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4

모음 그리고 모음들

그래, 나는 숙취에 지배당하지 않으려 기어코 집을 나섰다. 날씨는 놀라울 정도로 포근했고, 눌러쓴 비니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꼼짝 않고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길을 걸었다. 나가기 전, 무수하게 떠올렸던 산책길은 밖으로 나가서야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다. 꺽이는 방향이 곧 산책길이 되었는데, 길게 길을 이을 생각이 없었기에, 한숨만 짓곤하는 콘크리트 길을 따라, 걷고, 두리번거렸다. 
처음 가는 길엔, 낯선 오래된 집들이 주인 없이 방치돼 있었다. 마치 내가 쓰는 글처럼, 지나치게 낡은 것이다.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어제 또 잠이 들었겠구나. 입안엔 어젯밤 들이킨 술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 술내가 진동을 했다. 우리는 방어와 숭어를 큼지막하게 썬 상을 마주하고 옛 소주 세 병을 거뜬히 비웠다. 이야기는 산을 오르느라 버거운 듯했다. 이차는 클라우드 맥주와 함께 우리집 거실. 녀석이 좋아하는 넥스트의 음악을 배경으로, 녀석은 아직 올라야 할 산이 남았는지 무어라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나는 일어났다. 아무도 모르게. 
종착점은 정해둔 출발이었다. 커피를 사야 했다. 日常에 안 간 지 꽤 오래되었건만, 이제는 부러 성북동으로 향하지 않는다. 동네에 또 하나의 아름다운 커피집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우리의 남미 여행을 미리부터 힘껏 끌어당기기 위해 peru를 샀다. 음악은 카잘스의 바흐. 주말, 오후가 간다.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 마치 한 젊은이가 시험 보는 날이나 결투하는 날, 제시된 질문이나 총알이 자기가 가진, 또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지식이나 용기에 비해 아주 하찮게 여겨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내 정신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복제품 밖으로 ‘성당 정문의 성모상’을 높이 세우면서 복제품을 위협하는 변전으로부터 격리하여, 설령 복제품이 파괴된다 할지라도 성모상은 온전하게 남아 이상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토록 수천 번이나 새겨 보았던 조각이 이제 돌이라는 그 고유 속성으로 환원되어 내 팔이 미치는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선거 포스터와 내 지팡이 끝과 경쟁하며, 광장으로 이어져 큰길로 진입하는 부분과 분리되지 않고, 카페와 합승 마차 사무실의 눈길을 피할 수 없어 그 얼굴에 석양빛의 - 그리고 몇 시간 후에는 곧 가로등 불빛의 - 절반을 받고, 어음할인 사무소가 나머지 절반 빛을 받으며, 이 신용 은행 출장소와 동시에 제과점 부엌에서 나오는 악취에 배어 ‘개체’의 폭력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자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 돌 위에 내 이름을 새겨 놓고 싶었다면, 그건 바로 성모상이, 저 유명한 발베크의 성모상이 내가 이제껏 보편적인 삶과 신성불가침의 아름다움을 부여해온 유일한(슬프게도 단 하나임을 뜻하는) 조각상이었기 때문인데, 이제 그것이 이웃집과 똑같은 그을음으로 때가 잔뜩 낀 몸에서 때를 벗겨 내지도 못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모여든 모든 찬미자들에게 내 분필 조각 자국과 내 이름 글자를 함께 전시할 것이었다. 또 끝으로,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욕망해 왔던 불멸의 예술 작품인 성모상은 이제 성당과 함께 내가 그 높이를 재고 주름살을 셀 수 있는 작고 늙은 돌로 된 노파로 바뀌어 있었다. 시간이 흘렀고 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거기서 할머니와 프랑수아즈를 기다려 함께 ‘발베크 해변’으로 가야 했다. 발베크에 대해 내가 읽은 글과 스완이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정말 근사하다네, 시에나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지.” 나의 이런 환멸에 대해 난 여러 우발적인 이유들, 즉 그때 좋지 못했던 내 몸 상태나 피로, 사물을 제대로 바라볼 줄 모르는 무능력을 탓하면서, 나를 위해 예전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도시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어쩌면 머지않아 캥페를레의 진주 빛 비 한가운데로, 시원한 물방울 소리 속으로 뚫고 들어갈 것이고, 또 퐁타뱅을 적시던 그 초록빛과 분홍빛 반사광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발베크로 말하자면, 내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지금까지 완전히 밀폐한 채로 가두어야 했던 이름을 내가 방긋 열어 놓았다는 듯이, 또 그 이름이 내가 조심성 없이 제공한 이런 출구를 이용해 그때까지 그 안에 살던 모든 이미지들을 내쫓았다는 듯이, 전차며 카페며 광장을 지나가는 행인들이며 할인 은행 지점이 어떤 외부 압박과 압력 공기의 힘에 의해 발베크라는 음절 안으로 밀려와서는, 음절이 그 위로 닫히면서 페르시아 풍 성당 정문을 감싸도록 내버려 두고 또 계속해서 그것들을 음절 안에 가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고장의 이름 - 고장>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 


내 건강이 나아져서, 비록 발베크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한번은 노르망디나 브르타뉴 건축물과 경관을 보기 위해 그처럼 상상 속에서 여러 번 탄 적 있는 1시 22분 기차를 타는 것을 부모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나는 우선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 내려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번 그 도시들을 비교해 보았지만,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그 개별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어떻게 더 아름다운 도시를 고를 수 있단 말인가. 불그스름하고 우아한 레이스 안에서 그렇게도 높이 솟아 있고 꼭대기가 마지막 음절의 오래된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이외(Bayeux). e 모음 위 방점이 오래된 유리창을 검정나무 같은 마름모꼴로 나누는 비트레(Vitré). 달걀 껍질의 노란색에서 진주 빛 회색에 이르는 희끄무레하고 부드러운 랑발(Lamballe). 기름지고 노르스름한 마지막 이중모음이 버터로 만든 탑을 장식하는 노르망디의 대성당 쿠탕스(Coutances), 마을의 고요 속에 역마차의 소음과 함께 파리가 뒤따르는 라니용(Lannion),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가 강물이 흐르는 시적인 장소의 길 위에 흩어져 있는 그 우습고도 소박한 케스탕베르(Questambert)와 퐁토르송(Pontorson), 해초 한가운데로 강물을 끌어들이려는 듯 밧줄에 겨우 매인 듯한 베노데트(Benodet), 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천 모자의 옅은 분홍색 날개가 운하의 초록빛깔 물속에서 떨리며 반사되는 퐁타뱅(Pont-Aven), 중세 이래로 시냇물에 보다 단단히 메어 있고 그 사이를 졸졸 노래하며 검게 그은 은의 무딘 점으로 변한 햇살이 유리창 거미줄 너머로 그림을 그리듯 아주 섬세한 잿빛 진주 방울로 아롱지는 캥페를레(Quimperlé).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고장의 이름 - 이름>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  



  • 문체론적으로 유명한 이 문단은 프랑스 시인 랭보의 <모음(Voyell)>이라는 시 못지않게 주목을 받아 왔다. 문화적, 음성학적, 문자적인 함의로 가득한 이 문단에서 우선 장식 융단으로 유명한 바이외(Bayeux)의 yeu는 고풍스러운 금색을, 마름모꼴 유리창이 연상되는 비트레(Vitré)의 é는 검은색을 떠올리게 한다. 랑방(Lamballe)에는 하얀색(blanc)이란 음소가 들어 있으며, 쿠탕스(Coutances)의 an은 버터의 노란색을 환기한다. 라니용(Lannion)은 마부의 ‘가는 끈(lanière)’과 라퐁텐의 우화에 연유하며, 케스탕베르(Questambert)는 이 고장의 카망베르 치즈에서, 이밖에도 퐁토르송(Pontorson)의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는 이 도시 문양이 백조인 데서, 베노데트는 수초로 불리는 이 고장 수생식물에서 비롯되었다. 퐁타뱅의 모자 날개는 고갱의 그림 <브르타뉴의 네 여인들>에 나오는 하얀 천 모자와 연결되며, 플로베르를 매혹했던 ‘들판과 모래톱’의 투명한 시냇물 이미지는 캥페를레(Quimperlé)의 진주 빛(perlé) 방울로 표현된다. (김희영) 





모음들



A는 까만색, E는 백색, I는 적색, U는 초록색, O는 파란색, 모음들이여!
나는 언젠가 너희들의 은밀한 탄생을 말하리. 
A, 괴로운 악취의 윙윙거리는 빛나는
벌레들의 연모(軟毛)에 덮인 시커먼 콜셋, 

어두운 검은 만 : E, 아지랑이 천막의 눈부신 백색, 
자랑스럽구나, 빙하의 창, 흰 왕들, 산형화의 전율

I는 주홍빛 옷감, 뱉어내어진 피, 분노, 혹은 회개를 촉구하는 도취 속에서 웃음짓는 붉은 앵두빛 입술

U, 원환(圓環), 녹색의 바다의 거룩한 진동, 
동물의 흩어진 방목장의 평온함. 
연금술이 정려(精慮)하는 큰 이마에 새기는 주름의 평화

O, 이상한 환성에 넘친 지상(至上)의 나팔, 
‘천체’와 ‘천사’가 지나가는 정적
- 오오, 오메가, ‘그녀의 눈’의 보랏빛! 


<랭보 詩選> 아르튀르 랭보, 이준오 옮김, 책세상 





모음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 
언젠가는 너희들의 보이지 않는 탄생을 말하리라. 
A, 지독한 악취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터질 듯한 파리들의 검은 코르셋, 

어둠의 만(灣) ; E, 기선과 천막의 순백(純白), 
창 모양의 당당한 빙하들, 하얀 왕들, 산형화들의 살랑거림. 
I, 자주조개들, 토한 피, 분노나
회개의 도취경 속에서 웃는 아름다운 입술. 

U, 순환주기들, 초록 바다의 신성한 물결침, 
동물들이 흩어져 있는 방목장의 평화, 연금술사의 
커다란 학구적인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의 평화. 

O, 이상한 금속성 소리로 가득찬 최후의 나팔, 
여러 세계들과 천사들이 가로지르는 침묵, 
오, 오메가여, 그녀 눈의 보랏빛 테두리여!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아르튀르 랭보, 김현 옮김, 민음사 

2015/01/09

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있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기형도



그러나 아니다. 나는 광주에서 그 이상한 청년을 만난 것이다. 어쩌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사를 만나고, 그 역사의 허망함에 눈뜨고, 지상을 떠난 청년들이 묘역에 잠들어 있다. 나는 무엇인가. 가증스러운 냉담자인가, 나에게 있어 국토란 무엇인가.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 지금 이곳의 나는 무엇인가. 너 형이상학자, 흙 위에 떠서 걸어다니는 성자여. 어두워진다. 나의 희망은 좀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 이 게으른 손들.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살림 


나는 기형도와 막역한 친구인 박해현에게 시 '입 속의 검은 잎'에 나오는 '그 일'과 '그'는 무엇인지, '누구'인지 물었다. 박해현은 기억을 살려 내게 이메일로 알려주었다: "기형도의 그 시는 그가 여름휴가 중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온 뒤 쓴 작품입니다. 당시 그는 대구에서 광주에 갔습니다. 그 당시 모든 젋은이들이 그랬듯이, 기형도 역시 5.18 광주에 대한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에 나오는 대로 광주에 가서 택시를 타고 망월동에 찾아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에서 '그 일'은 5.18이고 '그'는 시인이 상상한 일종의 전형적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 검은 잎, 기형도, 그리고 김현>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망월동, 광주, 2015


삼 년 만에, 광주에 다녀왔다. 그때에도 이번처럼 광주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그래서 내게는 광주가 눈으로 인해 더욱 정겹다.

하지만 광주는 언제나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수치로 늘 내게 머물러 있다. 그 사이 나는, '오월의 사회과학'을 읽었고,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그리고 한동안 광주를 신나게 앓았다. 그러니 이번 여정이 내게는 나름 무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는 그 존재 자체로 별도의 의미 부여가 필요없는 곳이다. 그저 지금처럼 광주는 그대로 있어주면 그만이다. 정읍을 막 지난 열차는 언제 내린 것인지 모를 눈 사이를 미끄럽게 흘러간다. 

광주에 도착을 해 역전에서 백반을 먹고, 518번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좁은, '대도시'답지 않게 정겨운 도로를 따라 시내를 벗어나니 금세 무등이 훤히 펼쳐진다. 머리에 히끗히끗 모자를 눌러쓴 무등에 오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날씨가 매섭고 혼자가 아니기에 고집부릴 필요는 없다. 


기억이 수시로 교차하는, 아찔한 시간의 길을 따라 망월동에 갔다. 어쩐지 과하게 꾸민 듯한 공식 공간보다 나는 옛 묘역이 더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그곳으로 먼저 발길을 내밀었다.


어쩐지 외롭고 쓸쓸한, 그래서 낯익고 정겨운, 그리고 한없이 낮고 슬픈 옛 묘역은 여전히 투쟁이 진행중이었다. 5.18 이후로도 무수한 민주 투사들이 눈을 감기 위해, 비로소 안식을 찾기 위해 망월동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입구에 있는 꽃집에서 국화 세 송이를 샀다. 이곳이 지난번 내가 꽃을 산 그곳인지는 기억이 불확실하다. 그리고 공간도 기억으로는 변해 있다. 한 송이는 묘역 가운데에, 또 한 송이는 김남주 시인에게, 나머지 한 송이는 신묘역에 잠든 리영희 선생에게 드렸다. 

다시, 광주를 출발하여 서울로 간다. 아, 오래된 서울. 하지만 이 말조차 이젠 지나치게 낡았다. 그렇다. 모든 건 손댈 수 없을 만큼 낡아버렸다. 인생은 여행, 이라 누가 말했던가. 누가 노래하였던가. 우리는 늦게 잠에서 깼다. 외풍이 유독 심했던 페드로하우스에서 無는 병자처럼 잠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취객처럼 그러하였고. 하지만 여행은 여유의 다른 말. 우린 느리게 씻고, 느리게 아침식사를 했다, 콜드플레이를 들으며. 그리고 막 그곳을 벗어나려는 찰나, 손에 귤과 음료수를 들고 들어오는 페드로를 만났다. 

열린 장벽, 광주 폴리

어딘가로, 때때로 떠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고 그래서 이렇듯 일상의 틈을 비집고 거듭 떠나게 된다. 벌써 2015년. 다시 한 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시작되고, 그것을 맞이하는 일이란 다이어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달력을 한 장 새로이 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쉬운데 왜 인생은 지루하고 점점 비참해지는 걸까. 늘 같으면서도 새로운 듯 고민을 하는 똑같은 삶이란. 나는 이런 새해를 다시 맞기 위해 기형도를 읽는다.      1/4 日 몸살 


그는 첫 시집을 준비하면서 수록할 시 원고 뭉치를 내게 건넸다. 시집 제목은 <정거장에서의 추억>으로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는 첫 시집을 내기도 전에 두번째 시집 제목은 정해두었다고 했다. <내 인생의 중세>라는 시 도입부만 써놓은 상태였는데, 당시 <중세의 가을>을 탐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생의 중세를 경험하지 못한 채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는 내 추억의 빈집에서 여전히 종이를 마주하면 뭘 써야 할지 모르는 공포에 떨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공포를 즐기고 있다. 그는 한때 시 쓰기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해야 하는 '불행한 쾌락'이라고 말했으니까. 
<정거장에서의 충고 - 추억의 빈집> 박해현, 문학과지성사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않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기형도 

2015/01/08

난 행복해요,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해서는 불만이오

"나는 그저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싶어요." 공작은 계속했다. "알퐁즈 카르가 프러시아와의 전쟁 전에 이러한 명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전쟁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좋다. 그럼 먼저 그대들 주전론자들을 선두의 특별부대에 편입시켜 습격에도 돌격에도 전군의 선두에 세우리라!' 하고"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행복하다, 이런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