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한 점 새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 칠흙 같은 어둠. 눈을 감았다 떠본다.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어둠은 나의 존재 자체를 의심케 한다. 이따금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나의 청각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해 줄 뿐이다. 손을 더듬거려 옆 사람의 존재를 확인한다. 4·3 당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에 숨어 있던 120명 주민들은 동굴 속 어둠에서 죽음의 공포를 달랠 수 있었을까.
1948년 11월 15일, 안덕면 동광리에서는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마을 유지 10명으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사흘 뒤 마을은 불태워졌다.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목숨을 부지할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해안 마을로 내려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일단 군인들이 없는 산으로 들어가 숨는 길밖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춤추는 모양’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무등이왓’, 삼을 재배하던 ‘삼밧구석’ 등 안덕면 동광리의 자연마을 사람들은 마을 목장 안에 있는 용암 동굴 큰넓궤에 숨어들었다. 한 사람이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은 동굴은 입구 주변이 나무와 덤불로 덮여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 큰넓궤가 숨을 만하다고 알려지면서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120명이나 됐다.
굴 입구를 기어 들어가면 넉넉히 일어설 수 있을 만큼 동굴 천장이 높아진다. 5미터쯤 안쪽에 절벽이 나타난다. 4미터 높이의 절벽을 내려가는 일은 쉽지 않다. 발 디딜 곳을 찾으려면 아래에서 적어도 두 사람이 도와줘야 한다. 우리는 가져간 사다리를 이용해 아래로 내려갔다. 절벽 아래에는 날카로운 용암석들이 무더기 지어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에 피해 있던 주민들은 나름대로 내부 수칙을 정해 질서 있게 피난 생활을 했다. 절벽 아래 제법 넓은 공간의 양쪽 벽 아래에는 깨진 항아리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간장, 된장, 식수 등을 담았던 항아리들을 이곳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이 공간의 한쪽 구석 외진 곳은 화장실로 사용됐다. 공간 안쪽에는 1미터 높이의 돌담을 쌓아놓았다. 방호벽이다. 이 방호벽을 지나야 깊은 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잠을 자거나 피신하던 공간은 굴의 깊은 안쪽에 있다. 바위 천장이 낮아 30여 미터를 기어가야 한다. 바닥과 천장 사이가 1미터 정도 되는 곳은 장갑 낀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리를 편 채 기어갈 수 있었지만, 낮은 곳은 높이가 50~60센티미터에 불과해 낮은 포복을 해야 했다.
힘들게 기어가는 동안 동굴 천장이 조금만 내려앉아도 그대로 깔리거나 갇힐 수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다. 날카로운 바닥에 무릎이 닿지 않게 하려면 손바닥과 발끝으로 기어가야 했다. 몇 미터 가지 못해 무릎으로 기기 시작했다. 숨이 턱에 차올랐다. 중간 지점에서 한참이나 숨을 돌리고서야 넓은 공간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굴 안쪽에는 폭과 길이가 10~30미터쯤 되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큰 굴곡이나 경사는 없었지만 날카로운 용암석이 울퉁불퉁하게 바닥을 이루고 있어서, 두꺼운 이불을 깔았다고 하더라도 반듯이 드러누울 수는 없는 곳이었다. 바닥 형태에 몸을 맞취 웅크린 자세로밖에는 견딜 수 없었을 것 같다. 굴 안에는 오른쪽으로 1.5미터 높이의 또 다른 굴이 뚫려 있어, 2층 구조를 하고 있었다. 당시 큰넓궤에 먼저 들어온 주민들은 1층에,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2층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200여 미터 떨어진 도너리 오름에 보초를 세워 군인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물을 길어오거나 식량을 준비하는 등의 역할을 분담했다. 그렇게 120명이 이곳에서 50일을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을철 수확도, 소, 닭, 돼지 등 기르던 가축도 포기한 채 오로지 산목숨 지키는 것만이 목적이던 주민들에게 큰넓궤는 더 이상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굴에서 나와 마을로 내려갔던 사람이 토벌대에게 붙잡히면서 큰넓궤의 위치가 알려지고 만 것이다. 토벌대의 앞장을 서서 큰넓궤로 향하던 이 사람이 토벌대를 따돌리고 달아나 굴 안으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굴 안에서 이불을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불을 지폈다. 굴 밖으로 매운 연기가 나가자, 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 토벌대는 총만 난사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철수했다. 지혜와 용기로 죽음을 모면한 주민들은 날이 밝기 전 굴을 빠져나와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져 눈 덮인 한라산을 헤매던 주민들은 하나둘씩 토벌대에게 붙잡혔다. 영실 근처에 볼레 오름에 숨어 있던 주민들은 이듬해 1월께 대부분 토벌대에게 사로잡혔다. 동광리 주민들은 산으로 피했던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서귀포의 단추 공장 건물에 갇혀 있다가 정방 폭포 위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다.
4·3이 끝난 뒤 천행으로 살아남은 유족들은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수소문 끝에 학살 현장을 찾았으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시신들이 바다로 떠내려가기도 했고, 정방 폭포 위 학살터에는 5평 넓이의 구덩이에 유골들이 뒤엉켜 있어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유족들은 죽은 이들의 혼을 불러 헛봉분을 쌓고 묘를 만들었다. 동광육거리 근처 밭에 있는 ‘헛묘’는 임문숙 씨가 어머니와 아내, 사촌 형 부부, 제수 등 아홉 명의 묘를 조성한 것이다.
<이것이 제주다> 고희범,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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