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9

(1702 홍성 이응노의 집) 풍경과의 말 없는 대화



홍성에 다녀왔다. 흐린 날이었고 비 소식이 있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수류산방의 도록을 미처 꼼꼼이 읽지 못한 채로 급하게, 쫓긴 듯 가게 되었다. 

홍성에 도착을 해 아내가 미리 찾아둔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으나 주일 휴무. 다시 핸들을 꺽어 빼뽀나루터 근처에 있는 참게탕집으로 가서 매운탕을 먹었다. 매운탕도 달달하니 맛이 좋았지만, 그보다 밥이 정말 맛있었다. 쌀이 토실하진 않아도 어찌나 찰지던지!
좀 쉬라며, 운전대를 잡은 아내 덕분에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내비게이션상으로 거의 다 와 가는 이응노의 집이 좀처럼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왔는지,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이에도 멀리에도 산이 있었고, 그 산은 높기도 하고 낮으면서 길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무표정의 콘크리트 박스 덩어리가 눈앞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이응노의 집이었다. 



겨울이라 노랗게 익은 벼처럼 색을 바꾼 굴곡진 너른 잔디밭 위로, 야트막한 뒷산의 형태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조용한, 하나의 풍경으로서 넌지시, 말은 없지만 마치 대화를 하고 싶은 듯, 그러면서도 수줍어 주춤거리는 듯, 서 있는 이응노의 집.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 주춤거리는 품에 안기고 싶지만, 동선은 서두르지 말라고 옷깃을 잡아챈다. 얇게 흐르는 용봉천의 물이 전진에 쉼을 준다. 그리고 저기, 코르텐강판으로 단정하게 치장을 한 다리가 기왕이면 이쪽으로 돌아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동쪽으로 걸으며 시선을 세우면 저멀리 용봉산의 잘생긴 윤곽이 호젓하게 느껴지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이응노의 집을 바라보면, 제멋대로 떨어트려 놓은 듯 보이는 덩어리들이 걸음걸음마다 얼굴을 달리하며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다리를 건너, 아직 피지는 못하고 피었던 흔적만 가득한 연밭을 천천히 지나며 주위의 풍경을 훑는다. 어느새 풍경의 품에 완전히 감싸인 듯 편안하다. 






좀처럼 걸음이 나아가지 않는다. 풍경에 감싸인 몸은 풍경의 사소한 변화에도 섬세하게 반응한다. 저토록 무표정 하면서도 할 말은 많은 듯한, 아니 어떤 말이라도 들어줄 듯한 덩어리들은 이미 그 자체로 풍경의 완전한 일부가 되어 있으면서도 마치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려 버리는 갈대잎처럼 걸음마다 얼굴을 달리 하니 몸은 성급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요리조리, 한참을 주변을 살피다 드디어 입장. 그토록 밖을 서성였음에도, 수차례 안면은 있어도 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왼쪽 터진 입구로 몸의 방향을 트니, 표정 없는 덩어리에 유일한 표정이라도 되는 듯 쾌적한 얼굴로 밖을 완전히 드러낸 유리 커튼월이 나타났다. 가까이엔 별동으로 된 북카페가, 멀리엔 이미 밖에서 그 호젓함을 생생하게 느낀 용봉산이 유리 커튼월 너머를 장식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뒤로 돌았다. 그리고 펼쳐지는 아늑한 풍경. 밖에서는 분명히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은 당연한 경사가 아주 완만하게, 기하학적으로 방향을 바꾸며 놓여 있었다. 그 아늑한 풍경 속 동선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경사 지붕으로 처리된 전시실은 외부에서의 소박함에 비해 높은 천정고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공간 하나 하나가 비록 크진 않아도 쾌적한 맛이 있었다. 전시를 보았다기보다 아주 만족스러운 건축적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안내 데스크에서 도록을 하나 사려고 했더니 머뭇거리면서 판매용이 아니라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게 '그냥' 준다는 거였다. 아, 맙소사, 수류산방에서 정성 들여 만든 이 아름다운 도록을! 



별동으로 이동해 라떼를 마시며 쉬었다. 전시동보다 작고 아담한 크기인 별동은 유리 커튼월도 낮게 세워져 있어 제한된 풍경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게 좀 더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밖으로 나와 뒷동산에 올라 전시동이 놓인 제각각의 모습만큼이나 서로 다른 얕은 경사의 지붕 너머로 용봉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천천히 돌며 한참을 '조성룡의 풍경'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는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여운 가득한, 잔잔한 감동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이곳에 자주 오고 싶다고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