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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4

쿠바리브레

주말 늦은 밤. 응접실에 앉아 일기를 쓰다 망원경 책을 뒤적이다 테라를 한 병 딸까, 하고 몇 번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다 돌아간 건조기와 식기세척기 도어를 열어두려고 2층에 올라가서는 그만 '쿠바리브레'를 한 잔 만들고 말았다. 필요한 건 얼음, 콜라, 아바나클럽뿐이니. 

쿠바에서 정말 맛있게 마셨었는데. 

가게에 들어가 자릴 잡자마자 다가오는 직원에게 검지를 치켜 들며 쿠바리브레, 라고 말하면 얼음 담긴 잔을 가져와 내 앞에 턱하고 놓고서는 럼을 들이붓고 곧장 콜라를 쏟아낸다. 끝. 

기포가 이글대는 리브레를 한 잔 마시면 말 그대로 자유를 실감..... 하지는 않고 그냥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냥 그런 맛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딱 이 과정이 너무 경쾌해서 맛까지 상쾌해지는. 그런. 

2015/11/29

BUENA VISTA SOCIAL CLUB




8년 전 여름 무렵, 나는 늦가을 여행을 계획했고 목적지는 쿠바였다. 처음엔 2주 정도로 계획한 기간이 쿠바를 목적지로 확정하면서 한 달로 두 배가 늘었다. 그때부터 나는 틈만 나면 여행 정보를 찾기 위해 도서관 여행 코너를 들락거렸고, 마땅한 책이 없자 인터넷을 뒤지기도 하였는데 그러다 알게 된 영화가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하고 라이쿠더가 음악을 맡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었다. chan chan이 흘러나오며 화면은 아바나의 해안도로, 말레콘을 더듬는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 노장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말레콘의 부드럽고 거센 파도를 따라 넘실거린다. 2007년 11월 한 달 동안 나는 쿠바에 있었다.

나는 쿠바에 있었다. 

8년이 지난 오늘, 2015년 11월. 나는 이수에 있는 작은 극장 맨 뒷좌석에 앉아 8년 전 컴퓨터 화면을 통해 쿠바여행을 고대하며 보았던 그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았다. 디지털 리마스터링 재개봉. 사운드트랙과 라이브 음반은 꽤 자주 듣는 편이지만 영화를 다시 보는 건 음악을 듣는 것과는 조금 다른 과정이다. 디브이디 타이틀도 있고 프로젝터도 있지만 영화를 집에서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건 또 다른 경험이다. 단지 극장에 걸려 있는 영화의 포스터만 보아도 여전히 나는 가슴이 뛴다. 
올드카에 올라탄 꼼빠이 세군도가 아바나에 있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물어 물어 찾는다. 장면은 암스테르담 공연장으로 이어지고 환호 속에 등장한 노장들은 chan chan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말레콘을 넘실거리는 파도, 아바나. 영화가 시작되고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여행의 추억, 아니 추억이라기보다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딜 가나 길가에 무수히 나와 모두 아는 사람인 듯 반갑게 간섭하며 말을 거는 쿠바인들, 세월이 가득한 얼굴을 한 노인의 편안한 표정, 어디 굴러나 갈까 싶은 올드카들, 눈앞에 마주하고 나서야 실감나는 말레콘의 파도, 날아가는 새. 이곳 쿠바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런 스치는 감정을 나는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극장 맨 뒷좌석. 영화의 시작과 함께 나란히 포개지던 8년 전의 감정은 영화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옅어지며 결국 사라져 갔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피할 수 없이 2015년 11월에, 이틀만 더 지나면 12월인 현실의 시간 속에 문득 서 있었다. 현실이었다. 내가 믿지 못하는 건 오히려 8년 전의 시간과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2014/06/29

체 게바라 그리고 산타클라라

일출 너마저, 바라데로

예정에 없던 바라데로에서의 석양과 아침의 태양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렇게, 석양과 일몰로 완벽히 각인된 바라데로를 떠나는 마음은 왠지 아쉬웠지만 산타클라라로 향하는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드디어 체를 만난다는 실질적 기분이 들어서이다.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 후 산업부장관, 국립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홀연히 콩코로 뛰어들어 무장투쟁을 돕고 볼리비아에서 투쟁을 이어가다 결국 붙잡혀 사살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밀림에 사실상 버려진 그의 시신이 쿠바와 아르헨티나 정부의 노력으로 발굴되어 쿠바로 돌아오는 데에는 자그마치 3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혁명투사들의 시신은 쿠바혁명의 가장 빛나는 승리로 기억되는 산타클라라에 안치되었다. 1997년의 일이다. 

산타클라라 혁명광장의 체 게바라

바라데로를 떠난 버스가 마침내 산타클라라로 진입하고 있을 즈음, 친절한 버스기사는 잠시 버스를 세우고 육성을 울린다. 저 멀리 체가 보이느냐고.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창밖으로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마치 당장이라도 총부리를 겨누고 전진할 듯한 체의 동상을 카메라로 캠코더로 눈으로 응시한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다시 천천히 버스가 움직이고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체의 모습도 각을 달리한다. 
기념관을 비롯해 정식으로 혁명광장을 찾을 예정이었지만 그 모습을 미리 본 이상 지나칠 수 없었다. 먼저 혁명광장에 들렀다. 많은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고 나는 먼발치에서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로모로 몇 컷 담아냈다. 체를 감싼 새파란 하늘이 유독 아름다웠다. 

승리할 때까지

Che Guevara, Santa Clara, Cuba, 2007

스물한 살 무렵 알게 된,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데 6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의 평전을 읽고 쿠바에 관심을 갖고 유재현이 쓴 쿠바 관련 책을 읽고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보며 가슴을 쿵쾅거리고 실제 쿠바에 닿게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사르트르가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치켜세운 체 게바라가 죽은 1967년 이후, 그의 얼굴은 세계 곳곳의 혁명의 현장에서 깃발이 되어 나부꼈지만 21세기 지금에 이르러서는 가장 매력적인 상품으로 변모되었다. 물론 이마저 지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여전히 나는 그것이 상품이든 책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의 이름이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뛴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마다 내게 말을 걸어온다. 아직도 여전히 그러고 있느냐고. 
체 게바라가 현대의 자본에 의해 어떤 식으로 활용되든 간에 이곳은 산타클라라다. 쿠바 전역 어디에서든 그의 얼굴은 벽화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산타클라라에서 그를 만나는 느낌은 사뭇 진지할 수밖에 없다. 
다음 날, 시가 공장에 들렀다가 다시 체를 찾은 나는 그의 무덤 앞에 있는 흉상 위로 앙증맞게 빛나는 별을 보며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곳을 빠져 나와 시가 공장에서 산 시가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손가락보다 굵은 시가의 맛은 썼고 연기는 매캐했다. 

체는 영혼의 순례자였다. 

사랑이 담긴 희망을 내보였고, 투쟁을 선택하는 용기를 보였다. 
체가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단언했을 때 이것은 ‘함께한다'는 것을 뜻한다. 
체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도 함께했다. 
그는 바로 휴머니즘의 전도자였다. 
“별이 없는 꿈은 잊혀진 꿈이다"라고 엘뤼아르는 말했다. 
별이 있는 꿈은 깨어 있는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체는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이 씌어지고 난 뒤 1997년 10월 17일, 죽은 지 30년 만에 체 게바라는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2014. 6. 28.

2014/06/08

뜻하지 않게, 바라데로

바라데로는 계획에 없던 곳이었다.
마탄사스에서의 새 아침이 밝았고,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새벽에 날이 밝으면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로사 마리아(숙소 주인)는 마탄사스에 아주 좋은 가볼 만한 곳이 있다며 친절히 버스 번호까지 알려주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저 멀리 체 게바라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체 게바라가 선봉이 된 군대가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쿠바 혁명의 큰 변곡점이 된 그곳, 산타클라라에 이미 가 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바라데로에 가게 되었는데, 사연은 이렇다.
숙소를 나서는데 로사가 쿠바인들이 타는 로컬버스(아스트로)는 관광객이 탈 수 없다고 내게 일러주었으나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터미널에 갔고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규정이 실제로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떼를 써도 아스트로 티켓은 절대 끊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산타클라라로 가는 기차나 비아술은 밤중에나 있었고 공교롭게도 아직 오전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버스를 알아보았더니 바라데로에 가는 비아술이 얼마 후 도착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바라데로를 거쳐 산타클라라에 갈 수밖에 없었다. 관광객을 위한 버스인 비아술의 스케줄은 철저하게 마탄사스에서 바라데로를 거쳐 산타클라라로 가도록 짜여져 있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베트남 청년

그때 터미널 창구에서 생떼를 쓰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한 동양인 청년이 다가와 서툰 영어로 일러주기를, 자기는 베트남에서 공부를 하러 쿠바에 와서 3년 동안 머무르고 있는데 관광객 신분으로는 쿠바인들이 이용하는 로컬버스를 절대 이용할 수 없고 자기처럼 공부를 목적으로 비자를 발급받아 그를 증빙할 수 있는 신분증이 있으면 확인 후 티켓을 살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신분증을 보여주었는데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신분증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그에게, 대체 왜 그렇게 하는 거냐고 (물론 상대가 적절하진 않지만) 쏘아붙이듯 물어보았으나 청년의 대답은 간단했다. 쿠바는 관광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관광객들이 타도록 되어 있는 비아술에 비해 로컬버스의 값은 터무니없이 싸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가게 된 바라데로에서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 아침에 있는 산타클라라행 버스표를 끊었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휴양지답게 곱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해변을 실컷 걸었고 맥주도 마시며 밥을 먹고 단지 하룻밤을 묵었을 뿐이다. 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으니 바로 석양과 쿠바 전역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환전율이다. 그 외 휴양의 도시 특성상 도시 전반에 만연해 있는 돈이 중심이 된 서비스 문화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휴양의 도시, 바라데로의 해변
산책하다가 만난
석양은 그야말로 행운!
Varadero, Cuba, 2007
바라데로의 석양을 다시 한 번

하얀 백사장, 흩어지는 구름, 찢어질 듯 석양, 달콤한 빵, 환상적인 환율, 끝내주는 숙소. 
들쳐본 옛 노트에는 이렇게 바라데로가 남겨져 있었다. 


2014. 6. 6. 

2014/04/20

마탄사스, 산책의 풍경

내가 쿠바에 가고자 했던 건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우선 체 게바라가 주는 매력이 먼저 다가왔고, 카스트로가 이끈 쿠바 혁명이 도화선이 되었으며, 소련 붕괴 후 쿠바가 직면한 현실로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이 정말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과연 다른 사회에서 다른 삶을 구축하고 살고 있을까? 

아직 사회생활을 하기 전이었던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순진한 편이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그때는 정말 일종의 이상을 상상하곤 했었다. 체 게바라가 말한, 도덕적으로 충만한 새로운 사람들(New Men)로 버글거리는 그런 사회의 모습을 혹 쿠바에서 볼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물론 대체로 알고 있었지만 그랬으면 하는 옅은 희망을 품기도 하였었다. 그것을 유재현은 느린 희망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실제로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의 쿠바가 카스트로의 국가비상시기 선포 이래 지금까지 현실사회주의를 이어오며 보여준 모습은 충분히 흥미로울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의 반대편에 있는, 서로 닿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 어깰 부딪치며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금세 깨져버릴 듯한 유리거울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그래서 여행을 하며 마주치는 우리 사회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에서도 실망(?)을 거듭하곤 하였다. 정말 우습게도. 그리고 그 모습을 실질적으로 처음 느끼고 받아들여야 했던 곳이 바로 마탄사스였다.  

걸으며 우연히 들른 마탄사스의 작은 학교, 카밀로의 그림이 걸려있다. 
Matanzas, Cuba, 2007 
내가 건넨 빵을 거부한 아해들 

걷고 있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웃옷을 벋은 아저씨가 나를 끌고 데려간 곳은 다름아닌 빵 공장이었다. 배급소에서 나눠주는 빵을 만드는 것으로 보이는 그곳엔 커다란 기계가 있었는데 아저씨는 나를 보며 이것이 중국제라며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곤 나의 대답을 기다리셨다. 나는 말했다. 나는 '꼬레아노' 라고. 순간 아저씨의 표정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며 약간 당황해 하면서도 아쉬워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어색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대뜸 빵 좀 달라는 손짓을 해 보였더니 나를 한 번 빤히 보시고는 별 주저없이 큼지막한 그것을 네 개나 집어 건네주셨다. "그라시아스!" 고맙다는 말과 표정을 던지며 유쾌하게 돌아서 그곳을 빠져나와 빵 하나를 질끈 물었다. 약간 질겼지만 산책을 하며 요기를 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빵을 계속 먹으며 걷다가 아해들을 만났는데 녀석들은 내가 건네는 빵을 아주 간단히 거부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부탁엔 순순히 응해주었다.

마탄사스에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치노(Chino)란 말을 듣기 시작했다. 중국과는 교류를 하는 쿠바에서는 사람들 대부분이 동양인을 중국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거리에서 마주친 장난기 가득한 그들 중 일부는 나를 보며 "치노!"라고 크게 부르고는 내가 돌아보면 "아뵤~"하며 쿵후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때 내가 태권도 자세를 취했던가? 한 달 내내 그 말을 수없이 들었던 나는 결국 차라리 중국사람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품었던 것 같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들의 반가운 인사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고장나 쓰지 못하는 로모가
그래도 가끔은 생각납니다 
어디선가 포토 포토 하는 소리가 들려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그들을 찾아냈다. 
낚시하는 부자(父子)
해질 무렵의 햇살은 무척 따스합니다 
그리운, 마탄사스의 석양

마탄사스에서 머무르던 첫날 저녁, 숙소 주인의 친지가 찾아왔다. 그는 숙소 주인의 동생이었는데 전반적인 태도가 꽤나 건방졌었다. 아니 그보다 원래 성격이 약간은 거칠고 무례해 보였다. 그와 단어로 이루어진 대화를 제법 많이 하였는데, 그는 주로 자신이 관심 있다고 하는 팝 음악 얘기를 많이 했다. 당시 내가 대체로 알고 있던 유명한 팝 가수를 그는 거의 알고 있었는데 그 말투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팝 음악을 자유로이 들을 수 없는 국가의 통제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획일이라는 말과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말이 문화 혹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런 그의 취향도 존중해야 마땅하나 당시 내겐 그의 그런 모습이 자신이 속한 나라의 문화는 으레 외면하고 어떻게든 접하게 되는 타국의 문화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조금 확대 해석하면 체제에 대한 반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자유다. 현실사회주의 노선을 택한 쿠바가 외부로부터 가장 비판 받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임을 감안해 볼 때도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기가 수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한 사회가 하나의 방식으로 유지된다는 건, 놀라우면서도 경악스러운 일이다.


2014. 4. 20. 

2014/03/29

마탄사스의 석양은 핑크빛

다시 돌아올 아바나를 아침 일찍 산책하며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아침은 대체로 고요했지만 이른 바다는 짙은 색을 띤 악마의 모습으로 포효하고 있었다. 말레콘 너머 바닷길을 따라 20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엔, 독재자 바티스타를 몰아낸 1959년 쿠바 혁명 후 오랫동안 쿠바를 어쩌지 못해 아등바등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가 거대한 숨을 토해내고 있다.

적게는 60여 차례, 많게는 6천여 차례에 달한다는 CIA의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 기도는 이미 식상한 스토리이고, 60년대 초반 아바나 항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상선을 폭파한 이래로 심심찮게 유사한 종류의 테러가 있어왔다. 70년대에는 쿠바 국적의 민항기가 폭탄 테러로 추락했고 90년대에는 북부의 해안도시인 카르데나스에 무장 게릴라들이 침투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아바나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고 1997년에는 아바나와 바라데로의 호텔과 식당, 나이트클럽 등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 이런 테러에는 주로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들을 앞세우고 있지만 CIA와 마이애미의 반카스트로 조직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 유재현, 강)

동네 골목길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숙소로 돌아가 까사 주인 아주머니가 끓여준 커피를 마시며 떠날 준비를 했다. 어디로 가냐고 묻길래 마탄사스에 간다고 했더니, 기차역과 터미널에 전화를 걸어 시간을 알아봐 주셨다. 기차는 없다고 했고 버스를 타야 한다며 알려준 아주머니의 친절에 마음이 후텁해졌다.

숙소 주인 부부, 아바나
아침의 갈림길, 아바나, 쿠바, 2007

늘 그랬듯, 터미널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보이는 낯선 풍경을 로모에 담으며 여유를 부리다 보니 의외로 제법 많이 걷게 됐고 조금 더워져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한 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했더니 당최 알아듣질 못하는 거였다.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상점 주인 뒤에 있는 냉장고 문을 직접 열어젖히며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고는 계산을 치르려 했더니 그제서야 주인은 아, '엘라도(helado)'하며 미소를 짓는다. 

에스파뇰에는 명사, 대명사, 형용사, 관사에 성(性) 구별(別)이 있는데, 명사를 예로 들면 주로 남성명사는 'o'로, 여성명사는 'a'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친밀한, 친구란 뜻을 가진 amigo(a)가 그렇다. 나는 쿠바를 여행하는 내내 아미고와 치노(Chino, 중국사람)란 말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비아술(Viazul)을 타고 아바나를 빠져나가며, 도로에 진을 치고 있는 수많은 히치하이커들을 뒤로 하며 다시 돌아올 때를 기약한다.

쿠바의 버스는 비아술과 아스트로가 있는데, 비아술은 관광객 전용 버스로 유명한 도시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렌트를 하지 않는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이용할 수밖에 없는 버스다. 그리고 아스트로는 비아술과 대비되는 로컬버스인데 내가 갔을 때만 해도 관광을 목적으로 한 외국인은 탈 수가 없었다. 아바나에서 곧장 비아술을 탄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혼자 있는 시간은 스스로를 비춰주는 거울 앞에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마탄사스에 도착해 고즈넉한 길을 걸으며 우선 숙소를 잡기로 한다. 하지만 아바나에서처럼 론리에 소개된 숙소는 모두 방이 없었고, 역시 아바나에서처럼 까사에 계신 분들의 도움으로 아늑한 가정집에 발코니가 딸린 작은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쿠바에서 호텔이 아닌 까사 빠티쿨라라고 불리는 가정집에 딸린 방을 구하는 건 간단하다. 그렇게 숙박을 치는 집엔 까사의 마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사 마크가 붙은 곳 외에도 숙박을 치는 곳이 의외로 많았고 마탄사스에서 머문 곳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가격은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대체로 비슷했다.

까사 마크, 바라코아

비아술을 타고 마탄사스로 들어오며 마주친 풍경들이 아주 운치가 있어서 산책하기에 제격인 곳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조금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충 방에 짐을 풀고 가벼운 차림으로 숙소를 나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저녁이 가까운 무렵의 오후가 되자 골목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한다. 어떤 곳에서는 이미 춤의 파도가 덩실덩실, 또 어떤 곳에서는 꼬마 아이들이 골목길 야구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멀리, 언뜻 비치는 빛의 색을 따라 닿은 곳에서는 석양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나는 석양을 보는 게 언제나 좋았다. 아마도 인도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그 마음은 인도 웬만한 도시 어딜 가나 있는 선셋포인트에서의 시간을 매일 즐겨서일 텐데, 일상에서는 그 무렵이 아련하기만 하다. 석양이 좋은 건, 물론 보기에 아름답기도 하지만 오후에도 저녁에도 속하지 않고 경계에, 비록 아주 잠깐이지만, 머무른다는 느낌 때문에 그렇다. 마치 여명이 그렇듯.
그렇게 석양에 넋을 잃고 있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더니 한 소년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미소짓는 소년, 마탄사스, 쿠바, 2007
마탄사스의 석양

+
쿠바를 그리워만 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정도가 지난 무렵 수첩을 뒤져 주소가 적혀 있는 곳 모두에 인화한 사진을 보냈는데, 아바나의 숙소 주인 부부는 잘 받아보았을까, 나를 기억은 하고 있을까?  


2014. 3. 29. 

2014/03/15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아바나의 아침이 밝았다.
혁명박물관, 카피톨리오 등 아바나의 주요 볼거리들이 몰려 있는 센트로 아바나 지역은 다시 아바나에 돌아왔을 때 숙소를 그쪽으로 잡고 둘러보기로 했기에, 혁명광장에나 우선 들를 생각으로 숙소를 나섰다. 말레콘에 가까웠던 숙소였기에, 밖으로 나오자 잔뜩 흐린 날씨에 걸맞는 바람이 말레콘에서 잽싸게 불어오곤 했다. 아무 감각이나 알아봄 없이 눈에 띄는 식당에 가서 커피와 샌드위치, 생수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잔이 생각날 만큼 작고 앙증맞은 잔에 담긴 커피는 진한 맛을 냈고, 샌드위치는 전자렌즈에 반쯤 익힌 듯했다. 그런데 7페소(컨버터블을 말한다). 아바나의 물가를 여지없이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쿠바의 화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쿠바인(Cuban)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페소(peso)와 여행객들을 위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붕괴 이후 관광시장을 개방하며 만들어진 컨버터블 페소(Cuban convertible peso). 쿠바를 여행하다 보면 육안으로도 일반 페소와 컨버터블 페소를 쓰는 곳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두 페소 간 체감하게 되는 물가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컨버터블 페소는 거의 달러와 맞먹는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일반 페소는 그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싼 편이다. 처음엔 잘 모르는 상태에서 컨버터블로만 환전을 했었는데 여행을 하며 요령이 생겨 일반 페소도 넉넉히 환전을 해 경비를 아낄 수 있었다. 

아직 아바나의 아침은 생기가 돌기 전이었다. 하는 수 없이 말레콘을 서성이다 마눌루라는 낚시 청년을 만났으니, 별 통하지도 않는 대화를 억지로 해가며 함께 산책을 하다 괜찮은 곳이 있다는 녀석의 꾐(처음엔 몰랐다)에 들어간 곳에서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서나 나올 법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이미 그로 인해 분위기 하나는 끝내주는 인상을 풍기며 모히또를 팔고 있었다. 아, 모히또.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고는 한 잔 더 마셔도 되냐는 마눌루를 겨우 제지하며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혼자가 되고 보니, '당했군.'이란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그렇게 쿠바에서 처음 모히또를 마셨다. 기억도 나지 않는, 떨떠름한 맛의 모히또를. 

쿠바에서 처음 모히또를 맛보게 한 청년, 마눌루

Plaza de La Revolución 
혁명광장의 한쪽엔 체(Che Guevara)의 철골 모습이 인상적인 내무부 건물이, 건너편엔 거대한 호세 마르띠(José Martí)의 동상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앉아 있고 그 뒤로 메모리얼이 우뚝 솟아 있다. 메모리얼에는 전망대도, 체를 추모하는 공간도 함께 있다. 
호세 마르띠는 누구인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는 체 게바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쿠바에서는 시인 - 언론인 - 정치인으로서 에스파냐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쓴 진정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음을 쿠바 어디를 가나 쉬 알 수 있다. 이를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게 1페소짜리 지폐에 그려진 그의 모습이다. 1페소는 쿠바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지폐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는 현재를 살아가는 쿠바인들과 늘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이 재밌게 생각됐던 건, 체 게바라의 경우 3페소 지폐와 동전에 그려져 있는데 1페소나 10페소 짜리에 비해 잘 쓰이지 않다보니 체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인기와 더불어 하나의 상품이 되어 버렸다. 나는 운이 좋게도(?) 산티아고에서 바나나를 사며 순진한(?) 상점 주인이 거슬러준 잔돈에 3페소 동전이 섞여 있었다. 물론 내가 순진한 것일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3페소 동전만 유통이 사라졌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아바나에서는 체 게바라 동전을 살 생각이 없냐며 묻곤 하던 쿠바인들이 몇 있었다.

체 게바라가 그려진 3페소 동전
호세 마르띠 메모리얼, 아바나, 쿠바, 2007
어디서나 기억되는 체 게바라
호세 마르띠 메모리얼 로비에 위치한 체를 위한 공간
호세 마르띠 메모리얼에서 바라본 베다도(Vedado)

Parque Lennon
레논 공원에 가기 위해 혁명 광장을 벗어나 걸음을 내딛었다. 아바나에서는 지도상으로 꽤나 멀어보이는 곳도 워낙 구역들이 잘게 나뉘어져 있어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레논 공원에 도착하니 우거진 나무가 한층 밝아진 날씨와 어우러져 소규모 숲처럼 아늑함을 주었고 곳곳에 비치된 철제 벤치는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띄엄띄엄 걷는 사람들도 보이고, 나 역시 오후의 여유를 만끽하며 공원을 거닐었다. 
그곳엔 공원 이름에 꼭 맞는 레논의 동상이 철제 벤치에 앉은 채로 있는데 어째 모습이 어색하다 했더니 어라, 레논의 트레이드마크인 안경이 없었다. 어리둥절해 하며 사진을 찍으려 로모를 꺼내 들었는데 어느새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오시더니 어라, 셔츠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는 게 아닌가. 허허. 할아버지는 말없이 표정이 없는 레논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살며시 안경을 씌우고는 나더러 레논 옆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내 카메라를 넌지시 가리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친절에 가득 밀려 나오는 웃음을 조금씩 나눠 뱉으며 슬쩍, 레논의 옆에 앉았다. 얼핏 보기에도 할아버지가 잡은 로모의 각은 치켜올라가 있었지만 말없이 그의 모습을 응시했다. 

레논 공원, 아바나, 쿠바, 2007
친절한 레논 안경 담당 할아버지

로모를 주인에게 되돌려준 할아버지는 다시 레논에게서 안경을 벗기고는 원래(?)의 위치인 그의 셔츠 주머니에 집어넣고 반대편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할아버지의 시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왠지 나는 비흡연자임에도 불구하고 시가 향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차마 한 대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가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이 손짓으로 그를 벤치에 앉히고는 사진을 찍어드렸다(미처 전해드리진 못했지만). 아침에 얼떨결에 마눌루에게 살짝 당한 분을 할아버지의 친절이 말끔히 해소해 줬다. 기분이 마구 좋아진 나는 황급히 달려 가까운 곳에 있는 가게에서 주스 두 개를 사 할아버지와 사이좋게 나눠 마시며 그 기분을 이어갔다. 

미리 생각했던 일정을 마쳤으나 아직 해도 지지 않았고 오후가 한 뼘 이상 남아 있었기에 공원에서 일기도 쓰고 책도 읽을 생각으로 한적한 공원 구석에 앉았다. 시간의 흐름이 눈앞에 보일 듯, 잡힐 듯했고 낯선 곳에서 느끼는 그런 기분을 나는 언제나 사랑하였다.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책도 읽고 졸기도 하며 있었는데 어느새 앞에 보니 백발의 노인 한 분이 앉아 계셨다. 할머니 역시 책을 읽고 계셨는데 곁에는 할머니와 아주 잘 어울리는 검은 개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이방인으로서 이방인을 도촬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금세 눈치챈 할머니는 나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표정의 미소를 지어보였고 나 또한 웃으며 검지 손가락을 들어 한 컷을 (더) 부탁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한참을 레논 공원에서 머무르다 왔던 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 말레콘을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어느새 저물어 있었다. 말레콘에, 아바나에 어스름이 닥치고 저녁이 찾아왔다.

Malecón, La Habana, Cuba, 2007

숙소에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주인은 들어오지 않았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문이 열린 다른 방에서 엎어져 쉬고 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주인이 들어와서 전혀 다른 열쇠로 문을 열어 주었다(내게 주었던 열쇠는 정체가 뭘까). 날이 밝으면 아침 산책을 하고 아바나를 떠난다. 어차피 쿠바를 떠나기 위해 다시 돌아와야 하므로 아바나에 처음부터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언론(심지어 구글맵까지)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La Habana)'를 영어 발음 그대로 '하바나'로 쓰는 경우가 많다. '빠리(Paris)'를 '패리스'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지만, 에스파뇰에서 'H'는 묵음이니 '아바나'로 부르고 쓰는 게 맞다. 대신 에스파뇰에서 'ㅎ' 발음은 'J'가 담당한다. 호세(José) 마르띠처럼. 참고로 쿠바를 대표하는 럼(Rum)인 아바나 클럽(Havana Club)은 수도 아바나와는 철자가 다르다.

아직 비우지 않은, 아바나 클럽

<노트에 남은, 말레콘에서의 생각>
요즘 같이 기류에 편승하는 시대에 자신만의 정체성을 간직한다는 건 드문일일 것이다. 말 그대로 비슷한 옷을 입고, 남들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않고. 자라면서 언제부턴가 아빠의 질문에, 또는 요구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뭔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지라도, 그 길을 직접 가보고 나서 내가 스스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우린 시간 맞춰 찍어내는, 틀에 박힌 거푸집에 의해 생산되는 덩어리 따위는 아니다. 어느 누구도 우릴 만들어낼 순 없다.
사실 여행, 독서, 산책, 사색. 이런 요소들이 더해지면서 나는 몰라보게 자신에게 변화가 왔음을 느꼈다. 얕지만 짧은 기간 채식도 시도해 보았고, 어느 곳이건 혼자 걸어보면서 스스로와 마주 할 수 있었으며, 자그마한 책에서지만 몇몇의 위대한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가장 크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실은, 나는 남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기존의 주변 사람들이 싫게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좀 더 내가 원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런 사람이고 싶다. 내 자신에게 무슨 큰 변화 따위를 주려고 이 짓을 하는 게 아니다. 여전히 이곳에서도 난 그저 평범하고 소심한 인간일 뿐이다. 난 그저, 여행이란 행위가 즐겁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온통 내겐 설익은 과일 마냥 떫은 맛뿐이다. 이런 곳을 걷는 게 좋을 뿐이고 이런 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무엇보다 짜릿하다. 예전에 인도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도 얘기했듯 난 그저, 그곳에 있는 게 좋을 뿐이다. 어떤 몽상가적인, 낯선 꿈을 꾸며, 여러 날을 헤매이자. 돌아갈 그날까지.
여기에서나 한국에서나 새벽은 내게 친숙하다.


2014. 3. 15. 

2014/03/02

그리고 아바나

벤쿠버를 거쳐 토론토 공항에서 제법 긴 시간을 기다려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토론토의 날씨가 아주 맑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커피와 머핀으로 주린 배를 조금 채우고 드디어 아바나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맨 뒷좌석. 한참을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창을 올리자 어느새 항공기가 아주 낮게 비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쿠바 대지 위를 날기 시작한다. 온통 푸른색으로 뒤덮인 대지 곳곳에 박힌 야구장이 '우리야말로 진정한 야구왕이지!'하며 너스레를 떠는 듯했다. 그리고 몸이 떨리는 진동과 함께 항공기가 호세 마르띠 공항에 착륙하자 기내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무사 착륙을 환호하는 이들의 '순수'가 아직 어리둥절한 내겐 신기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웰컴이었다.

(쿠바에서는 입국심사를 할 때 여권이 아닌 여행 내내 소지하고 다녀야 하는 별도의 종이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그리고 다시 쿠바를 떠날 때 그것을 반납하게 되는데, 이로써 여권상으로는 내가 쿠바에 다녀온 사실이 없는 셈이다. 그 종이를 사진에 담아두지 못한 나는, 쿠바가 그리울 때면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애쓰곤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박한 호세 마르띠 공항을 빠져나오자 열대기후 특유의 후텁지근한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졌지만 아바나의 공기를 채 실감하기도 전에 엄중한 시선으로 근무를 하고 있던 공항 직원이 택시를 잡아주었다. 여전히 '협상'에 익숙한 나는 제스처와 함께 요금 할인을 시도해 보았지만 'Down'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을 전혀 설득시키지 못하고 택시에 탑승, 이윽고 그윽한 엔진 소리를 뱉으며 택시가 출발하자 배기통에서는 반 세기 이상 묵은 매연이 뿜어져 나왔다.
택시가 베다도 지역으로 들어서자 호세 마르띠 메모리얼과 아바나 혁명광장, 그리고 그곳 건물에 걸린 철골 윤곽의 체의 모습이 쿠바에 왔음을, 이곳이 쿠바임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으나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믿기에는 모든 게 아직은 너무 낯설기만 했다.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고 만져야 했으며 느낄 수 있어야 했다.

혁명광장, 아바나, 쿠바, 2007

예약한 숙소도 없이 우선 지리적 균형감각을 찾기 위해 유명하다는 호텔 나시오날로 가자고 했고, 베다도를 관통해 멀리 말레콘이 시야에 들어오자 곧 호텔에 도착을 했다. 하지만 그곳에 묵을 생각은 없었기에 택시에서 내린 나는 곧장 돌아서 말레콘을 향해 걸었다. 우선은 그곳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고 조금씩 부서지는 파도의 부스러기가 피부에 와닿을 때의 그 느낌이 낯설면서도 기분을 좋게 했지만 제법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 때문에 말레콘에 걸터앉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숙소를 잡기 위해 론리에 소개된 몇 곳에 가봤지만 가는 곳마다 빈방이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까사' 마크가 붙은 곳을 찾아다니며 그곳 분들의 알음알음으로 겨우 방을 구했는데 너무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하나 같이 친절한 그들이었기에 가격 협상은 생각지도 않았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뻗어 내리 7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났더니 숙소 주인이 '한국에서 걸어왔냐며, 죽은 줄 알았다'고 우스개 소릴 하셨다. 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에 여전히 비몽사몽인 내게 Cuba라 적힌 론리만이 이곳이 다름아닌 쿠바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2014. 3. 2.

2014/02/17

프롤로그

여행을 목적으로 쿠바에 입국하는 외국인은 30일간 쿠바에 머무를 수 있다. 캐나다인들은 기본이 90일이고 보통의 외국인들은 30일을 머무르고 더 머무르고자 한다면 여정이 거의 끝나가는 즈음에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연장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르고 관타나모에서 한 달을 연장하고자 출입국사무소에 들른 나는 통하지 않는 말 대신 달력으로 설명을 들어야 했다. 내 체류기간이 만료되는 날보다 2~3일 앞의 날짜를 가리키며 이때 다시 오라고, 그곳에 있는 직원은 손짓으로 내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아바나에서 시작해 다시 아바나로 돌아온 나는 여정을 연장할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고 있었고, 출입국사무소에 가기 전 서울에 있는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는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쿠바에 머무르는 한 달 동안 아바나에 도착한 날 집에 전화를 한 번 하고 더는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급하지 않은 성격과는 다르게 전화를 받은 누나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여비도 남았고, 한 달 정도 더 머물러도 좋겠다고 생각한 내 마음은 말레콘의 파도에 부서져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볕이 좋은 날이면 그렇게 부서지는 바다 부스러기에 무지개가 피어난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오로지 부서져 사라지기만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내년이면 처음 해외 여행을 시작한 지 꼭 10년이다. 그리고 2007년에 떠났던 쿠바 여행은 지난 내 모든 여행의 정점에 있다. 적어도 쿠바 여행기를 쓰고자 하는 지금의 내겐 그렇다.
여행수첩을 찾아 내어놓고 책장에서 론리플래닛을 빼올린다. 한 달, 쿠바의 습기로 눅눅해진 론리플래닛은 페이지마다 그곳이 가득하다. 색이 바랜 손때에선 여전히 그곳 냄새가 나고 구겨진 추억들은 자신은 여전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제와 쿠바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건 그 어떤 이유도 아닌 그저 더 잊어버리기 전에 좀 더 체계적인 기억으로 복원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수첩을 뒤적이고 사진을 하나 하나 들여다보면 지금의 내 일상이 더욱 비참해질 테지만 이런 과정이 나를 조금은 더 살아있게 할 것이다. 적어도 그런 기분에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기억이란 속성이 으레 그렇듯 좋았던 기억은 그것에 그간 쌓인 환상이 더해져 더욱 아름답게 꾸며질 것이고 그렇지 않은 기억은 끝끝내 부정되어 축소, 왜곡하려 들 것이다. 뭐든 좋다. 2014년 2월, 지긋지긋한 서울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외롭고 고독한 나는 조금이라도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어깨를 들이밀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2014. 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