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7

밤, 그리고 인터뷰

현재 작가님의 생각은 우리가 노력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쪽인가요, 아니면 노력하더라도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노력하는 일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쪽인가요? 

후자에 가깝죠. 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겨요. "사랑한다면 노력해야 된다"고 썼더니 사랑하면 희생하고 인내하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말하는 노력은 'try'에 가깝거든요. 가망이 없는데 한 번 더 물어나보는 행위죠.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요. (김혜리 인터뷰집 '진심의 탐닉' 김연수 편에서)


영화 이야기를 주로 하는 김혜리 기자를 좋아한다. 예전 라디오에서 영화 인물 얘기하는 걸 특히 좋아했는데 일종의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게 무척 따뜻했다. 그건 시선일 수도, 마음일 수도, 진심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거듭 느끼지만 김혜리 기자의 진가는 인터뷰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그의 모든 글이 좋지만 특히) 인터뷰를 읽거나 들을 때면 그가 얼마나 인터뷰 준비를 성실히하는지, 인터뷰이의 답보다 먼저 그의 질문의 섬세함에 놀라는 경우가 많다. 좋은 질문은 인터뷰의 질을 갑절 이상으로 높인다. 

십 년도 넘은 언젠가, 홍대 근처의 (기억이 맞다면) 스페인 음식점에서 J, Y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해'와 '인정'에 대해 길게 대화가 오갔던 기억이 났다. 막 트위터에 물어(?)보기도 하고. 

이해, 라고 한다면 '그때'와 생각이 비슷하지만 김혜리의 질문처럼 '불가능'하지만 노력을 해보기도 하고, '인정'할 부분은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런데 방금 지하 카펫에 엎드려 김연수의 말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자에 없다고 생각했던 대학원에 입학해 한 달간 밀도 높은 스트레스를 꾸준히 이어오다가 며칠 전에 아무리 공부가 급해도 한 달에 책 한 권은 무조건 읽자, 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이 드니 이제는 지하에 있으면 자꾸 서가를 기웃거리며 책을 뒤적인다. 어제는 책등 아래로 가름끈이 삐져나온 책(자기 앞의 생)을 집어들고 뒤편에 실린 조경란 소설가의 글을 읽었다(작가들의 추억을 더듬는 글엔 어김없이 헌책방이 등장한다). 

일 월을 보내며 한 번쯤 울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는데 어제 '자기 앞의 생'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고, 오늘 베트남에서 별세한 이해찬 전 총리의 뉴스 영상을 보면서도 약간 울컥했고, 저 인터뷰를 읽기 전까지 2층에서 읽고 있던 칼 세이건의 딸 샤사 세이건의 책을 보면서도 눈물이 맺혔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2025/12/16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2021)

엄마의 부모님은 뉴욕시 지하철에서 만났다. 러시아워의 E노선 열차에서였따. 1938년이었다. 외할아버지 해리가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을 읽다가 책장을 넘기려는데 외할머니 펄이 할아버지의 손을 막으면서 자기는 아직 다 안 읽었다고 말했단다. 그 기차에 열차칸이 몇 개 있었을까? 그 역을 지하철이 몇 대나 지나쳐갔을까? 그들이 서로 다른 노선 근처에 살았다면? 그들의 부모님이 다른 도시로 이주했다면? 역사를 거슬러올라 끝도 없이 갈 수 있다. (40) 


이런 이야기가 나는 재밌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 책이 될, 칼 세이건의 딸인 사샤 세이건이 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For Small Creatures Such As We>을 읽고 있다. 오늘 아침 출근버스에서부터. 

2025/12/02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2016)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53)


작가가 홀로 들어가 자신이 마주친 미지의 영역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책이라는 신기한 삶이다. 만약 작가가 그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훗날 다른 이들이 그 길을 따를 것이다. 한 번에 한 명씩, 그 역시 홀로 떠나는 여정이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교류하며, 작가가 닦아 놓은 길을 가로지른다. 책은 고독함, 그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독함이다. (85-86)


나는 읽었다. 책과 편지를 읽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았다. 나는 썼다. 가끔은 친구들에게 나의 생활에 관해, 주변 사람들의 생활에 관해 썼다. 잠을 자고, 운동을 하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고, 트롤의 침침한 동굴 같은 슈퍼마켓에서 구할 수 있는 낯선 재료들을 가지고 식사를 준비했다. 길동무라고는 지저귀는 새와 털이 덥수룩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말밖에 없는 새벽의 풍경 속을 걸었다. 평화로웠지만 낯설었다. 

지진은 오랜 시간 쌓여 온 긴장이 낳은 결과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던 그 긴장이 쌓이는 과정은 볼 수 없다. 긴장은 오직 그것이 터져 나올 때만 볼 수 있다. 아픈 사람과 노인, 죽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 광경이 우리 안에 쌓이고,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의 삶이 바뀐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고 그 모습이 영원히 유지된다. 편리하고 극적이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삶에서 우리는 무언가와 거리를 두고, 되돌아가고, 결심하고,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변화는 대부분 천천히 이루어진다. 내 인생에는 변화를 일으킨 여러 사건이 있었고,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위기도 있었다. 루비콘 강을 한두 번 건너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언가를 쌓아가고 있다. (259~260)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352~353) 


솔닛의 책은 띄엄띄엄 읽은 것을 제외하면 처음이라고 해야겠다. 그의 명성이 왜 내게 와 닿았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2025년 현재 19쇄가 찍힌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솔닛의 책 중엔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아닐까. 가장 많이 읽히기도 했겠지. 

에세이지만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금방 흐름을 놓쳐버리게 되는, 문장 하나 하나가 섬세하고 무게감이 있게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책은, 공감을 깊게 해주는 책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다. 

나에게도 솔닛이 경험한 것처럼, "네"라는 이정표가 있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2025/10/25

스토너 (존 윌리엄스, 2015)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을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윌리엄 스토너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주위 학생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간 뒤로도 몇 분 동안 그는 꼼짝않고 앉아서 자기 앞의 좁은 바닥 널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닥 널은 그가 결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학생들의 부산한 발길에 닿아서 니스 칠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였다. 그는 그 바닥 위에 자신의 발을 미끄러뜨리며 나무가 신발 바닥에 닿는 거친 소리를 듣고, 가죽을 통해 느껴지는 거친 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돌로 포장된 길에 신발이 또각또각 닿는 소리가 들리고,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을 간직한 채 서둘러 다음 강의에 들어갔다. 토양화학 교수가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필기하고 외워야 할 내용을 불러주는 단조로운 목소리에 맞서 그 느낌을 간직했다. 이 강의의 내용을 외우는 고된 과정이 점점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해 2학기에 윌리엄 스토너는 기초교양 강의들을 빼버리고, 농과대 커리큘럼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철학과 고대역사의 기초강의 한 개씩과 영문학 강의 두 개를 들었다. 여름에 그는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지만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22~24)

"자네도 도망칠 길을 없어, 친구. 없고말고. 자네가 누군가? 소박의 땅의 아들? 자네가 행세하는 것처럼? 아니, 아니지. 자네도 환자일세. 자네는 몽상가이고 광인이야. 세상은 더 미쳤지만.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푸른 하늘 밑에서 뛰놀고 있지. 자네는 꽤 똑똑해. 어쨌든 우리 둘의 친구인 저 녀석보다는 똑똑하니까. 하지만 자네에게는 오점이 있네. 오래된 약점. 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 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얘기가 아냐.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 목화밭의 바구미, 콩줄기 속의 벌레, 옥수수 속의 좀벌레. 자네는 그런 것들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해. 너무 약하면서 동시에 너무 강하니까. 이 세상에 자네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없네." (45~46)
 

스토너가 온몸으로 자각한 저 느낌을, 나도 조금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25/10/14

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2021)

안다. 늘 그렇듯이 언어란 결국 모든 것을 변조해버릴 것이다. 작가는 이 점을 너무 잘 알고,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좋은 작가들이 문장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피와 땀을 흘리고, 최고의 작가들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몸이 부서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찾아낼 수 있는 진실이 있다면 거기서 찾아내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그런 작가들 - 이들만이 내가 계속 읽고 싶은 작가이고, 나를 고양시키는 작가이다. 이제 도대체 읽을 수가 없는 책들은 - (218)


에너지 소모가 심한 하루를 보내고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 안에서, 그래도 모자라 집에 도착해서 잠깐 집중해서 마저 다 읽었다. 에너지가 소진되어서일까, 책에 깊이 빠져버린 걸까. 신형철처럼 나도 연달아 또 읽어야 하는 걸까. 쓰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한 걸까. <룸 넥스트 도어>라는 영화를 봐야 하는 걸까. 

이 작가를 왜 이제 알았을까. 그 많은 질문들은 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