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6

마르셀 프루스트와 갈리마르

1913년 초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갈리마르 부부가 눈 덮인 산간의 별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파리 사무실에서 연장 배달된 우편물 속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편지 두 통이 끼여 있었다. 수년 전 시골집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했을 때 좋은 인상을 받을 적이 있었던 작가 프루스트가 각기 550페이지에 달하는 두 권의 책을 갈리마르 사에서 출판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프루스트는 갈리마르를 매우 신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크 코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독자, 내 책의 출판인이 갈리마르씨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당신에게서 전해 듣고부터 내 작품이 NRF에 나온다는 것이 더욱더 매력 있게 느껴집니다. 나는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 몹시 좋은 기억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 탓인지 출판인과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덜컥 겁을 집어먹고 있는 터라 그 분이 만약 출판인이 되어준다면 만사가 간단하고 매력 있어질 것입니다.” 
마침내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두꺼운 노트 뭉치를 갈리마르에게 건넸다. 슐룸베르제의 집에서 갖는 목요일 모임에 참석한 편집위원들의 의견 : 
- 갈리마르가 가져온 노트 뭉치는 어때? 
- 온통 공작부인들로 가득 찬 얘기야… 우리한테는 안 맞아. 게다가 <피가로>지 편집국장 칼메트에게 바친 책이라니… 
이 같은 부정적인 평은 앙드레 지드의 입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가스통은 노트 뭉치를 프루스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작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를 소개받은 젊은 출판업자 베르나르 그라세는 그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읽어보지도 않은 채 출판할 것을 수락했다. 왜냐하면 출판에 따르는 상업적 위험부담은 작가 쪽에서 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즉 자비출판이었던 것이다. 
1913년말에 이리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권인 <스왕가 편>이 나왔다. 대체로 호평이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1914년 <NRF>지 1월호에 실린 앙리 게옹의 서평이었다. 그는 리비에르에게 책을 읽어보라고 전했고 리비에르는 또 지드에게 그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것이 어떨지를 물어보았다. 갈리마르와 리비에르는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쇄되어 나온 책을 다시 한 번 읽은 지드 자신도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했다. 그는 프루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이 책의 출판을 거절한 것은 NRF의 가장 심각한 오류로 남을 것이요, 내 생애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와 아쉬움들 중 하나로 남을 것입니다.” 잘못은 저질렀지만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갈리마르가 나설 차례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소설의 첫 권이 자비출판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프루스트는 아직 그라세에게 매인 작가가 아니었다. 
프루스트 사건은 가스통 갈리마르가 동업자, 즉 잠재적 경쟁자에게서 작가를 빼돌리기 위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시도로 기록된다. 이제부터는 처녀작 속에서 엿보이는 젊은 재능이 갈리마르의 사활을 결정하게 된다. 최고의 작가가 NRF 아닌 다른 곳에서 책을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프루스트의 허락을 받은 가스통 갈리마르는, 처음으로 베르나르 그라세에게 편지를 썼다. 1917년 10월 15일. “마르셀 프루스트씨의 출판인 자격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모든 연작들을 완간중에 있는 본인은 작가의 동의를 얻어 귀사에 남아 있는 <스왕가 편>의 모든 재고분을 매입코자 합니다.” 이 기회에 두 출판업자는 처음으로 서로 만났다. 두 사람의 세기적인 라이벌 관계는 여기서 막을 올린다. 
갈리마르가 그라세에서 인수한 약 600권에 달하는 프루스트의 <스왕가 편> 재고분의 가격은 호된 것이었다. 그러나 갈리마르는 그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고 싶었다. 이리하여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그 자리인 생페르 가의 그라세 출판사에서 마담 가의 갈리마르 사로 손수레 한 대가 수십 킬로그램의 <스왕가 편> 재고분을 운반해 왔다. 갈리마르는 즉시 그라세의 표지들을 뜯어내고 NRF의 표지로 교체했다. 
파리 장안에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라세는 “작가의 장래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경쟁자에게 양보함으로써 프루스트를 놓쳐버린 출판업자"라는 명예롭지 못한 구설수였다. 그라세는 일생을 두고 이 소문을 부인하려고 애를 썼다. 작품의 길이가 너무 길었고 제작비가 많이 드는 일이었으므로 자비출판은 불가피했다. 1차대전만 아니었더라면 조판이 거의 끝나가고 있던 후속작품인 <게르망트가 편>도 곧 나왔을 것이다. 이것이 그라세의 변이다. 한편 갈리마르는 일생을 두고 강조했다. 내가 프루스트를 먼저 알았다(1907년 블롱빌). NRF가 원고를 거절한 것은 유감스러운 오해 때문이었다. 아직 역사가 일천하고 출판사의 조직상태가 허술했던 탓이다. 하여간 프루스트 에피소드는 이 두 출판사의 역사에서 길이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들의 치열한 경쟁은 바로 이 1917년 10월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제 프루스트는 갈리마르의 작가가 되었다. 1919년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의 <꽃핀 처녀들의 그늘에서>가 나왔다. <스왕가 편>에 필적하는 성공이었지만 작가에게나 출판인에게나 다같이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오직 공쿠르 상만이 독자들에게 그 길고 어려운 작품을 먹혀들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과연 이 작품은 길고 어려웠다. 74세의 아나톨 프랑스는 이 소설을 받아들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인생은 너무 짧고 프루스트는 너무 길도다…” 
그러나 이 너무 긴 소설이 1919년 공쿠르 상 수상작으로 지명되었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프루스트의 집으로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은 물론 가스통 갈리마르였다. 이 책의 초판은 며칠 안에 다 품절되었다. 갈리마르는 수상소식을 들은 지 열흘 만에 가까스로 재판을 찍어 공급할 수 있었다. 재판에는 NRF 역사상 최초로 ‘공쿠르 상’이라는 붉은 띠가 둘러져서 서점에 진열되었다. <꽃핀 처녀들의 그늘에서>의 성공을 기점으로 하여 갈리마르 사는 1920년대의 호황을 맞게 된다. 라스파이유 대로에서 직영하는 대형서점을 연 것도 이때이고, NRF와 병행하여 <라 르뷔 뮈지칼>이라는 음악잡지를 창간하게 된 것도 이때다.

<바람을 담는 집> 김화영, 문학동네,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