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1

어느 작가의 일기 (버지니아 울프, 2009)

내 일기가 어떤 모양이기를 바라는가? 짜임새는 좀 느슨하지만 지저분하지는 않고, 머릿속에 떠올라오는 어떤 장엄한 것이나, 사소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라도 다 감쌀 만큼 탄력성이 있는 어떤 것. 고색창연한 깊숙한 책상이나 넉넉한 가방 같은 것이어서, 그 안에 허섭스레기 같은 것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도 던져 넣을 수 있는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한두 해 지난 뒤 돌아와 보았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저절로 정돈이 되고, 세련되고, 융합이 되어 주형으로 녹아 있는 것을 보고 싶다. 정말 신비스럽게도 이런 저장물들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 같은 주형이 우리 인생에 빛을 반사할 만큼 투명하면서도, 예술 작품의 초월성이 갖는 침착하고 조용한 화합물이기를 바란다. 오래된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검열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쓰는 것이다. 내가 별생각 없이 써놓았던 것 중, 쓸 당시에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곳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묘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만함은 곧 지저분함이 된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기록해야 할 때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펜이 길잡이 없이 멋대로 제 갈 길을 가게 해서는 안 된다. 안 그러면 버넌 리의 글처럼 느슨하고 지저분해질 염려가 있다. 버넌 리가 글들을 연결하는 방식은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 느슨한 감이 있다. (39)


2013년 겨울에, 책을 샀다고 메모가 되어 있다. 그때 얼마나 읽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리고 왜 지금 버지니아 생각이 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남편 레너드와 함께 가꾸던 근사한 정원이 있는 집, 아니 집이 있는 정원 책을 함께 보고 있다. 

힘이 난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 힘을 느낀다. 

기억은 주로 현실에 굴복해 왜곡되지만, 기록은 당시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그 자체로의 고유성이 있다. 

2026/03/04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2020)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190~191)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생각될 때, 기차에 올라 잠시 창밖을 보며 풍경을 흘려보내다가, 무심코 집어들게 되는 책을 내릴 때까지 보게 된다. 백기행, 시인 백석의 삶을 다룬 김연수 소설을 오늘 막 다 읽었다. 한두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그 전에 백석 시집을 오랜만에 들춰본다.  

2026/01/27

밤, 그리고 인터뷰

현재 작가님의 생각은 우리가 노력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쪽인가요, 아니면 노력하더라도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노력하는 일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쪽인가요? 

후자에 가깝죠. 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겨요. "사랑한다면 노력해야 된다"고 썼더니 사랑하면 희생하고 인내하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말하는 노력은 'try'에 가깝거든요. 가망이 없는데 한 번 더 물어나보는 행위죠.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요. (김혜리 인터뷰집 '진심의 탐닉' 김연수 편에서)


영화 이야기를 주로 하는 김혜리 기자를 좋아한다. 예전 라디오에서 영화 인물 얘기하는 걸 특히 좋아했는데 일종의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게 무척 따뜻했다. 그건 시선일 수도, 마음일 수도, 진심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거듭 느끼지만 김혜리 기자의 진가는 인터뷰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그의 모든 글이 좋지만 특히) 인터뷰를 읽거나 들을 때면 그가 얼마나 인터뷰 준비를 성실히하는지, 인터뷰이의 답보다 먼저 그의 질문의 섬세함에 놀라는 경우가 많다. 좋은 질문은 인터뷰의 질을 갑절 이상으로 높인다. 

십 년도 넘은 언젠가, 홍대 근처의 (기억이 맞다면) 스페인 음식점에서 J, Y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해'와 '인정'에 대해 길게 대화가 오갔던 기억이 났다. 막 트위터에 물어(?)보기도 하고. 

이해, 라고 한다면 '그때'와 생각이 비슷하지만 김혜리의 질문처럼 '불가능'하지만 노력을 해보기도 하고, '인정'할 부분은 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런데 방금 지하 카펫에 엎드려 김연수의 말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자에 없다고 생각했던 대학원에 입학해 한 달간 밀도 높은 스트레스를 꾸준히 이어오다가 며칠 전에 아무리 공부가 급해도 한 달에 책 한 권은 무조건 읽자, 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이 드니 이제는 지하에 있으면 자꾸 서가를 기웃거리며 책을 뒤적인다. 어제는 책등 아래로 가름끈이 삐져나온 책(자기 앞의 생)을 집어들고 뒤편에 실린 조경란 소설가의 글을 읽었다(작가들의 추억을 더듬는 글엔 어김없이 헌책방이 등장한다). 

일 월을 보내며 한 번쯤 울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는데 어제 '자기 앞의 생'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고, 오늘 베트남에서 별세한 이해찬 전 총리의 뉴스 영상을 보면서도 약간 울컥했고, 저 인터뷰를 읽기 전까지 2층에서 읽고 있던 칼 세이건의 딸 샤사 세이건의 책을 보면서도 눈물이 맺혔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2025/12/16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2021)

엄마의 부모님은 뉴욕시 지하철에서 만났다. 러시아워의 E노선 열차에서였따. 1938년이었다. 외할아버지 해리가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을 읽다가 책장을 넘기려는데 외할머니 펄이 할아버지의 손을 막으면서 자기는 아직 다 안 읽었다고 말했단다. 그 기차에 열차칸이 몇 개 있었을까? 그 역을 지하철이 몇 대나 지나쳐갔을까? 그들이 서로 다른 노선 근처에 살았다면? 그들의 부모님이 다른 도시로 이주했다면? 역사를 거슬러올라 끝도 없이 갈 수 있다. (40) 


이런 이야기가 나는 재밌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 책이 될, 칼 세이건의 딸인 사샤 세이건이 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For Small Creatures Such As We>을 읽고 있다. 오늘 아침 출근버스에서부터. 

2025/12/02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2016)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53)


작가가 홀로 들어가 자신이 마주친 미지의 영역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책이라는 신기한 삶이다. 만약 작가가 그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훗날 다른 이들이 그 길을 따를 것이다. 한 번에 한 명씩, 그 역시 홀로 떠나는 여정이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교류하며, 작가가 닦아 놓은 길을 가로지른다. 책은 고독함, 그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독함이다. (85-86)


나는 읽었다. 책과 편지를 읽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았다. 나는 썼다. 가끔은 친구들에게 나의 생활에 관해, 주변 사람들의 생활에 관해 썼다. 잠을 자고, 운동을 하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고, 트롤의 침침한 동굴 같은 슈퍼마켓에서 구할 수 있는 낯선 재료들을 가지고 식사를 준비했다. 길동무라고는 지저귀는 새와 털이 덥수룩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말밖에 없는 새벽의 풍경 속을 걸었다. 평화로웠지만 낯설었다. 

지진은 오랜 시간 쌓여 온 긴장이 낳은 결과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던 그 긴장이 쌓이는 과정은 볼 수 없다. 긴장은 오직 그것이 터져 나올 때만 볼 수 있다. 아픈 사람과 노인, 죽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 광경이 우리 안에 쌓이고,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의 삶이 바뀐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고 그 모습이 영원히 유지된다. 편리하고 극적이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삶에서 우리는 무언가와 거리를 두고, 되돌아가고, 결심하고,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변화는 대부분 천천히 이루어진다. 내 인생에는 변화를 일으킨 여러 사건이 있었고,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위기도 있었다. 루비콘 강을 한두 번 건너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언가를 쌓아가고 있다. (259~260)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352~353) 


솔닛의 책은 띄엄띄엄 읽은 것을 제외하면 처음이라고 해야겠다. 그의 명성이 왜 내게 와 닿았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2025년 현재 19쇄가 찍힌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솔닛의 책 중엔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아닐까. 가장 많이 읽히기도 했겠지. 

에세이지만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금방 흐름을 놓쳐버리게 되는, 문장 하나 하나가 섬세하고 무게감이 있게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책은, 공감을 깊게 해주는 책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다. 

나에게도 솔닛이 경험한 것처럼, "네"라는 이정표가 있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