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30

별안간 무지개

성북동 국시집에서 국수와 수육을 먹고 나폴레옹에서 작은 케이크 하나와 통팥빵도 사서는 집에 들어와 막 커피를 내리려는 찰나, j가 베란다에서 밖을 보더니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릴 던졌다.

“무지개네.”

순간, 귀를 잠시 의심한 나는 무심코 고개를 베란다로 향했고, 시야의 각도상 가까스로 보이는 끄트머리에 무지개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손에 쥐고 있던 드립서버를 내려놓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랬더니, 베란다로 가는 동안 상상했던 무지개의 형상보다 훨씬 더 큰 스케일의 무지개가 하늘에 반원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은, 그것이 주는 무게는 무대에서 마침내 주인공이 등장할 때의 그것과 유사했다. 언제 무지개가 떠올랐을까? 여리게 내리던 비가 어느새 그쳤나 싶더니 집에 돌아오는 사이, 그리고 서향인 주방 베란다로 찬란하게 지는 태양 빛이 밀려들어 오고 있는 그 사이, 우리가 미처 보기 전엔 눈치채지 못했던 그 사이에 반원의 아름다운 무지개는 보는 이의 물러질 감성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피어올랐던 것이다.

아름다워라.


언젠가 나는 생각했었다. 미적 취향에 대해. 그리고 그럴 때면 늘 영화 <타인의 취향> 생각이 난다. 어떤 자연 현상이나 풍경, 미술품 따위를 볼 때나 음악을 들을 때, 유사한 감성으로 몸을 떨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한 미적 취향의 일치에 근접한 것이리라.
이토록 아름다운 주말 오후의 무지개를 보고도 관성에 취해 발걸음을 그대로 앞으로 내리꽂는 사람과는 감성의 ‘감’자를 얘기할 때 단어 그대로 ‘감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리. 그러니까 감자는 구황작물이어서 말이지…

아쉬운 주말 오후는 무지개로 한없이 충족되었다가 금새 사라져버린, 역시나 무지개 때문에 한없이 공허해졌다. 그리고 다시 여리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2014/11/14

타멜, 카트만두

이른 아침부터 특유의 이곳 시끌벅적함에 잠에서 깼다. 행여 시간이 너무 돼 버린 건 아니겠지, 하며 시계를 보니 7시. 숙소를 나섰다. 로비에서 10달러만 환전을 하고, 거리로 나왔다. 지도를 하나 구했으나 방향 감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지도가 무슨 소용인가.
늘어선 택시들, 간헐적으로 보이는 사이클릭샤. 이미 깨어난 타멜의 아침은 분주하다. 어둠이 깊숙한 어느 거리 상점에서 짜이를 마신다. 지금 이 순간, 시간과 공간은 내게 축복이다.
좀 더 걷기로 한다. 카트만두에서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타멜은 어렴풋한 기억에, 인도 델리의 빠하르간지를 떠오르게 하지만 이것은 추상일 뿐 정확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다만 특유의 분주함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여행자들이 거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곳과 이미지를 연결짓는 건 무리가 아니다.

돌아선 여인, 타멜, 카트만두, 2014

식당
아침 볕이 쪼이는 작은 식당 밖에 앉아 생각을 이어간다. 
더 사인 기간이라 그런지 거리에 늘어선 노점들이 더욱 생기 있게 다가오고, 서로를 부르거나 엇갈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의 볼륨은 괜히 길게 늘어선 택시의 행렬처럼 지루하고 그칠 줄 모른다.
이곳에 앉아 감자와 짜파티를 주문하고서는 문득 나에게 물음표를 하나 던져본다. 아무 사전 정보나 지식 없이, 경험도 없이 이곳의 소음만을 들려준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할까?

경적 소리, 흥정하는 소리, 구걸하는 소리, 잡담하는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 짜이 끓이는 소리, 릭샤나 택시를 외치는 소리, 소리의 소리들. 니하오, 꼬레아, 곤니찌와. 

이러한 물음에 답을 찾을 궁리도 없이 멍하니 있는 사이, 식사가 전혀 예상 밖의 비주얼로 등장한다. 주인 아저씨의 인상은 차가우면서 따스하다. 그 때문에 주저없이 이곳에 왔지. 그래서 짜이를 한 잔 주문한다. 벌써 두 잔째. 다행히 처음 것보다 맛이 좋다. 내게 달디단 짜이 맛의 기준은 언제나 더 달지 않은 것. 평범한 식어빠진 짜파티가 아닌 갓 튀겨 따뜻하면서도 겉이 바삭한, 그러면서도 느끼했던 맛을 짜이가 고스란히 덮어준다. 다행이다. 
어느새 옆에 앉아 있던 세 명의 무리에 거리를 거닐던 친구 하나가 끼더니 대화의 톤이 높아지고,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벗어난다. 이제 준비하고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


숙소 
전기가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난 것만 보고 짐작하지 못했는데 막상 방에 와서 불을 켜니 들어오지 않았다. 청소하시는 분께 물었더니, 

Power Cut!
11시경 비행기를 예약한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렇게 타멜의 아침을 느끼고 가니. 하지만 여전히 방향 감각은 제로다.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하고, 가벼운 흥정을 거쳐 자그마한 흰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 번잡한 타멜을 벗어나면 그만인 줄 알았건만 길이 막힌다. 게다가 택시 안에 모셔진 신은 어찌나 차주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진동하는 향내에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 창문 손잡이를 부지런히 돌려 열린 창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보지만 매연은 더 참을 수 없다. 눈에 띄는 차선은 기어코 없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수시로 길을 건너는 보행자가 뒤섞인 거리는 과연 이 길이 내가 새벽에 거꾸로 지나왔던 길이 맞는지, 과연 이 길을 따라가면 공항에 닿을 수 있는지 의심이 가게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방향을 바꾼 좌회전 길에서 무뚝뚝한 경찰의 수신호로 잠시 멈춰선 택시 너머로 보니 어느새 공항이 앙증맞은 그 사이즈에 맞게 한눈에 시야에 잡힌다.

국내선 터미널
지방 중규모 도시의 터미널을 연상시키는 이곳, 국내선 출발 터미널은 북적북적하다. 더 사인 때문일까. 택시 기사의 말대로 포카라는 quiet한 도시였으면.
정시 출발은 어림도 없다는 듯 무심한 전광판에는 내가 탈 687편 예띠항공에 앞서 30분 미리 출발 예정인 677편이 11시 40분에 출발 예정이라고 건조하게 적혀있다. 수기로 입력되는 모니터는 아직 내가 탈 항공편에 대한 소식이 없다.
11시 35분. 67편의 보딩 안내 방송이 나오고, 대다수가 외국인인 무리들이 줄지어 게이트로 몰려 간다. 이들도 각자 마음속에 갈 때는 오른편, 올 땐 왼편 사수, 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얼른 조용하다는 포카라에 가고 싶다. 시끄러운 건 문제가 아닌데도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맘이 들떠있나 보다.
11시 40분. 드디어 떠오른 메시지. 20분 지연.
12시 30분. 결국 이제야 자그마한 항공기에 탑승. 그래도 은근한 조바심(?)에 서둘렀더니 우측에 앉았다. 그렇다. 따로 좌석이 정해지지 않은 예띠항공에서 포카라로 가는 하늘에서 히말라야를 잘 볼 수 있다는 우측에 앉으려면 약간은 서둘러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서운하게도 하늘을 지배하는 건 푸른하늘과 거짓말처럼 우뚝 솟은 히말라야가 아닌, 쑥쓰럽기라도 한 건지, 결코 대지와 하늘과 산이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허락하지 않은 두터운 구름이었다.

2014/11/13

티벳게스트하우스

약속대로, 아니 나의 예약과 요구대로, 그리고 메일로 거듭 확인한 바대로 숙소에서는 공항에 픽업을 나왔다. 밤 10시 40분경 비행기는 카트만두 트리부반 공항에 거칠게 착륙을 했다. 비행기에 연결한 계단을 내려와 땅에 발을 딛자 활주로 한복판에 놓인 듯한 황량함이 엄습해 왔다. 이미 가득 들어찬 버스에 오르니 이내 출발. 입국심사는 심플했다. 

WITH VISA, WITHOUT VISA

세 줄로 길게 늘어선 어느 한 줄에 서서 손에 쥐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비자신청서를 슬쩍 살펴보니 사진란이 비어 있는 인간은 나뿐인 듯했다. 그 와중에 공항 직원은 스테이플러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비자신청서에 붙여주고 있었다. 

NO PICTURE

그 직원이 비어 있는 나의 비자신청서를 보며 한 말과 내가 답한 말은 이게 전부다. 비자fee 25불을 지불하고 여권에 직사각형의 유효기간이 손수 적힌 비자를 받으니 입국심사는 끝. 입국스탬프는 따로 찍어주지 않는다. 북적북적한 수화물 찾는 곳에서 의외로 내 짐은 금세 나타났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자정이라는 시각이 무색할 정도로 인산인해.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쉽게 티벳게스트하우스 라는 푯말이 보여 다가가 말을 붙였더니 지프로 안내한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건달 같이 생긴 두 청년이 오더니 지폐 몇 장이 쥐어진 손을 내밀며 팁을 요구한다. 어처구니가 없을 틈도 없이 습관적으로, 그리고 반사적으로 이곳이 네팔임을 인식하며 간단히 ‘NO’라고 내뱉는다. 곧장 그들은 사라진다. 사는 게 저토록 쉬울 수 있구나. 이곳은 네팔이구나. 실감한다.  
더 사인. 이곳 명절 기간이라 그런지 타멜 거리는 분주하다. 불 켜진 상점도 거의 없는데 이들 인파는 대체 어디에서 몸을 추스린단 말인가. 낮고 허름한 건물들. STD와 같은 전화방을 보자 더욱 네팔이 실감난다. 십 년 전이 손에 잡힐 듯 밀려든다. 처량해진 기억에 어느새 생기가 들러붙는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약간은 조용한 골목에 숙소는 자리하고 있었다. 육중한 대문을 열어젖히자 높다란 건물이 실체를 드러내고 역시나 나는 반사적으로 이곳이 내가 예약한 호텔이 맞는지 고개를 쳐들어 간판을 확인한다. 맞다. 여권을 내밀고 숙박계를 작성하여 체크인을 하고, 와이파이 로그인 정보를 확인. 501호 키를 받아들고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에 들어서니 평범한 싱글룸이다. 좁은 싱글침대 두 개, 욕실. 대체로 깔끔하지만 특유의 인도나 네팔 분위기. 가격은 16달러. 아마 이 가격이면 값싼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주일도 머무를 수 있으리. 
아침이 밝아오고, 내 눈으로 히말라야를 확인하는 순간 내 마음은 붕 떠버려 정상적인 판단이나 감정을 조절하는 데 실패하게 될 줄 모르겠으나 어쩐지 이제는 이런 곳도 친숙하지만 편하지가 않다. 좀 더 깔끔했으면 좋겠고, 보다 정숙했으면 좋겠다. 자야겠다. 벌써 세시가 다 되어간다.

일정과 준비


전체 일정
2014년 9월 27일 ~ 10월 12일

이동
인천 - 카트만두 : 말레이시아항공
카트만두 - 포카라 : 국내선(예띠에어라인, 부다항공)
포카라 - 나야풀 : 로컬버스

트레킹
9월 29일 ~ 10월 9일(10박 11일)

트레킹 루트
나야풀Nayapul - 비레탄틴Birethanti - 수담Sudame - 힐레Hille - 티케둥가Tikhedhungga(1박) - 울레리Ulleri - 반탄티Banthanti - 고레파니Ghorepani[푼힐Poon Hill](2박) - 치트레Chitre - 시카Shikha - 타토파니Tatopani(3박) - 고레파니Ghorepani[푼힐Poon Hill](4박) - 데우랄리 패스Deurali Pass - 타다파니Tadapani(5박) - 촘롱Chomrong(6박) - 시누와Sinuwa - 밤부Bamboo - 도반Dovan(7박) - 히말라야Himalaya - 데우랄리Deurali - 마차푸츠레 베이스캠프Machhapuchhre Base Camp[안나푸르나 남봉 베이스캠프South Annapurna Base Camp](8박) - 안나푸르나 남봉 베이스캠프South Annapurna Base Camp(9박) - 촘롱Chomrong(10박) - 지누단다Jhinu Danda - 시와르Siwar - 나야풀Nayapul

준비물
여권, 지갑, 이티켓, 팀스, 퍼밋, 책(오래된 미래, 바람을 담는 집, 붉은 꽃 동백), 일기장, 펜, 시계, 선글라스, 리코(충전기, 배터리 4개), 아이폰(이어폰, 충전기), 헤드랜턴, 모자, 물통(1리터), 장갑, 비니, 토시, 목토시, 타이즈, 양말4, 속옷4, 손수건, 스포츠타올2, 수건, 옷가지(바지2, 반팔2, 긴팔3, 반바지1), 등산화, 고어텍스, 슬리퍼, 판쵸, 다운자켓(경량), 세안제, 샴푸, 면도기, 물티슈, 휴지, 타이레놀, 비아그라, 썬블락, 로션, 칫솔, 치약, 자물쇠, 맥가이버칼, 손톱깍이, 고리3, 가루비누, 비누, 침낭, 지도

트레킹 외
패러글라이딩(포카라)
스파&트레커 마사지(카트만두)

학교 - 교육지옥인가, 민주적 자치공동체인가

제가 보기에 새누리당 정권이 전교조를 탄압하려고 저렇게 극렬하게 나오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결국 전교조가 민주적 성향을 가진 교사들로 구성된 잘 조직된 지적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사들이란 무엇보다 외부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교단에서 어느 정도 자율적인 활동이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그 교단을 통해서 전교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적 가치를 전파하는 게 싫고 두려운 거죠. 이 나라 수구 지배층이 KBS와 MBC를 포함한 주류 미디어는 전부 자기편으로 만들었는데, 아직 장악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미디어 하나가 있잖아요. 바로 학교 교단이라는 프로파간다 미디어 말입니다. 교단이라는 것은 자라는 세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입니다. 저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때 알거나 느낀 게 그 뒤 제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학교교육의 영향은 수십 년 후에 나타나는 것만도 아닙니다. 지금 교단에서 교사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가치를 전파하느냐 하는 것은 지금 당장의 우리사회 현실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한국의 지배세력은 겉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내심으로는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것도 싫고, 국민이 똑똑해지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똑똑해지면 다루기 힘드니까요. 그러니까 전교조가 생리적으로 싫은 거예요. 예를 들어, 전교조가 생기기 이전에 우리나라 학교들에 촌지문제가 심각했잖아요. 그런데 전교조가 창설되고 전교조 교사들이 일제히 촌지를 거부하면서 결국 촌지문제는 학교에서 거의 사라졌죠. 이런 게 싫은 겁니다. 적당히 썩은 선생, 썩은 교육이 맘에 드는 거예요. 그래야 자기들이 설 자리가 넓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죠. 중산층 학부모들도 마찬가집니다. 전교조 창설 당시에 중산층 부모들이 주로 반대를 했는데, 그 사람들의 논리가 뭐였느냐 하면, 학교 선생님들이 어째서 노동자냐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노동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 혹은 노동자를 업신여기는 속마음을 내비친 거죠. 당시 어느 잡지 인터뷰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만, 어떤 학부모들은 전교조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자기들도 잘 안다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전교조 교사들이 정의와 평화, 민주주의, 공생의 삶을 강조하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찬성하지만, 자기 아이들만은 예외로 하고 싶다는 얘기를 솔직하게 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하든 자기 아이만은 경쟁사회에서 이기기를 부모로서는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에서부터 경쟁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죠. 그런 얘기를 솔직히 털어놨습니다. 결국 그런 거예요. 전교조가 밉고 싫은 것은 전교조가 도덕적으로 옳고, 인간적으로 좋은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게 뭐냐면, 지금 한국사회에는 폭주하는 권력에 제동을 걸 저항세력들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습니다. 일반 노동조합은 벌써 노조로서 기능부전에 빠졌고, 시민운동단체들도 이빨이 빠져버렸어요. 다들 고만고만하게 연명하며 하루하루 이슈별로 싸우고 있지만, 정부나 대기업의 횡포를 막을 만한 힘은 전혀 없습니다. 국회에는 야당이 있다고는 하지만 뭘 하는지 모르겠고요. 하기는 야당도 힘을 발휘하려면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이 활기 있게 살아서 받쳐줘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아직까지는 가장 잘 조직된, 그것도 지적으로 상당히 고른 수준을 가진 교사들의 조직인 전교조가 거의 유일한 대항세력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수구세력에게는 전교조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어떻게든 깨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점에 대해서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지식인들도 별로 인식이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전교조가 무너지면 우리나라 민주주의 기반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분명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어떻든 사회당이라는 상당한 힘을 가진 야당세력이 일본에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당의 정치적 기반이 주로 노동조합이었고, 그중 제일 잘 조직된 큰 노동조합이 국영철도노조와 일본교직원노조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1980년대 중반에 철도를 민영화한 것은 경제논리 때문인 줄 알고 있지만, 실상은 나카소네 총리가 이끌던 자민당 정권이 사회당의 정치적 기반인 노동조합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철도 민영화도 그냥 민영화가 아니라 소위 분할민영화라고 해서 여러 개로 쪼개어 나눴습니다. 그러고는 기존 국영철도노조에서 탈퇴하는 노동자만 민영화된 철도회사들에 재취업할 수 있게 만들었죠. 그 결과 일본에서 제일 힘이 있었던 철도노조는 완전히 와해되었죠. 소위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라는 것으로 민영화를 밀어붙였지만, 실은 이렇게 음험한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이런 상황 속에서 ‘일교조’도 현저히 동력을 상실합니다. 지금 일본이 전후의 평화헌법체제를 벗어나서 다시 군국주의를 지향하고, 사실상의 자민당 독재정권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결국 사회당, 철도노조, 일교조와 같은 대항세력이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때는 일본이 고도경제성장 시대를 거치면서 한때 학생운동을 한 사람들도 대기업으로 들어가고, 관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민주세력들은 거의 전면적으로 무너집니다. 이런 일본의 선례를 보면 우리도 굉장히 걱정이 됩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민주주의를 이 정도나마 버텨주고 있는 것은 철도노조나 전교조 같은 조직이 아직은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전교조의 의미를 이렇게 좀더 폭넓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녹색평론 138>, 김종철

오직 진실만이 위로입니다

삶이 거짓말처럼 참혹할 때 죽음이 더 삶답습니다. 그러니 섣불리 위로하려 마십시오. 유일한 위로는 진실입니다.


<녹색평론 138>, 김해자

2014/11/12

이사를 하고 난 뒤, 집에 오면 늘 뭔가에 분주하다. 무엇이 그리 눈에 띄고 또 하게 만드는지. 오늘은 집에 왔더니 약간은 시큼하면서도 눅눅하고, 그러면서 신 냄새가 났다. 그래서 우선 베란다 창을 모조리 열고 정체가 무엇일까 살피는데 주범은 바로 주말에 집에 꽂아두었던 꽃이었다. 칠할 이상이 크게 시들어버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얼핏 보아도 썩은 듯한 물은 흐릿한 색으로 묵직한 냄새를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물을 비워내고 시든 꽃은 신문에 싸서 버린 후 약간 남은, 한 움큼도 되지 않는 산 녀석들을 다시 새 물을 받아 원래의 자리에 놓아두었다. 그래도 음악과 책만이 가득한 이 허전한 집에 녀석이 있으니 사뭇 다른 느낌과 기분이다. 
수건을 비롯한 빨랫거리들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샤워를 한 뒤 마른 옷가지를 정리하고 행주를 삶고 그 사이 세탁이 완료된 빨래를 널고 테이블에 앉아 사흘치 신문을 천천히 훑는다. 신문에서 발견한 몇 가지 단어. 
무라카미 하루키, 수색중단, 36년, 우승, FTA.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정치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이른바 ‘무상’ 논쟁이다. 다시 또, 재벌 손자에게 밥을 왜 주냐는 이야기가 제 목숨 죽은 줄 모르고 고개를 든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지긋지긋한 정치인들도 개개인의 면면을 보면 그들의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제법 훌륭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들이 모이면 대체 왜 그 모양일까. 예산 논쟁은 보나마나 연말까지 지루하게 이어질 테고 그 지루함과는 별개로 우리는 벌써 한 해가 다 갔다며 시간 앞의 속수무책을 한탄하겠지. 
몇 해 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한 오래된 나는 어딘가로 가고픈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서 전철에 몸을 실었다. 춘천행이었다. 제법 추웠던 기억, 낭만시장이라 이름 붙인 중앙시장엔 중국 관광객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유명한 닭갈비 골목도 긴 줄의 수를 헤어리기 어려울 만큼 북적였다. 나는 시장에 있는 작은 분식집에 들어가 끼니를 보통으로 해결하고 꽤나 한적해 보이는 카페를 찾아 실망스러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일기를 썼다. 

춘천이다. 물론 계획에 없던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뒤척이고 있는데 밖에서 눈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다를까 커튼을 살짝 밀쳐 밖을 보니 한바탕 눈이 내린 뒤였다. 여전히 날씨는 잔뜩 흐리기만 하고. 산책을 하려던 계획은 이내 숨어버리고, 첫날인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 싶은 생각에 잠실에 있는 삼백집에 가서 점심이나 먹을 생각으로 근처에 사는 친구녀석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방에 가 있다고 하고, 길상사에나 다녀올까 싶은 생각을 잠시 하다가 문득 춘천이 떠올랐다. 
‘기분과 희망’이란 단어만 공허하게 떠있는 맥북의 화면을 넘겨 경춘선 열차를 검색했다. 가는 방법은 두 가지. 청춘열차를 타느냐 전철을 타느냐. 가는 열차는 이미 매진이 돼 돌아오는 열차만 예매를 하고 씻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상봉역에 내려 춘천행 열차가 출발하는 곳으로 달렸다. 눈앞에서 열차를 놓쳤는데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허전했던 플랫폼엔 어느새 경춘선 전철을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심보선을 읽다 손이 시렵고 집중도 안 되던 나는 가을방학을 들으며 내심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30분을 차가운 플랫폼에 서 기다려야 했지만. 
한 대의 아늑해 보이는 청춘열차를 보내고 난 뒤 전철이 플랫폼에 도착하고 라인의 끝에 자리를 잡은 나는 심보선 대신 로맹 가리를 집어든다. 단편집을 읽다 졸다 밖을 내다보니 세상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어느새 나는 북해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코다테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내린 눈을 맞으며 걷던 언덕과 도심을 가르는 전차에서의 내 모습을. 가평과 강촌에서 절반 가량의 사람들이 빠진 전철은 한 시간 남짓 달려 남춘천역에 도착했다. 지도 하나 없이 그곳에 내린 나는 이정표를 보며 효자로를 따라 시청 쪽으로 걸었다. 눈은 그쳤지만 길은 미끄러웠고, 두툼하게 옷을 입어 춥진 않았지만 노출된 얼굴은 걸음이 계속될수록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춘천엘 다녀왔다. 일로써 다녀오긴 했지만 스산한 겨울 냄새로 가득한 그곳은 시린 정겨움이 있었다. 서투르게 기억나는 도시의 길을 벗어나 일행 중 한 분이 미리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해질 무렵이 지나 사위가 어두웠지만 숙소의 아늑함과 무엇보다 시내에서 십여 분 벗어났음에도 완전히 분위기를 달리하는 동네의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하룻밤을, 따뜻하지만 건조하게 보낸 뒤 아침은 숙소 주방에 마련된 토스트와 커피, 어젯밤 사온 과일로 대신했다. 그리고 일을 보고서는 점심을 먹고 일행과 헤어져 다시 나는 ‘남춘천역’에서 청춘열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많이 잤는데도, 겨울 풍경이 창밖에 무수한데도 나는 잠을 잤다. 강촌에서, 청평에서 깼지만 다소 포근하고도 낮은 기분으로 잠을 잤다. 
집에 돌아오니 흐트러진 사흘치 신문과 시들어버린 꽃이, 주인 없는 집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은 이제서야 데미안 라이스의 새 앨범으로 몸을 떨며 겨울, 이 저녁을 뜻하지 않은 한가로움과 교차하는 분주함으로 눈을 밝히고 있다.

2014/11/08

Jeonju, 2011, Lomo

전주, 2014, Ricoh

어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제는 현 부서의 지난 멤버들 모두가 모이는 자리, 회식이었다. 나는 어떤 들뜬 기분도 아니었음에도 자리를 이동하며 술을 마셨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한 명씩 돌아가며 건배사 아닌 한 마디씩의 말을 할 때에는 머릿속에 든 게 하나도 없음에도 거침없이 쏟아지는 말에, 그리고 그 말의 타자와의 유사성에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언제부터 졸았는지 깨어나니 나는 밖으로 나와 있었다. 또 다른 자리로 이동하려는 무리의 사람들의 목소리는 격양돼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곳을 벗어나 길고긴 퇴근길에 접어들었다. 
집에 오니, 오는 길에 많이 졸아서인지, 아님 샤워를 한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사당에서 잡아탄 택시가 동작대교를 건너 남산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남산 1호, 2호, 3호 터널의 지리적 접근성과 연결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용산기지를 통과할 때에는 이곳이 광활한, 한강과 남산을 이어주는 공원으로 재탄생하는 상상을 해 보았으나 이는 언제 현실로 구체화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 마스터플랜 계획가로 지정된 승효상 건축가도 허탈할 거야, 라는 부질없는 생각도 하였다. 

이 나라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어렴풋 일어난 사이 전화벨이 울린다. 옆동에 사는 누나의 목소리. 
“내가 며칠 전 갑자기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아 병원에 갔는데 이유를 모르겠다며 깁스를 해서 애들 보기가 불편해. 밥도 못 해먹고 시켜먹어. 애들 아빠도 어디 가서 그런데 우리집에 오면 안 돼?”
도서관에 가서 이것저것 하려는 계획을 접고, “조금 있다가 갈게”하며 전화를 끊었다. 다시 샤워. 
여전히 머리가 무거웠다. 그래도 씻으니 조금 나은 듯해, 음악을 틀고 커피를 내렸다. 냉장고에 있는 몇 조각의 식빵을 꺼내 굽고, 계란후라이 하나, 사과 한 알. 주말의 아침식사.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세월호 특별법 통과, 본회의장의 울분, 파트릭 모디아노의 노벨상 수상 여파, 샌프란시스코의 메이저리그 우승에 대한 뒷이야기… 
준비된 아침을 다 먹고, 일어나 읽다만 녹색평론을 다시 편다. 

배달되는 문학잡지들 곳곳에 슬픔이 배어있다. 제일 먼저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인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울컥, 목이 메곤 한다. 슬픔뿐 아니라 분노와 무력감, 열패감 같은 감정들도 묻어난다. 광화문에서 낭송하던 시인들의 목소리가 지면 속에도 핏물처럼 점점이 새겨져 있어 읽기가 힘들다. 산문이나 시평들도 참사를 다룬 글들이 많다. 너무도 끔찍한 일이 이토록 어이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있었을까. 이번에는 달라질 거라는, 사회적 전환의 계기가 될 거라는 예상은 순진한 믿음이 아니었다. 대통령부터 여야의 정치인까지 한목소리로 무려 ‘국가의 개조’까지 들먹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은 다시 잊으라고 한다.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지른다. 두 번의 선거를 치러낸 저들의 의기양양은 유족들을 비아냥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려워라, 목숨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저 벽을 무엇으로 넘을 것인가. 
언제부턴가 기묘한 풍문 하나가 떠돌았다.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소비가 위축되어 내수경기 침체가 심각하다는, 얼핏 피상적인 것 같지만 상당히 조직적으로 유포되는 풍문이었다. 그런 식의 불안이 불러오는 효과에 미소를 짓는 자들이 누구일지는 빤한 일이다. 손님이 없는 식당도, 매출이 줄어든 점포도, 유례없는 가격 폭락 사태를 맞은 농산물도 참사로 인한 소비심리 위축이란다. 하여 참사 따위 잊고, 그러니까 제 입으로 말한 국가의 개조 따위도 잊고, 빨리 경제를 살리는 일에 매진하라는 요구가 국민의 뜻이라고 풍문은 재빨리 진화한다. 이런 얄팍한 사기극은 그러나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주위에서 보고 듣는 바로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장삼이사들이 많다. 마치 참사 이전에는 서민경제가 흥청거리기나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 섞여 있어 숨을 멈추지 않는 한 계속 들이마셔야 하는, 이 사회의 운명이 되어버린 온갖 거짓들에 숨이 막힌다. 

녹색평론 138, 이 또한 지나갈 것인가, 최용탁

우울하다. 창밖으로 비치는 거대한 흐린 날씨처럼. 
아침에 고른 씨디는 넥스트의 앨범 두 장. Lazenca-A Space Rock Opera와 The Return of N.EX.T PART1. 
신해철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느 저녁, 그리고 그 전에 그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이석원이 쓴 일기에서 본 그와 이석원의 이야기들. 그가 결국 죽음을 맞고 나서야 나는 기사를 한둘 찾아보며 그동안의 경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간신문에 실린 음악평론가 임진모의 그에 관한 칼럼. 
일기를 쓰고 있는 중에도, 거의 무의식중으로 들리는 음악의 풍부한 사운드와 날카로운 가사는 여전히 마음을 울린다. 머리를 두드린다. 임진모가 썼듯, 마왕으로 대표되는 그의 여러 이미지는 결국 그의 본연의 업이었던 음악가로서의 결과물로 귀결된다. 그러니 신해철, 그를 음악가로서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서 나는 이 흐린 아침, 그가 만든 음악을 차분히 듣는다. 명반이다,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그대여 꿈을 꾸는가 
너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을
기나긴 고독 속에서 
홀로 영원하기를 바라는가 
사라져 가야한다면 사라질 뿐 
두려움 없이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

2014/11/07

공간과 공감, 계절과 빛의 향연

오크밸리에서의 아침은 길고도 짧았다. 결국 산책, 산책, 산책은 전날 저녁의 짧음으로 영구화 되었고, 우리는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고서는 곧장 콘도를 벗어나 우리의 진짜 목적인 뮤지엄 산으로 향했다. 날씨는 좋았다. 볕은 화창했으나 하늘은 그리 파랗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곧 가게 될 뮤지엄 산에서 더욱 환상적이었을 테지만 어쨌든 하늘은 익히 아는 가을하늘처럼 푸르지 않았다. 
뮤지엄 산의 입구. 자작나무와 억새가 어우러져 빛을 골고루 받고 있는 측면, 뮤지엄 산이라고 소박하게 적힌 - 앞으로 꾸준히 보게 될 돌이 박힌 갈색의 정면, 그리고 그 갈색의 돌벽으로 둘러싸인 외면.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 주차를 하고, 놀랍게도 오전이었음에도 주차장은 거의 만차였다, 다시 입구 쪽으로 나와 처음부터 천천히 뮤지엄 일대를 더듬었다.




웰컴센터, 라고 이름 붙인 매표소에는 천장에 뚫린 창으로 곧은 빛이 비추고 있었고 그곳에서 뮤지엄과 제임스 터렐관 통합권을 구입했다. 차갑지만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내부는 발걸음을 서두를 수 없게끔 기하학적으로 잘 짜여져 있었다.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며 머뭇거리다가 뮤지엄숍을 지나 드디어 플라워가든으로 이어지는 야외 공간으로 발길을 향했다.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강렬한 빨강의 조형물. 마크 디 수베로의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 작년에 뮤지엄이 준공되었을 때 본 기사에서 이제는 유명하고 이곳의 트레이트 마크처럼 되어 버린 플라워가든의 모습이 시야에 겹쳐졌다. 먼곳의 산등성과 조화를 이룬 플라워가든의 키 작은 꽃, 그리고 빨강의 조형물. 지금은 가을이지만 플라워가든의 주인공은 아마도 봄꽃일 테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양측으로 앙증맞은 자갈 측구가 이어지는 길은 이제 곧 모습을 드러낼 뮤지엄 본관에 앞서 하얗고 날씬한 자작나무 숲으로 안내했다. 플라워가든의 지면에 들러붙은 푸른 잔디와 키 큰 자작나무 숲은 극명한 대비였다. 마치 드넓은 초원에서 비좁은 오솔길로 접어드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어디선가 눈에 띄지 않은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선율의, 어쩌면 알지도 모를 듯한 음악이 들려오고, 자작나무는 소리 없이 서 있다가도 옅은 바람에 높은 곳에 매달린 가지의 잎이 가볍게 흔들렸다. 바람이, 혹은 비가 세차게 몰아치면, 자작나무는 미친 듯 제 잎을 흩날리며 몸부림치겠지. 



주위를 둘러보면 강원의 겹겹으로 이어지는 산능선들로 둘러싸인 뮤지엄은, 그래서 평온한 가을 날씨와 어우러지며 아늑했다. 그리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뮤지엄 본관. 안도 특유의 노출콘크리트 담과 엇갈리게 서 있는 게이트가 테두리를 감싸고 있는 워터가든과 함께 수줍게 인사한다. 

어서오시오. 

천천히,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조금 더 들여 돌아오시오, 라고, 안도의 담장은 낮지만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그래 담장을 따라 둘레를 돌아 거의 180도를 꺽어 뮤지엄 본관을 마주한다. 플라워가든에 있는 조형물에 이어지는 역시나 강렬한 빨강의 조형물이 정오의 빛을 가득 받아 제 색을 내뿜고 있고, 워터가든의 은은한 물결은 그곳에 비치는 본관의 갈색 벽을 소리없이 흔든다. 한켠에 마련된 저녁 공연의 세트, 자칫 너무 웅장해 보일 본관의 건물을 쓰다듬어주는 듯한 기울어진 벽면, 얕게 머릴 눌러쓴 지붕, 그 밑의 빛을 끌어들이는 창. 우리는 안도의 의도가 천천히, 평온하게 진입하시오, 라고 한다면 그보다 더욱 천천히, 더욱 평온하게 걸음을 한 발 또 한 발 입구를 향해 내딛었다. 그리고 마주하는 곧게 뻗은 직사각형의 노출 기둥. 손이 베일 것 같이 차가운 느낌의 그것이 갈색 벽과 정면의 유리와 조화를 이루며 입구에 다다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표를 내밀고 본관에 들어서니 우측으로는 카페 테라스가, 좌측으로는 페이퍼갤러리 입구가, 정면으로는 가벼운 로비가 알맞은 크기로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주린 배를 추스리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 테라스가 갔다. 내부는 크고 복잡하진 않았지만 의외로 시끄러워서 야외로 나갔다. 운이 좋게도 금방 그늘이 드리워진 자리가 생기고, 우리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워터가든 가운데 자리 잡은 야외 테라스는 멀리로는 길게 이어진 산들의 능선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고 가까이로는 계단식으로 이어지는 워터가든을 품고 있었다. 바람이 좋았다. 볕도 좋았다. 샌드위치도 심플하니 맛이 좋았다. 커피도 괜찮았다. 기분은 이 모든 것을 따르기 위해 들떠 있었다. 


본관의 전시 <사유로서의 형식>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선 사전 예약된 제임스 터렐관으로 먼저 갔다. 기울어진 벽면을 따라, 스톤가든을 지나 지하로 스며드는 제임스 터렐관은, 이미 그곳의 성격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인원을 제한하는 운영 덕에 관람객은 많지 않았고 예약된 시간이 되자 다시 한 번 표를 체크하고서는 난간에 스며든 빛을 따라 둥그런 모습을 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첫 번째 공간 ‘스카이 스페이스’. 그곳은 그저 하늘이 동그랗게 난 구멍을 통해 그대로 비치는 공간일 뿐이었다. 단지 그랬다. 그때에는. 그리고 이어진 공간 ‘호라이즌 룸. 계단을 따라 네모로 잘려나간 경계를 벗어나니, 저 멀리로 오크밸리의 풍경은 물론 드넓은 자연세계가 펼쳐진다. 그저 터렐의 공간은 그곳으로 인도할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개의 공간에서 우리는 빛을 보고 그것의 변화를 목도하며 직접 그것을 체험하게 된다. 신비하여라. 다시 처음의 공간, 스카이스페이스로 돌아오니 어느새 공간에 놓인 빛도 사람도 바뀌어 있다. 우리와 함께 공간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언제 다 빠져나갔는지 온데간데 없고 새로 입장한 사람들과 천장이 닫히고 인공 빛으로 채색이 된 하늘이 존재한다. 호라이즌 룸의 사각형 밖도 닫혀있고, 우리는 인공 빛에 의지해 서로를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빛은 의식하지 않은 순간 바뀌어 있고 또 바뀌려고 하는 사이, 아니 바뀌는 중에 밖으로 나왔다. 그랬더니 세상이 그렇게 현실적으로 아름다워보일 수 없었다. 놀라운 건 이렇게 하나의 체험이 세상을 보는 눈을 이토록 다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톤가든을 올 때와 반대로 돌아 나가는데 언제 왔는지 한 무리의 고등학생 소녀들이 떠들썩하게 단풍나무 아래서 가을의 색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선 우리에게 달려와 사진을 찍어달라며 핑크빛 카메라를 내밀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선 역광인 우리가 서 있던 곳이 아닌 그들이 있는 곳까지 움직여야 했다. 최대한 그들이 크게, 나무와 함께 나올 수 있게 앞으로 불러들인 다음 두 번, 찰칵. 보답으로 우리도 사진을 얻게 되었다. 찰칵.
이제 본관 전시를 보기에 앞서 출출해진 우리는 다시 운이 좋게 테라스에 자릴 잡고 맥주 한 병과 빵 하나를 나눠 먹었다. 벌써 오후가 깊어가고 있었다. 해는 기울었고 그만큼의 그늘이 테라스에 드리워져 있었다. 워터가든의 잔잔한 물결도 어느덧 온기가 느껴지기보다는 손을 대면 물씬 초겨울의 정취가 느껴질 듯 냉랭하게 보였다. 오래 앉아 있지 않았다. 페이퍼갤러리와 기획 전시인 <사유로서의 형식>을 관람해야 했기 때문.
페이퍼갤러리는 뮤지엄 산의 주인인 한솔제지가 수집해온 종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료들이 전시된 공간이었다. 종이. 그것은 중국에서 만들어져 아시아로,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일찍이 문자가 있었고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온 중국에서 종이가 먼저 발명이 되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본관의 공간은 전시를 보러 가는 둘레와 그곳을 빠져나오면 늘 보이는 트인 창 그리고 그 앞의 의자가 꾸준히 반복이 되었다. 그러나 둘레는 급격하게 꺽어지며 시나브로 오르는 경사와 길게 뻗은 직선의 폭이 좁게 느껴지는 길과 길이 만나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가도록 짜여져 있었다. 하지만 내내 공간과 공간에 스미는 빛이 주는 풍요에 감탄을 하면서도, 우리는 지쳐버렸다. 그래서 기획 전시를 볼 무렵쯤 되어서는 너무 지친 나머지 걸음의 속도를 높이기에 이르렀고, 보이는 의자에 쉬어야 했으며 어느새 신속하게 마지막 전시 공간인 1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래도 아쉬움 없는 관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전시를 본 건지, 공간 자체를 구경한 건지 분명하게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넉넉하게 만족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키 낮은 창과 미술관에 온 아해들






다섯시가 다 되어 본관을 빠져나온 우리를 맞은 건 쌀쌀한 공기와 어렴풋 들리는 피아노 소리, 분주하게 야외 공연 준비를 하는 뮤지엄 스텝들의 모습이었다. 피곤했지만 아쉬운 눈빛으로 본관을 거듭 돌아보며 왔던 길을 되돌아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플라워가든을 거쳐 웰컴센터로 돌아왔다.



한기가 가득 느껴지는 오후와 저녁의 교차점이었다. 우리는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서울에 가는 길에 여주에 들러 막국수를 먹기로 하고서는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은 한적한 2차선, 굽이길이 수없이 이어지는 길을 알려주었고 지나는 자동차가 거의 없는 그 길을 한 시간 가량 달리고 달려 여주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우리가 들른 행정구역은 다이내믹했는데, 원주에서 시작해 횡성을 스치고 양평을 건너서야 여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행정구역의 경계가 우리가 거쳐온 길만큼이나 구불구불한 모양이었다.
홍원막국수. 단 번에 검색을 해서 찾아간 그곳은 별관이 있을 만큼 규모가 있는 곳이었고, 손님도 끊이지 않고 꾸준했다. 우리는 편육과 비빔, 물막국수를 주문하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금세 나온 편육을 비롯해 막국수를 배부르게 먹었다. 맛은, 편육은 평이했고, 막국수는 기름을 많이 쳐서 그런지 고소했지만 다소 느끼했다. 육수는 진했고, 면은 잘 삶겨져 있었다. 결론은 보통.
다시 차를 몰아, 국도를 타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달려 집에 돌아오니 아홉시. 이틀간의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2014. 10. 26.

2014/11/04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나에게 그 예로 들어 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 
..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 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모디아노의 정서는 대체로 쓸쓸하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 같은 류의 쓸쓸함, 혹은 시린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깊어가는 가을, 이보다 더 어울리는 소설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지금의 독서는 행운이다. 서둘러 읽지 않겠다.

고 했지만, 이미 다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