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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1

어느 작가의 일기 (버지니아 울프, 2009)

내 일기가 어떤 모양이기를 바라는가? 짜임새는 좀 느슨하지만 지저분하지는 않고, 머릿속에 떠올라오는 어떤 장엄한 것이나, 사소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라도 다 감쌀 만큼 탄력성이 있는 어떤 것. 고색창연한 깊숙한 책상이나 넉넉한 가방 같은 것이어서, 그 안에 허섭스레기 같은 것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도 던져 넣을 수 있는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한두 해 지난 뒤 돌아와 보았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저절로 정돈이 되고, 세련되고, 융합이 되어 주형으로 녹아 있는 것을 보고 싶다. 정말 신비스럽게도 이런 저장물들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 같은 주형이 우리 인생에 빛을 반사할 만큼 투명하면서도, 예술 작품의 초월성이 갖는 침착하고 조용한 화합물이기를 바란다. 오래된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검열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쓰는 것이다. 내가 별생각 없이 써놓았던 것 중, 쓸 당시에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곳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묘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만함은 곧 지저분함이 된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기록해야 할 때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펜이 길잡이 없이 멋대로 제 갈 길을 가게 해서는 안 된다. 안 그러면 버넌 리의 글처럼 느슨하고 지저분해질 염려가 있다. 버넌 리가 글들을 연결하는 방식은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 느슨한 감이 있다. (39)


2013년 겨울에, 책을 샀다고 메모가 되어 있다. 그때 얼마나 읽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리고 왜 지금 버지니아 생각이 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남편 레너드와 함께 가꾸던 근사한 정원이 있는 집, 아니 집이 있는 정원 책을 함께 보고 있다. 

힘이 난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 힘을 느낀다. 

기억은 주로 현실에 굴복해 왜곡되지만, 기록은 당시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그 자체로의 고유성이 있다. 

2026/03/04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2020)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190~191)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생각될 때, 기차에 올라 잠시 창밖을 보며 풍경을 흘려보내다가, 무심코 집어들게 되는 책을 내릴 때까지 보게 된다. 백기행, 시인 백석의 삶을 다룬 김연수 소설을 오늘 막 다 읽었다. 한두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그 전에 백석 시집을 오랜만에 들춰본다.  

2025/12/16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2021)

엄마의 부모님은 뉴욕시 지하철에서 만났다. 러시아워의 E노선 열차에서였따. 1938년이었다. 외할아버지 해리가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을 읽다가 책장을 넘기려는데 외할머니 펄이 할아버지의 손을 막으면서 자기는 아직 다 안 읽었다고 말했단다. 그 기차에 열차칸이 몇 개 있었을까? 그 역을 지하철이 몇 대나 지나쳐갔을까? 그들이 서로 다른 노선 근처에 살았다면? 그들의 부모님이 다른 도시로 이주했다면? 역사를 거슬러올라 끝도 없이 갈 수 있다. (40) 


이런 이야기가 나는 재밌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 책이 될, 칼 세이건의 딸인 사샤 세이건이 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For Small Creatures Such As We>을 읽고 있다. 오늘 아침 출근버스에서부터. 

2025/12/02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2016)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53)


작가가 홀로 들어가 자신이 마주친 미지의 영역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책이라는 신기한 삶이다. 만약 작가가 그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훗날 다른 이들이 그 길을 따를 것이다. 한 번에 한 명씩, 그 역시 홀로 떠나는 여정이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교류하며, 작가가 닦아 놓은 길을 가로지른다. 책은 고독함, 그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독함이다. (85-86)


나는 읽었다. 책과 편지를 읽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았다. 나는 썼다. 가끔은 친구들에게 나의 생활에 관해, 주변 사람들의 생활에 관해 썼다. 잠을 자고, 운동을 하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고, 트롤의 침침한 동굴 같은 슈퍼마켓에서 구할 수 있는 낯선 재료들을 가지고 식사를 준비했다. 길동무라고는 지저귀는 새와 털이 덥수룩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말밖에 없는 새벽의 풍경 속을 걸었다. 평화로웠지만 낯설었다. 

지진은 오랜 시간 쌓여 온 긴장이 낳은 결과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던 그 긴장이 쌓이는 과정은 볼 수 없다. 긴장은 오직 그것이 터져 나올 때만 볼 수 있다. 아픈 사람과 노인, 죽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 광경이 우리 안에 쌓이고,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의 삶이 바뀐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고 그 모습이 영원히 유지된다. 편리하고 극적이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삶에서 우리는 무언가와 거리를 두고, 되돌아가고, 결심하고,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변화는 대부분 천천히 이루어진다. 내 인생에는 변화를 일으킨 여러 사건이 있었고,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위기도 있었다. 루비콘 강을 한두 번 건너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언가를 쌓아가고 있다. (259~260)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352~353) 


솔닛의 책은 띄엄띄엄 읽은 것을 제외하면 처음이라고 해야겠다. 그의 명성이 왜 내게 와 닿았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2025년 현재 19쇄가 찍힌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솔닛의 책 중엔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아닐까. 가장 많이 읽히기도 했겠지. 

에세이지만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금방 흐름을 놓쳐버리게 되는, 문장 하나 하나가 섬세하고 무게감이 있게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책은, 공감을 깊게 해주는 책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다. 

나에게도 솔닛이 경험한 것처럼, "네"라는 이정표가 있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2025/10/25

스토너 (존 윌리엄스, 2015)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을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윌리엄 스토너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주위 학생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간 뒤로도 몇 분 동안 그는 꼼짝않고 앉아서 자기 앞의 좁은 바닥 널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닥 널은 그가 결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학생들의 부산한 발길에 닿아서 니스 칠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였다. 그는 그 바닥 위에 자신의 발을 미끄러뜨리며 나무가 신발 바닥에 닿는 거친 소리를 듣고, 가죽을 통해 느껴지는 거친 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돌로 포장된 길에 신발이 또각또각 닿는 소리가 들리고,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을 간직한 채 서둘러 다음 강의에 들어갔다. 토양화학 교수가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필기하고 외워야 할 내용을 불러주는 단조로운 목소리에 맞서 그 느낌을 간직했다. 이 강의의 내용을 외우는 고된 과정이 점점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해 2학기에 윌리엄 스토너는 기초교양 강의들을 빼버리고, 농과대 커리큘럼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철학과 고대역사의 기초강의 한 개씩과 영문학 강의 두 개를 들었다. 여름에 그는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지만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22~24)

"자네도 도망칠 길을 없어, 친구. 없고말고. 자네가 누군가? 소박의 땅의 아들? 자네가 행세하는 것처럼? 아니, 아니지. 자네도 환자일세. 자네는 몽상가이고 광인이야. 세상은 더 미쳤지만.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푸른 하늘 밑에서 뛰놀고 있지. 자네는 꽤 똑똑해. 어쨌든 우리 둘의 친구인 저 녀석보다는 똑똑하니까. 하지만 자네에게는 오점이 있네. 오래된 약점. 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 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얘기가 아냐.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 목화밭의 바구미, 콩줄기 속의 벌레, 옥수수 속의 좀벌레. 자네는 그런 것들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해. 너무 약하면서 동시에 너무 강하니까. 이 세상에 자네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없네." (45~46)
 

스토너가 온몸으로 자각한 저 느낌을, 나도 조금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25/10/14

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2021)

안다. 늘 그렇듯이 언어란 결국 모든 것을 변조해버릴 것이다. 작가는 이 점을 너무 잘 알고,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좋은 작가들이 문장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피와 땀을 흘리고, 최고의 작가들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몸이 부서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찾아낼 수 있는 진실이 있다면 거기서 찾아내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그런 작가들 - 이들만이 내가 계속 읽고 싶은 작가이고, 나를 고양시키는 작가이다. 이제 도대체 읽을 수가 없는 책들은 - (218)


에너지 소모가 심한 하루를 보내고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 안에서, 그래도 모자라 집에 도착해서 잠깐 집중해서 마저 다 읽었다. 에너지가 소진되어서일까, 책에 깊이 빠져버린 걸까. 신형철처럼 나도 연달아 또 읽어야 하는 걸까. 쓰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한 걸까. <룸 넥스트 도어>라는 영화를 봐야 하는 걸까. 

이 작가를 왜 이제 알았을까. 그 많은 질문들은 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2025/09/28

먼저 온 미래 (장강명, 2025)

"그때까지 정석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알파고  때문에 그 틀이 깨졌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어요. '바둑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정답이 정답이 아니게  됐다, 이제 마음대로 둬도 된다'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다시 '알파고 정석'이 생겼어요. 그때 자유라는 건 틀이 무너질 때 생기는 잠깐의 해방이었던 거죠. 지금은, 저는 되게 슬퍼요. 지금 기사들이나 학생들이 두는 바둑은 저희가 배운 바둑이 아니에요. 전혀 다른 바둑이에요. 에전에는 정석이 있어도 그걸 비틀 수가 있었어요. 그러면 그때부터 또 난리가 나죠. 살짝 비튼 것에 대한 연구가 막 시작되고, 또 다른 변화가 생겨요. 약간 개성 있는 기사가 정석을 비틀면 거기서 변화들이 조금씩 생기고, 정석들이 조금씩 변화했거든요. 예전에 우리가 만들었던 정석은 이렇게 여러 기사가 많은 걸 경험하고 연구하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비틀 수가 없어요. AI가 정해주니까. AI를 사용하면 이길 확률이 바로 뜨니까 '이 수는 아웃' 이렇게 돼요. 전보다 더 견고한 성에 답답하게 갇혀버린 느낌이에요. 바둑이 싫어진 건 아니고, 바둑을 좀 잃어버린 기분이에요.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뺏겨버린 느낌." (58)

 

"제가 어려서 바둑을 배울 때 바둑은 평생 공부를 해도 끝에 다다를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프로기사 수준이 되면 누군가에게 배운다기보다는 스스로 갈고닦고 혼자 수련하는 거죠. 그래서 아무도 답을 모르는 것을 내가 공부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런 게 없어졌어요.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연구하던 것과 AI가 정답을 알려주는 상태에서 연구하는 건 다르죠." (59) 


엊그제 배송된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있다. 챗GPT로 대표되는 AI시대의 - 우리가 아직 완전히 실감한다고 하기엔 섣부르지만 - 예고편은 사실상 '이세돌 vs 알파고' 간 바둑 대결이 아니었을까. 시간을 곱씹어보니 무려 9년 전. 바둑을 두지 않고 둘 줄도 모르지만, 이 책은 바둑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AI가 바둑판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에 대한 르포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바둑 AI프로그램이 보급되면서 변화가 스며들고 있는 바둑계의 풍경을 여러 바둑 기사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약간 자조하듯 읊조린다. 비단 바둑계에서만 그러하진 않을 것, 이라고. 

2025/09/20

어린이는 멀리 간다 (김지은, 2025)

누구에게나 옆집이 있고 아마도 드문드문 어린이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어린이는 살아 있다. 옆집의 어린이는 격리 없이 멀리 갈 수 있어야 하고, 멀리까지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어린이에게 보내는 안부를 잊지 말아야 한다. 'N번방'의 수많은 피해자 가운데 옆집의 어린이가 있다는 현실을 뼈아프게 자각해야 하고, 돌봄 공백 속에 집에 갇힌 옆집 어린이의 근황을, 내가 버리는 쓰레기 더미를 껴안고 살아가게 될 그들과 그들의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고발하고 구조에 나서고 행동하는 옆집의 어른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믿는다. (99)


좋아서, 숨을 고르고 가만 생각하고 싶어서 급하게 읽지 못하는 책이 있다. 주말 아침, 지하에 내려와 주중을 되돌아보고 주말에 할 일을 점검한다. 

좋은 책이 너무 많다고 조바심내지 않는다. 

2025/08/22

가만한 당신 세 번째 (최윤필, 2022)

어려운 재난 용어와 참담한 숫자를 전달하는 게 그의 일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선 유머와 위트를 곧잘 구사하곤 했다고 한다. 2017년 어느 기자회견 도중 그는 '산사태로 기울어진 전신주 사진'도 함께 주목해달라고 말해 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 무렵 비리에 연루돼 조사를 받던 한 정치인이 운전 도중 전신주를 들이받은 사건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거였다. 회견 직후 트위터에는 전신주를 지키자는 뜻의 '#SaveTiangListrik'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뉴욕타임즈> 기자에게는 "트럼프의 가짜 뉴스와 달리 나는 진짜만 제공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는 SNS를 통해 재난 소식과 안전 홍보 메시지뿐 아니라 일상적인 풍경 사진과 재미있는 사연, 직접 촬영한 재해 관련 동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언젠가 그는 "재해와 재난 정보도 사람의 이야기임을 여기와서 알게 됐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결국엔 상실과 치유에 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추상적인 미덕일수록 부풀려 표현하기 쉽고, 부풀린 표현은 말의 값어치를 떨어뜨리지만, 그는 정확하고 신속하고 정직한 공보관이면서 따뜻한 공보관이기도 했다. 정작 그는 "따분한 뉴스만 전하면 나부터도 재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89-290)


최윤필의 <가만한 당신> 시리즈는 시중에 세 권 나와 있는데, '가만히'가 아닌 '가만한'에 한동안 눈길이 가는 제목이다. 내가 그의 글을 처음 언제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한국일보 기자다. 같은 제목의 '부고기사'도 쓰고 '기억할 오늘'이라는 아주 짧은 것도 쓴다. '부고기사' 말 그대로 죽은 자에 관한 것인데, 여느 부고와 달리 그의 부고는 죽음과 장례식장 정보에 그치지 않는다. 

우선 부고 대상이 아주 유명해서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은 아닌 경우가 많지만 나름의 유명세를 가지면서 우리에게 전해질 만한 따뜻하고 '소수'적인 이야기를 가진 이라는 점이 인상적이고, 무엇보다 그 이야기 하나 하나가 다채로우면서도 눈물이 날 만큼 '좋다'. 

따스하면서도 새로운 시선, 여기에 뒤쳐지지 않는 글솜씨. 요 며칠 책에 실린 30인의 부고 기사를 읽는 데 출퇴근 시간을 할애하며, 행복했다. 

2025/07/30

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2017)

세월이 갈수록 나는 베네치아라는 섬이자 도시가 그 전까지 방문한 유럽의 어떤 도시와도 기본 성질이 다르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하는 것이 이 도시 자체에 깃든 연극성이다. 베네치아라는 섬 전체가 꾸준히 성행중인 하나의 거대한 연극 공간인 셈이다. 16세기 사람인 코르나로가 베네치아에 대극장을 짓기를 꿈꾸었다면, 근대에 들어 외적 성장을 멈춘 베네치아는 스스로를 극장화하고 허구화하는 쪽을 택한 것이 아닐까. 산마르코 대성당의 눈부신 모자이크, 석양에 빛나는 석호의 잔물결, 다리 기슭에서 지저귀는 듯한 여자들의 말소리, 리알토 다리 위에서 잠잠한 물을 바라보는 젊은 남녀들, 이들 모두 세계 극장의 무대장치는 아닐까. 베네치아를 찾는 관광객은 종착역 산타루치아에 도착하자마자 이 연극에 동참하게 된다. 자신들이 도시를 구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베네치아가 그들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내가 베네치아의 진짜 얼굴을 찾으려 든 것은 잘못이었다. 가면이야말로 이 도시에 어울리는 진짜 얼굴인 것이다. 

또하나 내가 베네치아의 허구, 즉 연극성을 느낀 일이 있다. 볼일이 있어 섬을 찾았다가 약속 시간에 맞추려 산타루치아 역 앞에서 수상버스를 탔다. 만날 사람은 산마르코 광장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상버스 대합실은 운하에 떠 있어서 사람이 탈 때마다 크게 기우뚱했다. 나는 여기서 산마르코까지 몇 분쯤 걸리는지 매표소 남자에게 물었다. 밀라노라면 적어도 몇 분쯤 걸린다는 유의 답변을 어렵잖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글쎄요, 별일 없겠지요, 하고 참으로 막역한 소리만 했다. 그 이유는 바포레토에 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자고로 배란 단단한 도로가 아니라 넘실넘실 움직이는 물위를 나아간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직접 경험해보니 충격이었다. 그 움직임을 직선 몇 미터식의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물결 가는 대로, 라는 말을 떠올리고 나는 기묘한 초조감을 느꼈다. 약속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내 의지가 아닌 물결이, 물이 시간을 정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이 같은 막연함에 의존하는 베네치아의 시간이, 마치 무대 위의 시간처럼, 여기서만 통용되는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205~206)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중 먼저 읽은 것은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이었다. 우리 나라가 정전협정을 맺은 해, 작가는 파리 유학길에 오른다. 파리에서 2년 유학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가 그곳에서 결혼해 살게 되는데, 코르시아 서점의 운영자 중 한 명이 그의 남편이다. 문학동네에서 세 권의 에세이가 출간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책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지라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을 먼저 읽었고 - 몇 해 전이다 - 오랜만에 잔잔한 에세이가 읽고 싶어 꺼내든 책이 <밀라노, 안개의 풍경>. 

그녀의 글은 내가 생각하는 어떤 면에서 전형적이다. 그러니까 어떤 주제를 쓰든 얼핏 사소해보이는 이야기를 슬쩍 꺼낸 다음, 긴 실타래를 풀어내는 식. 에피소드 자체로 보면 때론 극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차분하다. 안개도 닮았고 잔잔한 물결도 닮아 있다. 

좀 더 쓰고 싶은데, 9년 전 다녀온 나의 베네치아 기억도 더듬어보고 싶은데, 졸리다. 

2025/05/29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2024)

"적당한 행복에 적당히 만족하라. 인생에서 유일하게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불행이다."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EF가 밝히지 않았다는 데 눈길이 갈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걸 돕는 데 유용한 기교였다. 출처를 밝히면 우리는 먼저 그런 말을 한 사람의 삶과 작업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 또 일반적인 통념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에 따라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맞서기도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수업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우리 자신의 격동적이고 안달 나는 삶에서도 우연이라는 요소를 고려해야 해요. 우리가 깊이 만나는 사람의 수는 이상하게도 적어요. 열정은 우리를 맹렬하게 현혹하기도 합니다. 이성도 똑같이 현혹할 수 있죠. 우리의 유전적 유산이 우리 오금줄을 쥐고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우리 삶에서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이 그럴 수도 있고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생하는 사람은 야전의 병사들만이 아니에요. 그런 장애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월하(月下)의 삶의 불가피한 결과인 경우도 많죠." (31-33) 


아포리즘에 현혹될 나이는 지났지만 EF의 말과 행동은 땅에 닿는 면이 많아서, 그런 듯해서, 자꾸 눈길이 간다. 

2025/04/25

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2025)

그러고 나서 주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최악을 상상하며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 마침내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얼굴로 다가올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미래와 끝에 대해서 대비할 능력이 마치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헛되게 믿으면서. 그렇게 말한 후 우리는 주미의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말했다. 이미 다 환해졌다고 생각한 연노란색 하늘과 부드러운 윤곽을 지닌 산등성이가 맞닿은 부분을 따라 아주 가느다란 선이 생기고 그것을 우리가 발견할 때까지. (245)


아침, 출근길. 혼잡한 버스에 운이 좋게 난 자리에 앉아 루틴 대신 백수린의 책을 꺼내들었다. 버스에는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에 힘입어 책 속 인물들의 감정에 빠져든다. 백수린이 펼쳐내는 사소한 일상과 에피소드 들이 마음에 속속 와닿을 때마다 놀라며 감동한다. 

또래, 여성, 작가 들의 작품이 무수히 흩어져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2025/04/09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서점 (이현주, 2018)

내 삶만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그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삶이 나를 완전히 삼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았다. 사람을 볼 때도 나에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뉘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내 삶에 거리를 둘 수 있었고 그제야 타인과 세상이, 무엇보다 내가 더 잘 보였다. 삶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그 너머를 보려는 노력과 삶을 더 잘 살기 위함, 그게 바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임을 깨달았다. (255-256)


옐로나이프와 시애틀 여행을 목전에 두고, 지난 주말 빌린 책을 보고 있다. 론리플래닛이 아닌 동네 서점을 다룬 책이라니. 

누군가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매일 봐야 한다면,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며칠을 방황하면서 든 생각은 여느 때처럼 읽기와 쓰기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에게 읽기란, 쓰기란, 무엇인가. 

미국은 20년 만에 다시 가게 되었는데 마침 발효된 관세 탓에 환율은 금융 위기 이후 최고치라고, 점심을 먹으며 본 뉴스 채널에 나오고 있었다. 

이 와중에 미국이라니, 트럼프의 미국이라니. 

하지만, 잘 모르겠지만, 시애틀은 조금 구미가 당긴다. 

너바나, 지미 핸드릭스, 아마존, 코스트코, MS, 보잉, 램 콜하스의 도서관, 프랭크 개리의 뮤지엄... 이런 것들보다 흥미로운 건 도시가 형성된 자연(빙하)의 힘과 도시를 둘러싼 자연 그 자체 때문에. 

우리 여정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저 대자연을 향해. 

2024/11/01

라이너 쿤체(Reiner Kunze)

은엉겅퀴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2024/10/13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강지나, 2023)

빈곤은, 특히 세대를 이어 빈곤이 대물림되는 문제는 사회 전반에서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노동 가치보다 자산 가치가 훨씬 높은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기반으로, 50퍼센트에 육박하는 나쁜 일자리가 임금 불평등을 형성하면, 경쟁과 선별 위주의 교육 제도가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부실하고 편협한 복지 제도가 안전망으로서의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데서 빈곤 대물림은 구조화되고 있다. (258)

2024/10/01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2024)

바슐라르의 이 책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들 둘레로 문학적 공간이 생겨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만드는 책. 우리가 유년에 꿈꾸던 것을 온전히 이해하게 해주는 책.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매혹과 동시에 반감을 주는 책.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간의 시학>은 집에 관한 책이다. 제목을 보며 저자가 건축가거나 시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프랑스의 저명한 과학철학자다.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난 바슐라르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며 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지방의 소읍인 고향에서 중등학교 물리, 화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43세의 늦은 나이에 소르본대학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 교수가 되었다. 

바슐라르는 집념은 무척 강했지만 타인의 말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과학사 강의에서 한 학생으로부터 강의에서 다루는 세계가 너무 살균되어 있다는 불평을 듣고 존재론적 충격에 빠진다. 그날 그는 자신이 그동안 왜 불만족스러웠는지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 세균 들을 들끓게 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던 거지요." (154-155)

문제는 우리가 살림살이를 하면서 이러한 이미지들을 체험할 수 없을 정도로 기계적으로 일한다는 데에 있다. 한 사람이 온 가족의 설거지와 빨랫감을 해치우듯 처리해야 하는 분주한 일과 속에서 노동은 기계적 활동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엔 몽상을 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떠올린다면 바슐라르는 반근대적 몽상가다.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생산성의 논리에 철저히 반대하는 것이 몽상의 논리다. 몽상은 여유 없는 곳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162) 

2024/08/01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2014)

모든 사랑은 환영이고, 모든 소통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뤄지는 불가능의 제스처란 것을.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고, 현실은 기껏해야 모호하며, 슬픔은 모두의 삶에 상시적이다. (234)

'모든 비평은 일종의 자서전이다'라는 책의 첫 문장을, 독자는 책을 다 읽은 뒤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불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독서도 일종의 자서전이다.' 우리는 각자 자의식의 짐을 지고 혼자 걷는 사람들이지만 그 처지만큼은 다들 같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타인의 글에서만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대한의 위안이다. (237)

이것은 데이비드 실즈의 글이 아니라, 옮긴이 김명남의 문장이다. 물론(?) 아직 본문을 읽기 전이다. 가끔 옮긴이가 누구냐에 따라 옮긴이의 글을 먼저 읽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런 근사한 옮긴이의 글이라면, 당장 본문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2024/07/14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2016)

"그렇게 큰 집만 설계하다가는 스케일 감각이 이상해지거든."

혼잣말처럼 이구치 씨에게 이야기한 것이 진짜 이유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고 나서 몇 년간 국가가 관여하는 대규모 공사를 위촉받아 침식을 잊고 일했지만, 설계 방침을 둘러싸고 담당 부서와 대립하다가 굴복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만큼 미국에서의 경험과 평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활약한 대부분의 건축가는 미래지향적 도시론이나 문화론을 웅변하면서 잇달아 공공 건축을 낙찰했다. 한편 선생님은 설계 경합을 전제하는 공공 건축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원래가 튀는 건축론을 피력하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디어가 다루는 기회도 저절로 적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의 선생님 건축을 십 년, 이십 년 뒤에 직접 보고 돌아다니면서 무라이 슌스케라는 건축가가 묵묵히 계속해온 일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고도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16)

아스플룬드의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의 디테일은 정면 현관문부터 시작된다. 이용자가 잡는 손잡이에는 아담과 이브의 작은 조각이 있다. 이제 바야흐로 '금단의 과일'인 사과를 먹으려고 하는 아담은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아직 없으니까, 무화과 잎사귀로 숨기지 않고 편안하게 하반신을 드러내고 있다. 도서관 입구 문손잡이에 조금 우습기도 하고 오묘하기도 한 그 순간을 고른 것은 아스플룬드의 작은 장난일까? 도서관에는 그밖에도 의장意匠인지 장난인지 모를 디테일이 모른 척 준비되어 있다. 이용자의 시각과 촉각에 호소하는 이들 디테일은 체감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예컨대 대열람실 개가식 책장 벽면에는 호두나무 벽이 책 뒤 표지 같은 곡면을 이루고 있고 놋쇠를 사용한 아르 데코 스타일의 상감상 상감象嵌은 금박을 입힌 가죽 책표지를 연상시킨다. 입구에서 완만하게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는 촘촘하고 빈틈없이 무두질한 가죽이 감겨 있다. 음료대에는 작은 인체를 조각한 수도꼭지가 달려 있다. 모든 것이 오리지널이고 실용성보다 장식성을 우선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디자인이다. 열람실 책상도, 의자도, 소파도, 벤치도 각각 여러 종류가 있고, 독서등까지 포함하면 조명 디자인만도 열 종류에 가깝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을 들여서 세부를 완성해나갔을까? 조명 회사가 기업으로 성장할 때까지는 조명 디자인도 건축가의 일이었다. 섀시나 수도 관계 제품도 마찬가지였다. 

이 오리지널 디자인들은 아스플룬드의 신경질적인 집착이라기보다 디자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기쁨으로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명도, 가구도, 예전의 건축가에게는 맨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는 즐거운 마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골격이 아니라 살갗이고 윗도리 안감이고, 요리를 완성하는 디저트 같은 것.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들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귀찮기 때문에 연구할 여지가 있다. 아스플룬드나 라이트 시절에 건축가가 마지막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의 촉감과 기억이 선생님한테 계승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232~233) 

2024/03/28

우화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부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유리병을 낚아 올렸어요. 그 병에는 종이 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답니다:

"사람들이여, 나 좀 구해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대양이 나를 파도에 싣고서 무인도에 갖다 버렸답니다. 모래사장에 나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서둘러주세요. 나 여기 있을게요."

"이 쪽지에는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틀림없이 이미 늦었을 거야. 유리병이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녔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첫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적혀 있질 않군. 대양이 한둘도 아니고, 어디를 말하는지 통 알 수 없잖아." 

두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라는 섬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불현듯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편적인 진실이란 원래 그런 법,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_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최성은 옮김 

2024/03/21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2023)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장화 뒤꿈치로 잔디를 뜯고, 차를 몰고 가기 전에 지붕을 철썩 때리고, 침을 뱉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기를 좋아한다. 신경 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12-13)

아빠는 진짜 그러면 좋겠다 싶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17)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27)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28)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69-70)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아저씨가 말한다. "오늘 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아저씨가 웃는다. 이상하고 슬픈 웃음소리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72-73) 

대단히 바쁘지도 그렇다고 아무 일 하지 않고 보내지도 않지만, 올해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있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은 슬프지만, 짬을 내서 책을 -- 이를 테면 고다르의 인터뷰라든가, 서리북에 실린 서평 따위 -- 조각내 읽을 때면 옅은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다음 주 책 모임 때문에 키건의 책을 처음으로 읽게 되었는데 비슷한 분량의 책이 한 권 더 있어 이 책 '맡겨진 소녀(foster)부터 붙잡고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우리가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을 잘 참아내 침묵을 지킨 후에 찾아오는 다행스런 여운 같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