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대한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단지 복잡한 심상과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연상 작용까지도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공간을 마주한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기억의 둑이 탁 터지는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가 보고 경험했던 수많은 방과 풍경들이 일시에 흘러나왔다. 뿐만 아니라 조와 내가 이 공간을 만들어 내느라 들였던 그 많은 시간과 추억까지도 한꺼번에 떠올랐다.
마이클 폴란, <주말 집 짓기> 321쪽, 배경린 옮김, 펜연필독약
폴란의 책을 재밌게 읽고 있다. 벌써 다 읽었어야 하는 책을 괜히 끌고 있는 셈인데, 좀 더 붙잡아두고 싶은 구절들이 있다.
집에 틀어박혀 있어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삶,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충족되지 않는 헛헛함이 무언가 내 손으로 직접 해 보고 싶다는 예기치 못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방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문학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에 대한 필요를 반영했다면, 그 공간을 손수 만들고 싶다는 소망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일이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인데, 요즘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의 일 역시 세상과의 관계를 추상적이고 비본질적이며 간접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타인이 쓴 글, 혹은 타인이 한 말을 다시 쓰고 고치고 다듬는 일을 하면서 보내다 보면,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제3자가 돼 버린 기분마저 들었다. '진짜 일'이었지만 늘 그렇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던 것은, 내가 하는 일이 나라는 인간에 대해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마치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목과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내 몸뚱이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내 일이 현실 세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는 느낌도 잘 들지 않았다. 정보화시대에 다소 구닥다리 사고방식일 수 있지만, 그래도 진정한 노동이란 역시 물리적인 생산이 필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정보 서비스직 종사자'라고 표현할 때마다, 망치나 끌을 쥐어 들고 문장 나부랭이보다 덜 가상적인 어떤 것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같은 책 33-34쪽
바슐라르는 1958년 그의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집이 주는 가장 큰 이점을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집이란 몽상의 보금자리요, 몽상가의 은신처이며, 평화롭게 꿈꿀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다." 너무도 간단한 말이지만, 이 글을 접한 순간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이며 되찾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책 38쪽
주로 머리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폴란처럼 생각하는 때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사고가 실천으로 이어질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몸의 진실' 혹은 '육체 노동의 진실'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폴란이 2년 반이란 시간 동안 집을 짓는 과정을 통해 온몸으로 느끼고 알아가고 체험하고자 했던 그 과정 자체가 내겐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덧붙이자면 폴란의 글은 참 담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