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03

내게 소설에 대해 가장 많은 걸 가르쳐준 이는 역시 카버인 것 같다. <대성당>의 작가. 그중에서도 내겐 <칸막이 객실>이 교과서다. 기억에서 지울 수도 돌아가 고칠 수도 없는 한 순간을 팔 년 동안 외면해온 쓸쓸한 이의 이야기인 이 소설에는, 이미 그 한순간에 제 삶이 다른 궤도로 접어들었음을 뒤늦게나마 불현듯 깨닫는 장면이 있다. 지각(知覺)의 지각(遲刻). 그런데 정작 소설이 문제 삼는 건 깨달음이라기보다는 그 이후다. 팔 년 동안 엉뚱한 곳을 이방인처럼 헤매던 주인공 마이어스는, 비로소 깨달았음에도 다시금 모르는 곳으로 간다. 카버가 이걸 보여주는 방식은 너무도 절묘한데,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기차의 역방향 좌석에 앉아 눈을 감는 결말이 그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기차는 삶의 은유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그 삶으로부터 뒤돌아 앉은 한 사람. 그렇게 <칸막이 객실>은 산다는 건 다른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계속 길을 잃는 일일 뿐이라고, 그저 지난 삶 쪽을 바라보며 어딘가로 계속 떠밀려가는 것일 뿐이라고 가르쳐준다. 고작 그런 걸 무려 이렇게나 애쓰며 살고 있다니, 슬프다기보다는 차라리 우습지 않은가. 하지만 그 삶에서 단 한 발짝도 떨어질 수 없는 우리에게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그것이 줄곧 비극이기만 하다. 
_황현경, '뒤로 돌아', 악스트(2006. 11/12)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카버의 <칸막이 객실>을, 그래서 읽었다. 짧은 문장으로 단편을 써내려간 카버의 글은 쉬 읽히지만 멍한 여운을 남기는 때가 많다.

마이어스는 진행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차창 밖 시골 풍경이 점점 더 빨리 스쳐가기 시작했다. 한순간, 마이어스는 그 풍경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어딘가로 가고 있었고, 그걸 알았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방향이라면, 조만간 그는 알게 되리라.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사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떠들었다. 그에게는 그 목소리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목소리들이 움직이는 기차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마이어스는 자기 몸이 어딘가로 실려가고 있다는 걸 느끼는가 싶다가, 그렇게 뒤로 뒤로 잠 속으로 들어갔다. 
_레이먼드 카버, '칸막이 객실', <대성당> 86-87쪽, 문학동네, 2014(개정판) 

문학작품이 작가의 개성적 문체와 이야기로 보편성을 지녀 대중에게 울림을 줄 수 있을 때, 많은 이들은 좋은 작품이란 평을 하는 것 같다. 거기에 그리고 황현경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막상 카버의 책을 다시 펼쳤음에도 나는 황현경의 문장과 카버의 단편을 잇는 데 실패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마이어스가 객실을 비운 사이 사라진 손목시계의 행방과 그가 아들을 만나려고 했던 스트라스부르에서 내리지 않고 타고 있던 열차의 행선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