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25

성북동을 위하여 - 수화 김환기

樹話, 부암동 환기미술관

순서가 뒤바뀐 듯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1세대 추상화가 수화 김환기를 화가가 아닌 건축물로 먼저 대하고 알았다. 부암동 환기미술관 말이다. 부암동에는 수화가 타계하고 김향안 여사가 생존해 있을 때 건립한 환기미술관이 있는데, 90년대 초, 미술관 건립부지로 그들 부부가 한국전쟁 전후로 살았던 성북동을 생각했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성북동 지세와 유사한 지금의 위치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집을 구하는 친구에게 나는 성북동으로 오기를 권한다. 그러면 대개는 성북동은 안 좋아하는 모양이다. 심한 친구는 성북동은 못살 곳으로만 안다. 교통이 불편한 것을 첫째 흠으로 잡는다. 실은 성북동이 좋다는 것은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뱅뱅 도는 세상이다. 헌데 불편한 성북동으로 왜 오라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차 머리에까지 도보로 20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성북동은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꽃이 피고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 달도 산협의 달은 월광이 다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환기미술관

8월의 쏟아지는 비를 뚫고 처음 찾은 부암동은 덕분에 한적했고 미술관의 분위기는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수화는 더욱 환상적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성북동을 위하여 - 수화 김환기>를 쓰고 있다. 
그때 부암동에서 수화를 처음 만나고 그가 쓴 글을 모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읽고 그의 그림을 접하면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수화가 성북동에 살게 된 이력도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의 성북동엔 그가 김향안 여사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수향산방이 남아 있지 않다(대신 그가 성북동에 살 적에 그렇게 성북동에 와 같이 살자고 했던 혜곡 최순우의 집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재단법인 내셔널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매입,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때때로 그는 나를 성북동 자기 집 이웃으로 이사하라고 권했고 나를 위해서 그는 그의 바로 이웃집을 비롯해서 그럴싸한 집들을 몇 번이나 찾아서 보여 주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성북동 골짜기가 너무 호젓해서 나의 집 식구는 늘 술에 취해 늦게 돌아오는 나를 탓 삼아서 좀처럼 성북동 이사를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북동 수화 이웃으로 이사하는 일은 유산이 되었다. 그가 영영 가 버린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새삼스러워진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천장이 얕은 좁은 지프차 속에서 그 큰 허우대를 활등처럼 구부리고 같이 앉아 공항으로 나가는 동안 그는 털썩거리는 차 속에서 몇 번이고 "거지 같은..." "거지 같은..." 하는 식의 알 듯 모를 듯한 허탕지거리를 뇌까렸고, 나는 수화에게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고 당부를 했다.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최순우, 학고재 

그의 호, 수화의 수(樹), 향안 여사의 향(鄕)을 합하여 이름 지은 수향산방은 원래 미술사학자였던 근원 김용준이 자신이 살던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겨준 집이다. 수화는 이곳에 살며 성북동의 정취를 사랑하였고 그림을 그렸으며 그가 평소 아끼던 항아리를 한가득 놓아두기도 하였다.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에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노시산방이 지금쯤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도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근원수필> 김용준, 열화당 

성북동, 성북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먼저 떠올릴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로 인해 성북동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쉽게 그 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인데, 여기 이산(怡山) 김광섭 시인의 또 다른 시가 있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수화가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한국에서 연락이 오기를,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하니 출품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김향안 여사는 심사위원이라면 모를까 작품 의뢰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화를 냈다 한다. 하지만 수화의 동의로 작품을 출품하게 되고, 그 작품으로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때 수화가 출품한 작품이 이산의 <저녁에> 구절을 인용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뉴욕시절의 추상화들은 대부분 ‘무제’로 남겨졌다. 


2014. 7. 20. 제주, 두모악갤러리 무인찻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