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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0

(1704 광주 의재미술관) 의재를 찾아서

광주시 동구 운림동 85번지. 증심사와 약사사에 불공드리러 가는 마음들이 새벽부터 또 그 다음 새벽까지 끊이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오르다 보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길이 바로 의재 선생이 30년을 오가신 증심사 계곡 등산로이기 때문이지요.
요즘 이 등산로에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의재 선생의 작업실이었던 춘설헌과 선생의 묘소, 옛날 차 공장이 그대로 있는 계곡 건너편에 있는 듯 없는 듯, 집인 듯 미술관인 듯, 작은 나무 상자 같은 건물이 생겼거든요. 의재 선생을 기리는 마음과 정성이 지나쳐 혹시나 산과 물이 중심인 이 계곡보다 더 잘 보이게 되면 어쩌나, 설계자도 건축주도 시공자도 조심조심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10년을 계획하여 지어 낸 건물이라고 합니다. 의재 선생의 그림이 살 집인데, 그저 무등산과 그림과 차가 좋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집인데 으리으리하고 첨단 기능을 갖추면 무엇에 쓴답니까. 옛 농업 학교 건물은 약간만 개보수하여 그대로 두었고, 담도 없고 커다랗고 세련된 간판도 없는, 새 건물인지 원래 있었는지 갸우뚱하게 만드는 그런 건물입니다. 
심세중,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242쪽, 디자인하우스, 2001

몇 해 전 눈이 가득 내린 새해 첫날, 아무 계획 없이 광주에 갔다. 그렇게나 많은 눈이 내린 줄은 미처 몰랐다. 용산에서 광주행 첫 열차에 올라 잠든 후 눈을 떴을 때, 열차는 정읍 부근을 달리고 있었는데 주위가 온통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산보다는 너른 들판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남도 땅 가운데, 사방이 고요한 풍경에 사로잡혀 열차는 광주로 다가가고 있었다. 광주역에 내려 간장게장이 나오는 백반을 먹고 광장에 나오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 1980년 5월의 광주를 알고 있다는, 그 무등산. 그곳에 오르기로 하고 관광안내소에 들러 폭설에도 개방된 등산로가 있는지 확인했다. 단 한 곳, 증심사 입구만 개방이 되어 있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바로 무등산으로 향했다. 새해 첫날이라 그런지, 증심사 입구에 내리니 등산객들로 꽤나 붐볐다. 그들 행렬을 따라 나도 무등산에 난생 처음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어서 문빈정사에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하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폭설에 아이젠도 없이 산에 오르려니 긴장이 되었지만 무등산의 등산로는 말 그대로 순했다. 큰 어려움이 없었던 기억이다. 서석대까지 올랐다. 서석대와 하얀 눈이 이루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개방된 등산로가 하나뿐이었기에 올랐던 길로 되돌아 내려왔다. 그런데, 그런데 두 번이나 스친 길가에서 의재미술관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 기억으론 그렇다. 광주에 가야했다. 의재뿐만이 아니더라도, 광주에 가야 할 이유는 많지만, 오로지 의재만으로도 광주에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2017/03/19

(1703 능동 꿈마루) 시간의 흔적 그리고 지금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1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공원 정문. 그곳을 통해 공원으로 들어서면 저기, 높다란 곳에 한눈에 보아도 웅장한 모습의 꿈마루가 늠름하게 뻗어 있다. 세월을 가늠케 하는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인 원경을 보며 걸음을 재촉하면 그만큼 더 거대해진 꿈마루 앞에 어느새 서 있게 된다. 



꿈.마.루. 세 글자가 저 웅장한 건물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생각은 육체가 그 안으로 스며들어가자마자 일순 사라진다. 왜 수류산방 심실장님이 꿈마루에 안 가보았냐고 물었는지, 몸이 먼저 알겠다는 듯 반응한다. 
분식점에서 사 간 점심을 먹기 위해 우측 경사로를 따라 피크닉가든으로 갔다. 지붕을 걷어내 기둥과 수평으로 뻗은 보만 남은 가든에는 색 바랜 바닥의 나무가 친근하게 발길을 유도하고 있었고 듬성듬성 기둥과 보 사이에 삐죽 고개를 내민 나무 몇 그루가 웰컴 투 '가든'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반쯤 볕이 드는 위치로 테이블을 옮겨 온이도 아내와 나도 식사를 했다. 먹으면서도 시선은 주위를 둘러보느라 분주했다. 세월은 속일 수 없다는, 풍부하게 골조에 남은 풍화의 흔적은 수십 년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달려들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아주 느리게 가든을 서성인다. 







가든 안쪽으로는 집 속의 집이라 불리는 화장실과 사무실이 보였는데, 적색 조적으로 단정하게 처리된 집들은 풍화에 젖은 가든의 골조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반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꼭 필요한 설비를 제외하고 남은 천장의 공간에는 원래의 골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칭얼대는 온이를 재울 겸 건물을 관통해 바깥으로 나가 건물 뒤편으로 갔다. 경사진 지형 탓에 건물 뒤편에 서니 시선 안에 건물 전체를 끝어당겨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육중해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조금 떨구자 방금 점심을 먹은 피크닉가든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자리에 다소 외롭게 서 있는 산수유나무엔 노란꽃이 피어 있었다. 





왼쪽 입구에 서면 캔틸레버가 되어 뻗어나온 골조가 건물이 만들어질 당시 위용을 뽐내는 듯 보이지만, 이미 그곳은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다. 원래 실내 공간임을 암시하는 듯한 철골조가 콘크리트골조와 조화를 이루고 쾌적하게 뚫려 있는 정면으로 밀려드는 도시의 원경은 쏟아지는 햇빛 탓에 전진을 방해받는다. 게다가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라니!







유연한 계단의 반복된 흐름을 따라 어느새 3층에 도착하니 상대적으로 낮은 층고가 마치 공간을 납작 업드리게 한 듯하고, 한켠에 놓인 피아노에서는 젋은 연인이 앉아 알 수 없는 연주를 이어가다 시선을 서로에게 고정시킨다. 하지만 공간의 연주가 이어진다. 아래로 뻥뚫린, 여전히 당당한 보 사이로 주말의 한가로운 행렬의 발길이 드문드문 꿈마루를 찾는다. 













나는 건물 끝에, 어느새 서 있다. 시간은 잊은 지 오래, 소음은 귀에 미처 와닿지 못하고 귓등을 스쳐 지난다. 
잠시 곁을 떠난 아내와의 재회는, 여전히 이곳이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였다면 우아하게 커피라도 마시며 서서 라운드를 바라봄직할, 건물의 상징처럼 보이는 길게 뻗은 장소에서 이뤄진다. 감동을 주체할 수 없기에, 잠시 쉬기로 한다. 따순 볕을 받으며 나는 유기농아이스크림을, 산수유가 만발한 계절에 니트에 코트 차림인 아내는 뜨거운 라떼를 마신다. 











중부지역을 휩쓴 미세먼지는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아니, 나를 잃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꿈마루를 서성인 시간은 어느새 두 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또 한 가지 더한 건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느슨하게 했다고 할까요. 꿈마루에선 모퉁이를 돌아 들 때마다 바깥이 계속 따라 들어옵니다. 바람도 안으로 들어오고, 눈이 오는 날, 비 오는 날... 꿈마루를 거쳐서 공원의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지만 여러 가지를 감각할 수 있게요. 그건 곧 이 도시 안에서, 우리가 일상 생활하면서 별 신경 쓰진 않지만 늘 느끼게 되는 것이기도 하죠. 꿈마루를 들어가서 점점 안으로 공간이 진행되면서, 계속 바뀜이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바뀌면서, 하여튼 조금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그런 공간. 어떻게 보면 꿈마루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긴 빛도 있어요. 요즘 법규에 맞추느라고 엘리베이터를 하나 놓으면서 그 위 지붕을 뜯었어요.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통을 타고 빛이 천장부터 아래층까지 들어옵니다. 사실 꿈마루 안이 어둑어둑해요. 유지관리 비용을 낮추려고 조명기구도 최소로 줄였고 일체 시설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깥같죠. 여기저기서 빛이 들어와 난반사하고 바람도 통하거든요. 음, 기분이 아주 나브지 않은 다리 밑 같다고 할까요. 우리가 그 어두운 다리 밑 같은 커다란 공간을 통과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스케일이 바뀌고, 조금씩 조금씩 다른 농담의 빛이 섞여 들고, 환한 피크닉가든을 거쳐 더 밝은 북카페가 저기 위에 보입니다. 오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오히려 애들은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거 같아요. 들락날락 계속 위로 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빛의 바뀜에 대한 어린이 나름의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한 거니까요. 구조물을 만들지 말고, 움직임이 일어나게 만들자, 그저 그 공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흐름들을 따라서 잘 갈 수 있도록 제공만 하자, 어느 정도 들어맞은 것 같아요. 
조성룡, <기품 있게 늙어감에 대하여, 꿈마루>, 웹진 民硏, 2015년 10월 통권 054

꿈마루에서 나와 공원을 빠져나가려 꿈마루를 등지고 걷는 동안 수차례 뒤돌아 보았다. 나였을까, 자꾸만 할 말이 있는 듯, 그래서 한 번 더 보고 싶어했던 건. 꿈마루에 쌓인 거대한 시간의 층위를 불과 두 시간여 만에 온몸으로 실캄케 해 준 조선생님의 안목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1703 능동 꿈마루) 도시에서 공간을 기억하는 방법

세월이 쌓이면 어떤 건물이든 가치를 갖게 된다. 공간을 완성시키는 것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곧 건물과 관계 맺어온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이 스며든 공간을 지우고 헐기에 바빴다. 꿈마루의 부활은 그런 점에서 복원 과정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새로 짓는 것만이 건축이 아니라 되살리는 건축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먼 길 돌아와 우리 앞에 선 꿈마루 앞에선 이제 아이들이 뛰논다. 이 건물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지 알 리 없는 저 아이들의 웃음소리야말로 이 건물을 진정으로 완성시킨 마지막 마감재일 것이다. 
구본준, <마음을 품은 집> 76-77쪽, 서해문집, 2013 



나는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 즉 기본계획만 하기로 하고 시작했어요. 서울시에 새로운 설계를 위한 예산이 없으니 정상적 설계를 할 수 없었죠. 우선, 공공 건물은 행정 상황이나 재정 조건이 부합이 되지 않으면 진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 지으려고 했던 작은 건물의 예산에서 더 이상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큰 건물을 고쳐 쓰도록 맞출 방법을 내야 했습니다. 실은 처음 최광빈 국장에게 남기자고 제안을 했을 순간 아이디어는 이미 떠올라 있었습니다. 관리소에서 요구한 시설은, 사무실, 회의실, 통신실, 화장실 등 해서 기존 공간의 삼분지 일쯤 되었습니다. 교양관 전체 면적이 오천 평방미터쯤 되는데 필요한 것은 천사백 평방미터 정도, 예산도 딱 그만큼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더 나간 건, 지어진 다음 유지관리도 그 삼분지 일의 면적을 유지할 돈으로 할 수 있게 맞추려고 했습니다. 유지 부분이 더 중요할 수도 있고요. 공원 안의 시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역 고가 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쓸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둥이나 지붕은 있지만 바깥으로 바꿔 버린다는 것인데요. 건축이라는 것이 쓸모가 끝났을 때, 또는 기능이나 조건이 바뀌었을 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새로 쓸 수 있는 부분만 살리고, 이것을 풍화되는 과정 속에 두자는 거죠. 
조성룡, <기품 있게 늙어감에 대하여, 꿈마루>, 웹진 民硏, 2015년 10월 통권 054호


올해 세 번째 답사 장소, 능동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우리가 도시에서 살며 어떤 공간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그 다양한 방법 중 건축이 담당하는 역할도 있을 터인데, 꿈마루는 그 역할을 아마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1702 홍성 이응노의 집) 풍경과의 말 없는 대화



홍성에 다녀왔다. 흐린 날이었고 비 소식이 있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수류산방의 도록을 미처 꼼꼼이 읽지 못한 채로 급하게, 쫓긴 듯 가게 되었다. 

홍성에 도착을 해 아내가 미리 찾아둔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으나 주일 휴무. 다시 핸들을 꺽어 빼뽀나루터 근처에 있는 참게탕집으로 가서 매운탕을 먹었다. 매운탕도 달달하니 맛이 좋았지만, 그보다 밥이 정말 맛있었다. 쌀이 토실하진 않아도 어찌나 찰지던지!
좀 쉬라며, 운전대를 잡은 아내 덕분에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내비게이션상으로 거의 다 와 가는 이응노의 집이 좀처럼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왔는지,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이에도 멀리에도 산이 있었고, 그 산은 높기도 하고 낮으면서 길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무표정의 콘크리트 박스 덩어리가 눈앞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이응노의 집이었다. 



겨울이라 노랗게 익은 벼처럼 색을 바꾼 굴곡진 너른 잔디밭 위로, 야트막한 뒷산의 형태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조용한, 하나의 풍경으로서 넌지시, 말은 없지만 마치 대화를 하고 싶은 듯, 그러면서도 수줍어 주춤거리는 듯, 서 있는 이응노의 집.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 주춤거리는 품에 안기고 싶지만, 동선은 서두르지 말라고 옷깃을 잡아챈다. 얇게 흐르는 용봉천의 물이 전진에 쉼을 준다. 그리고 저기, 코르텐강판으로 단정하게 치장을 한 다리가 기왕이면 이쪽으로 돌아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동쪽으로 걸으며 시선을 세우면 저멀리 용봉산의 잘생긴 윤곽이 호젓하게 느껴지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이응노의 집을 바라보면, 제멋대로 떨어트려 놓은 듯 보이는 덩어리들이 걸음걸음마다 얼굴을 달리하며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다리를 건너, 아직 피지는 못하고 피었던 흔적만 가득한 연밭을 천천히 지나며 주위의 풍경을 훑는다. 어느새 풍경의 품에 완전히 감싸인 듯 편안하다. 






좀처럼 걸음이 나아가지 않는다. 풍경에 감싸인 몸은 풍경의 사소한 변화에도 섬세하게 반응한다. 저토록 무표정 하면서도 할 말은 많은 듯한, 아니 어떤 말이라도 들어줄 듯한 덩어리들은 이미 그 자체로 풍경의 완전한 일부가 되어 있으면서도 마치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려 버리는 갈대잎처럼 걸음마다 얼굴을 달리 하니 몸은 성급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요리조리, 한참을 주변을 살피다 드디어 입장. 그토록 밖을 서성였음에도, 수차례 안면은 있어도 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왼쪽 터진 입구로 몸의 방향을 트니, 표정 없는 덩어리에 유일한 표정이라도 되는 듯 쾌적한 얼굴로 밖을 완전히 드러낸 유리 커튼월이 나타났다. 가까이엔 별동으로 된 북카페가, 멀리엔 이미 밖에서 그 호젓함을 생생하게 느낀 용봉산이 유리 커튼월 너머를 장식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뒤로 돌았다. 그리고 펼쳐지는 아늑한 풍경. 밖에서는 분명히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은 당연한 경사가 아주 완만하게, 기하학적으로 방향을 바꾸며 놓여 있었다. 그 아늑한 풍경 속 동선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경사 지붕으로 처리된 전시실은 외부에서의 소박함에 비해 높은 천정고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공간 하나 하나가 비록 크진 않아도 쾌적한 맛이 있었다. 전시를 보았다기보다 아주 만족스러운 건축적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안내 데스크에서 도록을 하나 사려고 했더니 머뭇거리면서 판매용이 아니라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게 '그냥' 준다는 거였다. 아, 맙소사, 수류산방에서 정성 들여 만든 이 아름다운 도록을! 



별동으로 이동해 라떼를 마시며 쉬었다. 전시동보다 작고 아담한 크기인 별동은 유리 커튼월도 낮게 세워져 있어 제한된 풍경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게 좀 더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밖으로 나와 뒷동산에 올라 전시동이 놓인 제각각의 모습만큼이나 서로 다른 얕은 경사의 지붕 너머로 용봉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천천히 돌며 한참을 '조성룡의 풍경'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는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여운 가득한, 잔잔한 감동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이곳에 자주 오고 싶다고 말을 했다. 

















2017/03/10

(1702 홍성 이응노의 집) 이응노의 집, 집 이야기

고암 이응노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홍성 땅에는 고암의 예술혼이라는 켜가 잠재해 있습니다. 선생의 생가 터에 이응노의 집을 새로이 지으면서, 이 땅에 깃든 그 켜를 찾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마을 쌍바위골 사람들이 아침저녁 지나다니는 다리를 건너 시골길을 따라 이 집에 이르게 됩니다. 숲자락에 은근히 가리운 건물은 농촌 풍경에 그저 어우러지기를 바랍니다. 오래된 지도에 나온대로 구불구불 되돌려 놓은 길을 따라 연밭과 밭두렁을 거닐 수도 있습니다. 선생의 고향집 그림대로 지은 초가 곁으로 대숲과 채마밭도, 원래 그렇게 있었던 듯 되살렸습니다. 고암 선생이 늘 보던 그 고향 풍경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 풍경은, 우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담고 있는 고향 풍경이기도 합니다.
전시 공간은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긴 홀에 서로 다른 네 개의 전시실이 이어진 모양입니다. 전시실 사이사이 열린 틈으로 햇빛과 풍경이 드나들며 종일 홀에 결을 드리웁니다. 기념관의 외관은 황토결이 부드럽지만, 안쪽 홀에서는 사뭇 긴장감이 느껴져 대비를 이룹니다.
이응노의 집에 이르는 길은 예술로 난 길이기 이전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근현대사의 질곡 위에 난 길이자, 그 속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굴절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고암 이응노 선생이 그리던 고향 마을, 고암 선생이 걸어갔던 이 길을 걸어오고 지나갈 여러분의 마음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예술의 켜, 새로운 역사의 켜가 이 땅에서 다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조성룡, <이응노의 집, 이야기> 121쪽, 수류산방, 2011

2017/01/22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왜 용산인가?

건립부지는 일본 군대가 주둔하면서 군사기지가 된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계속 미국의 군사기지로 이용되던 곳이다. 1992년 미군기지 남쪽에 있던 골프장이 우리에게 우선 반환되어 '용산가족공원'이 되었고, 앞으로 전체 미군기지의 반환을 전제로 이곳을 새 박물관의 건립부지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열 곳의 후보지 가운데 선택된 용산가족공원은 남산의 녹지 공간과 한강의 수변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서울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아울러 용산가족공원의 북쪽에 위치하는 미군기지가 옮겨지면 서울에서 가장 넓은 땅이 확보되므로, 앞으로 공원과 뮤지엄 콤플렉스 등의 복합문화단지를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선정 이유가 되었다. 
_국립중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 14쪽, 솔출판사, 2005

그러나 용산 지역이 박물관의 부지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논란 또한 빈번하였다. 용산 지역은 갯벌과 모래가 섞인 저지대 퇴적층으로 침수 가능성이 큰 부지였기 때문이다. 침수되었을 때도 가장 먼저 잠기고 제일 늦게 물이 빠지는 습지에다가 대규모 홍수가 나 한강 범람 시 침수될 가능성도 높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건축물이 건조되기에 불리한 유리하지 않은 지반으로 박물관 공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우려로 이어졌다. 특히 유물이 보존되는 수장고에 대한 우려가 제일 컸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공사가 시작되면서 자체 대지조사를 새롭게 진행하였고 부지의 지질 특성에 따라 기초방식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지반을 평균 3미터 정도 성토하여 지반고를 14미터 이상 높이는 공사가 추가되었으며, 200년 주기의 대홍수에도 안전하도록 대지 레벨이 조정되었다. 그러면서 공사는 예정된 일정보다 늦춰지게 되었다.
박물관 부지 논란에 대한 원인으로 대지 특성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부지는 미군이 주둔해 있는 군사지역으로 대지조사와 지질테스트가 시도될 만큼 현장 접근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박물관 건립계획이 나오면서도 대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고 시공자 측은 전한다. 미군 역시도 용산 지역에서는 특별한 군사시설을 건축하는 등의 건축행위가 없었던 곳으로, 골프연습장과 헬기이착륙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정도였다.
이러한 특수성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개관이 힘들지 않느냐는 걱정을 만들기도 했다. 박물관 부지 내 일부(현재 박물관 진입로쪽 광장 일부)가 주한미군의 헬기장이었기 때문이다. 헬기의 이착륙으로 인한 진동이 유물 보존과 박물관 관람 환경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에 외교부는 박물관 이전을 지속적으로 미군측에 요청하였고,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을 4개월 여 앞둔 6월에 이전하였다. 그것은 지난 1995년 1월 요청한 이래 7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현재 이전된 헬기장의 위치는 박물관에서 북서쪽으로 500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소음과 진동으로부터 지장이 없다는 최소거리 400미터를 겨우 넘고 있다.
용산이라는 땅의 특수성은 더 오랜 과거에서부터 시작된다. 과거 청나라와 일본, 현재는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곳이지만, 향후 국립중앙박물관이 활성화되기 위해서 주변 지역이 뮤지움 콤플렉스나 시민공원 등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시민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볼 때 관련 행정당국 간의 협의와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_강권정예, <국립중앙박물관 철거에서 건립까지>, 건축문화, 2005. 11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국제현상설계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상설계지침은 박물관의 시대적인 함의와 논의의 지점을 보여주는데, 바로 한국성에 대한 요구다. 즉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문화의 장 속에 합류' 시키며, '한국 및 한국예술의 고유성에 대한 상징물로서 전시관의 개념을 재정립'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상당히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이 프로젝트는 단일 매스로 풀어낸 정림건축의 안을 당선안으로 결정하면서, 혁신적인 실험보다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박길룡 교수는 이에 대해 "합리성을 선택하는 보수성에 기울어졌다"고 평가한다. 당선작이 모더니즘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합리적 근대성과 지역적 낭만성을 엮고 있으며, "내부의 명쾌한 기능처리가 강점"이었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 나라의 공공시설로서 그 표상이 읽히도록 한 점을 높게 평가"한 심사평은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일 것이다. 전진삼 씨는 이에 대해 "정치적 디자인 수완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문화시설로서 박물관이 아니라, 공공시설로서 그 표상이 읽히는 한국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선택'이었다.
동작대교를 통해 한강을 건너오는 도로는 용산에 이르러 미군기지에 막혀 우회하게 된다. 현상설계지침에는 향후를 대비해 계획되어 있는 직선도로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도시계획시설로 입안된 도로는 곧장 부지 옆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결정났으며, 그 결과 건물의 길이는 서편으로 15미터 가량 이동하면서 축소되었다. 그와 함께 사각형이었던 로툰다영역도 원형으로 바뀌었다. 또한 모든 물길을 거울못에 집합시킴으로써 낮은 지대의 단점을 보완하려던 개념은 근본적으로 침수가 되지 않는 상한선으로 성토하자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결국 건물을 3미터 이상 높아졌고, 거울못은 축소되었으며, 긴 매스와 배치상에서 대응하던 주차장은 건물의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작은 변화는 결과적으로 대형 매스의 부자연스러움을 초래한 원인이기도 하다.  
_임진영, <국립중앙박물관, 10년의 기록>, 공간, 2005. 11

다음은 공간(2005. 11)에 실린 박승홍 인터뷰

(정치적 디자인 수완이 돋보였다는 지적에 대해)
권위주의적 표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적은 없다. 이 건물이 가진 스케일로 권위적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여러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박물관 내부의 프로그램도 공간의 권위적 성격을 완화하고 있다.
공공건물로 인식되는 특성은 일부러 감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조건과 환경으로부터, 그리고 개념으로부터 타당하게 도출된 접근이라면 굳이 그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초기 개념에 대해)
벽, 성벽에 관한 생각을 했다. 벽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보편적인 시간 개념, 초월의 개념, 영원함을 담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정서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또 그 지역의 특성상, 다른 것은 못해도 꼭 한 가지 바랐던 것은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땅에 깊이 박혀 있는 우직한 건물이 되길 원했다. 세련된 멋 없이, 우직하게 박혀 있는 건물 말이다. 

(심사위원들이 못을 없애려 한 이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물과 물이 근접해서는 안 된다는 발상이었던 것 같다. 물이 건물의 아래쪽에 있음을 설명해도 설득이 힘들었다. 또 못의 형태가 한국적인가, 아닌가에서 한국의 못에는 가운데 구름다리가 지나간다. 동선이 너무 돌아간다는 이야기까지 지적되었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을 그대로 옮겨놓지 않겠다는 것이 이미 이 프로젝트의 전제였다. 형태를 따르는 것은 무의미하며, 경험이나 질감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는데도 그런 논의가 나왔다. 또 직선 진입을 고려해보자고 해서 이를 설득하기 위해 시뮬레이션까지 만들었다. 예전 관공서는 대칭 구성에 가운데로 진입하는 관료적인 형태가 많은데, 이런 큰 건물의 경우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면 중압감을 더 주게 된다. 때문에 오히려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주변을 보고 건물의 일부를 보고, 또 멀리서 봤던 건물의 모습을 바로 가까이에서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건물과 사람의 상호교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건물 길이 축소에 대해)
20미터 축소되었다. 그 20미터를 줄이느라, 400미터 퀄리티가 줄어드는 셈이다. 길이를 줄이기 위해 로비 형태가 바뀌었고, 못의 규모도 크게 줄어든 상태다. 그 외에 조경도 조금 더 자연적인 느낌의 구릉이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전체적인 큰 틀은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완성된 건축물의 설득력에 대해)
초기 계획보다 건물이 올라갔다. 이런 규모에는 1미터 높이도 상당히 차이가 크다. 지금 부지는 그 일대에서도 가장 낮은 곳이어서 지침에도 침수지역에 대한 고려가 언급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지 선정 초기에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어쨌든 주어진 부지에서 고안한 것이 바로 못이고, 건물과 수장고를 이중벽으로 조성하는 것이었다. 즉 침수시 그 물을 못으로 다 모아내는 개념이었다. 만약 정말 불가항력의 엄청난 비가 온다면, 물을 빼내고 유물을 옮길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침수를 고려한 설계 아이디어다.
그런데 그래도 계속 문제가 되니까 결국 건물을 올리자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그 큰 매스가 높아지니 중압감은 상당히 더해졌다. 더구나 문제는 뭔가. 건물을 올린 만큼 저층부에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그곳에 주차장을 넣자고 해서 변경된 것이다. 하지만 주차장 역시 전체 배치 개념 중 한 요소였다. 전체 건물의 길이와 주차장의 길이를 서로 같게 하고, 일부러 전면에 배치해서 서로 교류한다는 설정이었다. 사람들이 주차장에 도착해서 연못을 돌아 접근하는 것이 개념이었다. 그래서 중압감이 생길 수 있는 건물의 규모에 적응하고 친근해지게끔 하는 아이디어라서 주차장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주차장을 지하에 두면 사람들은 주차장에서 건물 안으로 바로 올라서게 된다. 물론 기능적으로 합당한 결론이지만, 그것이 옮겨감으로써 전체적인 체험구조가 상당히 뒤바뀌었다. 

(미군 이전 이후 가능성)
그 부분에서 열린마당이 중요하다. 큰 의미에서 남북을 통과한다는 것이지만 말장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산을 바라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미군기지가 개방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북쪽에서 접근할 수 있다. 북측 입면이 정면성이 중요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2017/01/21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청사 철거

숱하게 옮겨 다닌 중앙박물관 역사에 있어 광화문 시절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조선총독부청사 철거와 운명을 같이 한 중앙박물관의 광화문 시절은 우리가 문화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문화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이 일련의 사건 자체가 우리 문화다.
조선총독부청사는 일제의 건립뿐만 아니라 우리의 철거 또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런 사안을 두고 벌일 수 있는 논쟁 또는 담론 즉, 사회적 요인, 역사적 요인, 건축적 요인, 장소적 요인 등 다양한 관점과 가치 들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논의되지 못하고 성급하게 결정이 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개인적 입장이 '존치'에 좀 더 무게가 있어 이런 아쉬움(?)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할 테지만. 이 사안을 두고, 사실 다양한 관점과 지지하는 가치에 입각한 입장이 있을 수 있는데, 굳이 내 입장을 피력하자면 그건 역사적 맥락이다. 물론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도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역사는 흘러가는 것 즉,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양립할 수 없는 (경복궁의) 복원과 (조선총독부의) 존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건 나로서는 야만에 가까운 강요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일제가 우리를 억압한 시절이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역사를 더 잘 기억해야 하고, 경복궁 즉, 조선왕조 역사와 뒤엉킨 그 공간에 대해서도 그런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 끔찍하고 육중한 건물이 아무리 혐오스럽고 분노를 부르더라도 말이다. 아니, 두고두고 분노를 부르기에 더더욱 말이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1984년 7월 23일, 일본 군대에 의해 무력으로 침탈당한 이후, 1912년 관리권마저 조선총독부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관리권을 강탈한 조선총독부는 즉시 경복궁 내부에 청사 신축 계획을 세워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첫해부터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던 건축물을 허물기 시작하였고, 이후 소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라는 박람회를 열겠다는 명분으로 철거를 거듭하여 겨우 중심 건물 몇 채만을 남겨 놓았다. 1915년에 열린 공진회의 1호관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을 완전히 가리는 가설 건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왕조의 상징공간이던 경복궁을 물리적으로 해체하여 유원지로 만들었고, 그곳에서 제국주의 선전을 위한 박람회를 열었다. 일본 제국주의 상징의 완결판은 행사를 마치고 1호관 자리에 그대로 세웠던 조선총독부 청사였다. 경복궁의 위상은 1926년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청사로 인해 치명적인 훼손을 입었다. 
_국립중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 12쪽, 솔출판사, 2005 

출처: 나무위키
출처: 국가기록원

출처: 나무위키

구 국립중앙박물관(조선총독부 청사)은 원래 일제의 조선강점시기에 한반도 경영을 위한 총독부로 지어진 건물로, 철거 이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10년간 쓰였다. 철거 결정은 장기적으로 경복궁 복원 계획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복원사업 중에는 경복궁 내에 새 건물을 지을 계획도 있기도 했다. 당시 건축계에서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에 대한 문제가 근대 건축물의 보존과 역사 관점에 대한 차이로 대립되었고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다. 이유는 조선총독부가 철거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일본과 관련된 서울역사, 시청사 등 모든 건물을 철거해야 하는 원칙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지적되었다. 이러한 근대건축물 보존에 대한 입장은 서구건축양식이 국내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로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보존의 필요성과 일제강점기 건축이 한국 현대건축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연결고리를 갖는 대상이라는 점도 중요한 논점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도시계획에서 경복궁이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할 때, 경복궁 배치의 완결성이 일본이 남긴 건축물로 훼손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경복궁의 제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의 철거가 마땅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첨탑은 광복절 기념행사로 철거되었으며, 10개월에 걸쳐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제2의 광복이라 할 만큼 감격스러운 날을 맞았고 광화문로에서 조선총독부 대신에 경복궁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친일 청산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까지 남아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새 집이 마련되기 정네 다시 한 번 이사를 해야만 하는 예상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철거에 대한 건축계의 논란은 근대건축물 보존의 기준과 범위, 방향에 대한 보존 원칙에 대한 과제를 남기게 되었다.  
_강권정예, <국립중앙박물관 철거에서 건립까지>, 건축문화, 2005. 11 

이제까지 한국 건축은 사회의 주된 통치 세력으로서 정부권력과 긴밀한 결탁관계를 맺어왔다. 정부 주도하에 건축가들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진 대형 건축물들은 대부분 민족 전통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담아 권위적 외관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국 건축의 문제가 건축가의 창조성에 주로 관련된 것이었다면, 총독부청사의 철거는 건축물의 파괴 역시 정치적 이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청사의 철거장면을 지켜본 건축인들은 건물의 돔이 잘려져 나가는 장면, 그리고 건축물이 마치 역사의 죄인처럼 취급되는 상황에서 정치와 건축의 관계의 이면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 근대화의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해 일제에 의한 근대 건축물의 경우 그 의미가 쉽게 곡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한국 건축계는 건축의 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_박혜인·김현섭, <조선총독부 철거문제를 통해 본 한국 건축계의 의식변화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010. 10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연혁


  • 1909. 11. 창경궁 제실박물관 개관
  • 1945. 12. 국립박물관 개관(조선총독부박물관 인수)  *1915. 12. 총독부박물관 개관
  • 1950.  4. 국립민속박물관 남산분관 통합
  • 1950. 12. 한국전쟁으로 소장품 부산 임시 이전
  • 1953.  8. 부산에서 경복궁 내 청사로 복귀
  • 1954.  1. 남산분관으로 이전 개관 
  • 1955.  6. 남산분관에서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 개관
  • 1969.  5. 덕수궁미술관 통합
  • 1972.  7. 국립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 변경
  • 1972.  8. 경복궁으로 신축 이전 개관(현 국립민속박물관)
  • 1986.  8.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구 중앙청)
  • 1993. 10. 국립중앙박물관 신축계획 확정
  • 1994. 12. 새 국립중앙박물관 국제설계공모
  • 1995.  8. 광복 50주년, 중앙청 철거 및 국립중앙박물관 임시 이전 확정
  • 1995. 10. 새 국립중앙박물관 국제설계공모 당선안 결정 (정림건축 박승홍)
  • 1996. 12.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현 국립고궁박물관)
  • 1997. 10.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공식
  • 2005. 10.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이전 개관

아, 이 엄청나게 굴곡진 역사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건축 개요


  • 위치: 서울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 설계: 박승홍(정림건축)
  • 시공: 동부, 대우, 현대, LG, SK
  • 수상: 서울특별시 건축상 대상, 2006
  • 대지면적: 307227.83㎡
  • 건축면적: 49117.38㎡
  • 건폐율: 15.99%
  • 연면적: 137088.95㎡
  • 용적율: 38.03%
  • 층수: 지상 6, 지하 1
  • 최고높이: 43.08m
  • 구조: 철골철근콘크리트
  • 외부마감: 외벽 - THK50화강석 잔다듬, THK3알루미늄시트, 지붕 - 콘크리트평슬래브 위 시트방수, 창호 - THK24로이복층유리
  • 조경면적: 192995㎡
  • 조경: 서안조경
  • 설계기간: 1995. 12 ~ 1997. 6
  • 공사기간: 1997. 10 ~ 200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