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2

갈수록 문제는 생산영역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졌어요. 1980년대 이후 재생산 영역의 자본화가 된 거죠. 입는 것, 먹는 것, 감정을 교환하는 것, 지식과 가치관을 전수하는 것, 사랑을 나누는 것 등 인간 삶의 사적 영역이 모두 상품화되었죠. 인간이 자율성, 의지, 감정을 갖는 사회적 존재로 되는 전 과정이 시장에 의해 장악되고, 자본은 그로부터 초과 잉여를 쌓아가는 상황, 결국 우리는 손기술이나 숙련, 지혜를 가진 생산자가 아니라 단순한 상품 소비자로 전락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소비만을 부치기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돈'만 갈망하고, '돈'을 위해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조건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지난 7~8년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자본의 재생산적 전환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까 결국 에코페미니즘의 관점, 즉 생명, 돌봄, 상호의존성에 기반을 둔 자존과 자급의 관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이것을 대항의 무기로 삼지 않고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사적인 삶의 영역까지 자본(상품화)에 의존하게 되었는가 보았더니, 임금노동의 강도가 너무 세다는 거예요. 생산영역에서 노동착취가 심해질수록 소비에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과중한 일로 밤늦게 귀가하니까 저녁을 해 먹지 않고 외식을 하게 되잖아요? 자본주의사회의 생산 현장의 비인간화가 우리 삶을 소비주의로, 반생태적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경쟁을 붙이는 업적 중심 평가, 장시간-저임금 등의 노동조건이 개선되는 것은 생태운동의 측면에서도 불가결하다는 거예요. 자본에 의한 삶의 식민화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하고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내 의지에 의해서 내 삶을 내 손으로 영위하는 것,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는 게 된 것입니다. 
김현미, <녹색평론 151> 153-154쪽, '에코페미니즘-새판짜기의 비전과 실천', 2016년 11-12월

흥미롭게 읽은 좌담. 좀 더 본질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페미니즘은 자극적이고 그래서 늘 아프다. 

2017/03/21

봄과 함께, 춘분春分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동시에 낮이 밤보다 더 길어져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는, 그리고 제비가 날아온다는, 그래서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찾아온다는, 춘분. 

춘분이 되면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면서 날씨는 영하에서 영상으로 돌아선다. 그래서 춘분이 되면 겨우내 움츠렸던 풀과 벌레들이 기지개를 켠다. 우수, 경칩에서부터 벌레들은 깨어나 춘분이 되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또한 풀과 겨울을 견뎌낸 곡식과 작물들은 춘분을 기점으로 확연히 기운을 차린다. 밀, 보리의 새순이 돋고 땅속에 숨어 있던 마늘도 일제히 팡파르 불 듯이 땅속에서 새순이 고개를 쳐든다. 기죽어 있던 양파도 빳빳하게 줄기에 힘을 준다.
봄꽃들도 춘분이 지나야 일제히 만개한다. 개나리부터 목련과 진달래, 생강나무, 산수유가 꽃을 피워낸다. 따뜻한 남쪽에선 춘분 앞서 개나리가 핀다.
이런 춘분을 새해 첫날로 삼은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고대 중동 지역이다. 이 지역은 유목이 중요한 사회였기에 춘분에 힘을 받아 올라오는 목초에 의지해 살아야 했으므로 무엇보다 춘분이 중요했을 것이다.
우리도 춘분이 지나면 무엇이든 파종할 수가 있었으니 농경 사회에서도 춘분은 매우 중요한 절기다. 그런데 춘분 지나면 꼭 꽃샘추위가 찾아오므로 되도록 늦게 발아하는 씨앗들을 파종하는 게 좋다. 빨리 발아하는 것은 꽃샘추위가 지난 청명 즈음에 심는 게 좋다. 빨리 발아해서 꽃샘추위를 만나면 냉해를 입기 때문이다. 
안철환, <24절기와 농부의 달력> 94-95쪽, 소나무, 2011 

하지만 요즘은 그야말로 봄의 불청객 미세먼지 때문에 밖으로의 산책도, 안에서의 환기도 자유롭지 못하다. 안타까운 일. 그래도 몸이 반응하는 봄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길. 

2017/03/19

(1703 능동 꿈마루) 시간의 흔적 그리고 지금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1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공원 정문. 그곳을 통해 공원으로 들어서면 저기, 높다란 곳에 한눈에 보아도 웅장한 모습의 꿈마루가 늠름하게 뻗어 있다. 세월을 가늠케 하는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인 원경을 보며 걸음을 재촉하면 그만큼 더 거대해진 꿈마루 앞에 어느새 서 있게 된다. 



꿈.마.루. 세 글자가 저 웅장한 건물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생각은 육체가 그 안으로 스며들어가자마자 일순 사라진다. 왜 수류산방 심실장님이 꿈마루에 안 가보았냐고 물었는지, 몸이 먼저 알겠다는 듯 반응한다. 
분식점에서 사 간 점심을 먹기 위해 우측 경사로를 따라 피크닉가든으로 갔다. 지붕을 걷어내 기둥과 수평으로 뻗은 보만 남은 가든에는 색 바랜 바닥의 나무가 친근하게 발길을 유도하고 있었고 듬성듬성 기둥과 보 사이에 삐죽 고개를 내민 나무 몇 그루가 웰컴 투 '가든'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반쯤 볕이 드는 위치로 테이블을 옮겨 온이도 아내와 나도 식사를 했다. 먹으면서도 시선은 주위를 둘러보느라 분주했다. 세월은 속일 수 없다는, 풍부하게 골조에 남은 풍화의 흔적은 수십 년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달려들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아주 느리게 가든을 서성인다. 







가든 안쪽으로는 집 속의 집이라 불리는 화장실과 사무실이 보였는데, 적색 조적으로 단정하게 처리된 집들은 풍화에 젖은 가든의 골조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반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꼭 필요한 설비를 제외하고 남은 천장의 공간에는 원래의 골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칭얼대는 온이를 재울 겸 건물을 관통해 바깥으로 나가 건물 뒤편으로 갔다. 경사진 지형 탓에 건물 뒤편에 서니 시선 안에 건물 전체를 끝어당겨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육중해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조금 떨구자 방금 점심을 먹은 피크닉가든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자리에 다소 외롭게 서 있는 산수유나무엔 노란꽃이 피어 있었다. 





왼쪽 입구에 서면 캔틸레버가 되어 뻗어나온 골조가 건물이 만들어질 당시 위용을 뽐내는 듯 보이지만, 이미 그곳은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다. 원래 실내 공간임을 암시하는 듯한 철골조가 콘크리트골조와 조화를 이루고 쾌적하게 뚫려 있는 정면으로 밀려드는 도시의 원경은 쏟아지는 햇빛 탓에 전진을 방해받는다. 게다가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라니!







유연한 계단의 반복된 흐름을 따라 어느새 3층에 도착하니 상대적으로 낮은 층고가 마치 공간을 납작 업드리게 한 듯하고, 한켠에 놓인 피아노에서는 젋은 연인이 앉아 알 수 없는 연주를 이어가다 시선을 서로에게 고정시킨다. 하지만 공간의 연주가 이어진다. 아래로 뻥뚫린, 여전히 당당한 보 사이로 주말의 한가로운 행렬의 발길이 드문드문 꿈마루를 찾는다. 













나는 건물 끝에, 어느새 서 있다. 시간은 잊은 지 오래, 소음은 귀에 미처 와닿지 못하고 귓등을 스쳐 지난다. 
잠시 곁을 떠난 아내와의 재회는, 여전히 이곳이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였다면 우아하게 커피라도 마시며 서서 라운드를 바라봄직할, 건물의 상징처럼 보이는 길게 뻗은 장소에서 이뤄진다. 감동을 주체할 수 없기에, 잠시 쉬기로 한다. 따순 볕을 받으며 나는 유기농아이스크림을, 산수유가 만발한 계절에 니트에 코트 차림인 아내는 뜨거운 라떼를 마신다. 











중부지역을 휩쓴 미세먼지는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아니, 나를 잃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꿈마루를 서성인 시간은 어느새 두 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또 한 가지 더한 건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느슨하게 했다고 할까요. 꿈마루에선 모퉁이를 돌아 들 때마다 바깥이 계속 따라 들어옵니다. 바람도 안으로 들어오고, 눈이 오는 날, 비 오는 날... 꿈마루를 거쳐서 공원의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지만 여러 가지를 감각할 수 있게요. 그건 곧 이 도시 안에서, 우리가 일상 생활하면서 별 신경 쓰진 않지만 늘 느끼게 되는 것이기도 하죠. 꿈마루를 들어가서 점점 안으로 공간이 진행되면서, 계속 바뀜이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바뀌면서, 하여튼 조금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그런 공간. 어떻게 보면 꿈마루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긴 빛도 있어요. 요즘 법규에 맞추느라고 엘리베이터를 하나 놓으면서 그 위 지붕을 뜯었어요.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통을 타고 빛이 천장부터 아래층까지 들어옵니다. 사실 꿈마루 안이 어둑어둑해요. 유지관리 비용을 낮추려고 조명기구도 최소로 줄였고 일체 시설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깥같죠. 여기저기서 빛이 들어와 난반사하고 바람도 통하거든요. 음, 기분이 아주 나브지 않은 다리 밑 같다고 할까요. 우리가 그 어두운 다리 밑 같은 커다란 공간을 통과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스케일이 바뀌고, 조금씩 조금씩 다른 농담의 빛이 섞여 들고, 환한 피크닉가든을 거쳐 더 밝은 북카페가 저기 위에 보입니다. 오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오히려 애들은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거 같아요. 들락날락 계속 위로 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빛의 바뀜에 대한 어린이 나름의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한 거니까요. 구조물을 만들지 말고, 움직임이 일어나게 만들자, 그저 그 공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흐름들을 따라서 잘 갈 수 있도록 제공만 하자, 어느 정도 들어맞은 것 같아요. 
조성룡, <기품 있게 늙어감에 대하여, 꿈마루>, 웹진 民硏, 2015년 10월 통권 054

꿈마루에서 나와 공원을 빠져나가려 꿈마루를 등지고 걷는 동안 수차례 뒤돌아 보았다. 나였을까, 자꾸만 할 말이 있는 듯, 그래서 한 번 더 보고 싶어했던 건. 꿈마루에 쌓인 거대한 시간의 층위를 불과 두 시간여 만에 온몸으로 실캄케 해 준 조선생님의 안목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1703 능동 꿈마루) 도시에서 공간을 기억하는 방법

세월이 쌓이면 어떤 건물이든 가치를 갖게 된다. 공간을 완성시키는 것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곧 건물과 관계 맺어온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이 스며든 공간을 지우고 헐기에 바빴다. 꿈마루의 부활은 그런 점에서 복원 과정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새로 짓는 것만이 건축이 아니라 되살리는 건축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먼 길 돌아와 우리 앞에 선 꿈마루 앞에선 이제 아이들이 뛰논다. 이 건물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지 알 리 없는 저 아이들의 웃음소리야말로 이 건물을 진정으로 완성시킨 마지막 마감재일 것이다. 
구본준, <마음을 품은 집> 76-77쪽, 서해문집, 2013 



나는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 즉 기본계획만 하기로 하고 시작했어요. 서울시에 새로운 설계를 위한 예산이 없으니 정상적 설계를 할 수 없었죠. 우선, 공공 건물은 행정 상황이나 재정 조건이 부합이 되지 않으면 진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 지으려고 했던 작은 건물의 예산에서 더 이상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큰 건물을 고쳐 쓰도록 맞출 방법을 내야 했습니다. 실은 처음 최광빈 국장에게 남기자고 제안을 했을 순간 아이디어는 이미 떠올라 있었습니다. 관리소에서 요구한 시설은, 사무실, 회의실, 통신실, 화장실 등 해서 기존 공간의 삼분지 일쯤 되었습니다. 교양관 전체 면적이 오천 평방미터쯤 되는데 필요한 것은 천사백 평방미터 정도, 예산도 딱 그만큼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더 나간 건, 지어진 다음 유지관리도 그 삼분지 일의 면적을 유지할 돈으로 할 수 있게 맞추려고 했습니다. 유지 부분이 더 중요할 수도 있고요. 공원 안의 시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역 고가 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쓸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둥이나 지붕은 있지만 바깥으로 바꿔 버린다는 것인데요. 건축이라는 것이 쓸모가 끝났을 때, 또는 기능이나 조건이 바뀌었을 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새로 쓸 수 있는 부분만 살리고, 이것을 풍화되는 과정 속에 두자는 거죠. 
조성룡, <기품 있게 늙어감에 대하여, 꿈마루>, 웹진 民硏, 2015년 10월 통권 054호


올해 세 번째 답사 장소, 능동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우리가 도시에서 살며 어떤 공간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그 다양한 방법 중 건축이 담당하는 역할도 있을 터인데, 꿈마루는 그 역할을 아마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1702 홍성 이응노의 집) 풍경과의 말 없는 대화



홍성에 다녀왔다. 흐린 날이었고 비 소식이 있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수류산방의 도록을 미처 꼼꼼이 읽지 못한 채로 급하게, 쫓긴 듯 가게 되었다. 

홍성에 도착을 해 아내가 미리 찾아둔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으나 주일 휴무. 다시 핸들을 꺽어 빼뽀나루터 근처에 있는 참게탕집으로 가서 매운탕을 먹었다. 매운탕도 달달하니 맛이 좋았지만, 그보다 밥이 정말 맛있었다. 쌀이 토실하진 않아도 어찌나 찰지던지!
좀 쉬라며, 운전대를 잡은 아내 덕분에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내비게이션상으로 거의 다 와 가는 이응노의 집이 좀처럼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왔는지,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이에도 멀리에도 산이 있었고, 그 산은 높기도 하고 낮으면서 길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무표정의 콘크리트 박스 덩어리가 눈앞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이응노의 집이었다. 



겨울이라 노랗게 익은 벼처럼 색을 바꾼 굴곡진 너른 잔디밭 위로, 야트막한 뒷산의 형태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조용한, 하나의 풍경으로서 넌지시, 말은 없지만 마치 대화를 하고 싶은 듯, 그러면서도 수줍어 주춤거리는 듯, 서 있는 이응노의 집.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 주춤거리는 품에 안기고 싶지만, 동선은 서두르지 말라고 옷깃을 잡아챈다. 얇게 흐르는 용봉천의 물이 전진에 쉼을 준다. 그리고 저기, 코르텐강판으로 단정하게 치장을 한 다리가 기왕이면 이쪽으로 돌아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동쪽으로 걸으며 시선을 세우면 저멀리 용봉산의 잘생긴 윤곽이 호젓하게 느껴지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이응노의 집을 바라보면, 제멋대로 떨어트려 놓은 듯 보이는 덩어리들이 걸음걸음마다 얼굴을 달리하며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다리를 건너, 아직 피지는 못하고 피었던 흔적만 가득한 연밭을 천천히 지나며 주위의 풍경을 훑는다. 어느새 풍경의 품에 완전히 감싸인 듯 편안하다. 






좀처럼 걸음이 나아가지 않는다. 풍경에 감싸인 몸은 풍경의 사소한 변화에도 섬세하게 반응한다. 저토록 무표정 하면서도 할 말은 많은 듯한, 아니 어떤 말이라도 들어줄 듯한 덩어리들은 이미 그 자체로 풍경의 완전한 일부가 되어 있으면서도 마치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려 버리는 갈대잎처럼 걸음마다 얼굴을 달리 하니 몸은 성급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요리조리, 한참을 주변을 살피다 드디어 입장. 그토록 밖을 서성였음에도, 수차례 안면은 있어도 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왼쪽 터진 입구로 몸의 방향을 트니, 표정 없는 덩어리에 유일한 표정이라도 되는 듯 쾌적한 얼굴로 밖을 완전히 드러낸 유리 커튼월이 나타났다. 가까이엔 별동으로 된 북카페가, 멀리엔 이미 밖에서 그 호젓함을 생생하게 느낀 용봉산이 유리 커튼월 너머를 장식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뒤로 돌았다. 그리고 펼쳐지는 아늑한 풍경. 밖에서는 분명히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은 당연한 경사가 아주 완만하게, 기하학적으로 방향을 바꾸며 놓여 있었다. 그 아늑한 풍경 속 동선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경사 지붕으로 처리된 전시실은 외부에서의 소박함에 비해 높은 천정고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공간 하나 하나가 비록 크진 않아도 쾌적한 맛이 있었다. 전시를 보았다기보다 아주 만족스러운 건축적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안내 데스크에서 도록을 하나 사려고 했더니 머뭇거리면서 판매용이 아니라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게 '그냥' 준다는 거였다. 아, 맙소사, 수류산방에서 정성 들여 만든 이 아름다운 도록을! 



별동으로 이동해 라떼를 마시며 쉬었다. 전시동보다 작고 아담한 크기인 별동은 유리 커튼월도 낮게 세워져 있어 제한된 풍경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게 좀 더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밖으로 나와 뒷동산에 올라 전시동이 놓인 제각각의 모습만큼이나 서로 다른 얕은 경사의 지붕 너머로 용봉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천천히 돌며 한참을 '조성룡의 풍경'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는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여운 가득한, 잔잔한 감동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이곳에 자주 오고 싶다고 말을 했다. 

















2017/03/11

존 버거의 스케치북








빈 컬렉션에서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 나와, 길 건너편에 있는 온그라운드갤러리에서 존 버거의 전시를 보았다. 고요하고, 은은한, 한 편의 산문 같은 전시. 4월 7일까지. 아마도 빈 컬렉션에 한 번 더 갈 듯한데, 전시를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전시 소개: 존 버거의 스케치북

통의동 빈 컬렉션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는 보질 못했다.

같이 보면 좋은 기사: 골목 위의 건축가

2017/03/10

(1702 홍성 이응노의 집) 이응노의 집, 집 이야기

고암 이응노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홍성 땅에는 고암의 예술혼이라는 켜가 잠재해 있습니다. 선생의 생가 터에 이응노의 집을 새로이 지으면서, 이 땅에 깃든 그 켜를 찾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마을 쌍바위골 사람들이 아침저녁 지나다니는 다리를 건너 시골길을 따라 이 집에 이르게 됩니다. 숲자락에 은근히 가리운 건물은 농촌 풍경에 그저 어우러지기를 바랍니다. 오래된 지도에 나온대로 구불구불 되돌려 놓은 길을 따라 연밭과 밭두렁을 거닐 수도 있습니다. 선생의 고향집 그림대로 지은 초가 곁으로 대숲과 채마밭도, 원래 그렇게 있었던 듯 되살렸습니다. 고암 선생이 늘 보던 그 고향 풍경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 풍경은, 우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담고 있는 고향 풍경이기도 합니다.
전시 공간은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긴 홀에 서로 다른 네 개의 전시실이 이어진 모양입니다. 전시실 사이사이 열린 틈으로 햇빛과 풍경이 드나들며 종일 홀에 결을 드리웁니다. 기념관의 외관은 황토결이 부드럽지만, 안쪽 홀에서는 사뭇 긴장감이 느껴져 대비를 이룹니다.
이응노의 집에 이르는 길은 예술로 난 길이기 이전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근현대사의 질곡 위에 난 길이자, 그 속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굴절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고암 이응노 선생이 그리던 고향 마을, 고암 선생이 걸어갔던 이 길을 걸어오고 지나갈 여러분의 마음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예술의 켜, 새로운 역사의 켜가 이 땅에서 다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조성룡, <이응노의 집, 이야기> 121쪽, 수류산방, 2011

2017/03/01

수원화성의 탄생

정조는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금의 수원시 융릉으로 옮기고 명칭도 현륭원으로 바꿀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 명예회복 사업의 마지막 단계였다. 원래 이 자리는 화성읍치소가 있었던 궁벽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는 명분으로 세자릉원의 이장지로 선택됐고, 근처에는 용주사를 새로 지어 능원의 원찰로 삼았다. 아울러 수원읍의 치소와 주민들을 새 장소로 이전시켜야 했다. 신도시 건설의 명분을 찾은 것이다. 신도시의 입지로 결정된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화성역, 팔달산 아래였다.
구 수원읍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갓진 곳이라면, 신 수원읍을 동북남 3면이 툭 터진 곳으로 서울과 삼남을 잇는 길목에 위치했다. 교통이 편하면 사람이 꾀고, 사람이 많으면 상업이 발달한다. 애초부터 새 수원을 상업이 발달한 자족적 도시로 성장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한 입지 선택이었다. 18세기는 사회 각 분야의 생산력이 확대되고, 그 잉여 생산물들이 유통될 수 있는 상업이 발달하던 시기였다. 사회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폐쇄적이고 전통적인 도시를 버리고 개방적인 새로운 도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1> 340-342쪽, 돌베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