳은 별관이 있을 만큼 규모가 있는 곳이었고, 손님도 끊이지 않고 꾸준했다. 우리는 편육과 비빔, 물막국수를 주문하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금세 나온 편육을 비롯해 막국수를 배부르게 먹었다. 맛은, 편육은 평이했고, 막국수는 기름을 많이 쳐서 그런지 고소했지만 다소 느끼했다. 육수는 진했고, 면은 잘 삶겨져 있었다. 결론은 보통.
다시 차를 몰아, 국도를 타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달려 집에 돌아오니 아홉시. 이틀간의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2014.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