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2
2017/02/02
서울
가보지 않은 서울에 가봤다고 거짓말하면서 슬그머니 가슴이 두근거리던 기억도 난다. 아마 나는 서울이란 이상한 일이 얼마든지 있는 곳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내가 친구들에게 이상한 일을 얘기할 때는 "이것은 서울에서 일어난 얘기다"고 했으니까.
_김승옥, '나의 첫 창작', <뜬 세상에 살기에> 54쪽, 예담, 2017
김승옥의 수필집이 출간됐다. 1977년에 초판이 나왔던 책인데 40년 만에 새로 꾸미고, 당시 초판의 복간본도 함께 묶어 판매하고 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배송된 책을 훑어보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새롭다. 김승옥의 오래된 새글을 읽는 기분이.
2016/11/09
서울은 내게 친숙한 도시다.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서울에 살았고, 사는 동안 서울의 많은 곳을 좋아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야말로 내겐 서울의 이미지요, 서울의 목소리다. 하지만 지금, 올림픽대로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의 서울에 대한 친숙함이 이제는 그리움 또는 애정 가득한 편안함으로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물론 지긋지긋한 서울의 복잡함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교통 정체로 대변되지만, 더 이상 서울에서 일상을 영위하지 않게 된 지금은 이마저도 서울이지 -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서울이 내 안에서 두 번째 고향 같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면, 용인, 아니 그보다는 수원이 삶터이자 일터로서 그동안 서울이 맡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수원이 아닌 이곳 서울에서 실감한다. 이제 나는 수원에 산다.
여의도 다녀오는 길에
여의도 다녀오는 길에
2014/07/25
성북동을 위하여 - 수화 김환기
| 樹話, 부암동 환기미술관 |
순서가 뒤바뀐 듯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1세대 추상화가 수화 김환기를 화가가 아닌 건축물로 먼저 대하고 알았다. 부암동 환기미술관 말이다. 부암동에는 수화가 타계하고 김향안 여사가 생존해 있을 때 건립한 환기미술관이 있는데, 90년대 초, 미술관 건립부지로 그들 부부가 한국전쟁 전후로 살았던 성북동을 생각했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성북동 지세와 유사한 지금의 위치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집을 구하는 친구에게 나는 성북동으로 오기를 권한다. 그러면 대개는 성북동은 안 좋아하는 모양이다. 심한 친구는 성북동은 못살 곳으로만 안다. 교통이 불편한 것을 첫째 흠으로 잡는다. 실은 성북동이 좋다는 것은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뱅뱅 도는 세상이다. 헌데 불편한 성북동으로 왜 오라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차 머리에까지 도보로 20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성북동은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꽃이 피고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 달도 산협의 달은 월광이 다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환기미술관
8월의 쏟아지는 비를 뚫고 처음 찾은 부암동은 덕분에 한적했고 미술관의 분위기는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수화는 더욱 환상적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성북동을 위하여 - 수화 김환기>를 쓰고 있다.
그때 부암동에서 수화를 처음 만나고 그가 쓴 글을 모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읽고 그의 그림을 접하면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수화가 성북동에 살게 된 이력도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의 성북동엔 그가 김향안 여사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수향산방이 남아 있지 않다(대신 그가 성북동에 살 적에 그렇게 성북동에 와 같이 살자고 했던 혜곡 최순우의 집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재단법인 내셔널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매입,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때때로 그는 나를 성북동 자기 집 이웃으로 이사하라고 권했고 나를 위해서 그는 그의 바로 이웃집을 비롯해서 그럴싸한 집들을 몇 번이나 찾아서 보여 주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성북동 골짜기가 너무 호젓해서 나의 집 식구는 늘 술에 취해 늦게 돌아오는 나를 탓 삼아서 좀처럼 성북동 이사를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북동 수화 이웃으로 이사하는 일은 유산이 되었다. 그가 영영 가 버린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새삼스러워진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천장이 얕은 좁은 지프차 속에서 그 큰 허우대를 활등처럼 구부리고 같이 앉아 공항으로 나가는 동안 그는 털썩거리는 차 속에서 몇 번이고 "거지 같은..." "거지 같은..." 하는 식의 알 듯 모를 듯한 허탕지거리를 뇌까렸고, 나는 수화에게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고 당부를 했다.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최순우, 학고재
그의 호, 수화의 수(樹), 향안 여사의 향(鄕)을 합하여 이름 지은 수향산방은 원래 미술사학자였던 근원 김용준이 자신이 살던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겨준 집이다. 수화는 이곳에 살며 성북동의 정취를 사랑하였고 그림을 그렸으며 그가 평소 아끼던 항아리를 한가득 놓아두기도 하였다.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에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노시산방이 지금쯤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도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근원수필> 김용준, 열화당
성북동, 성북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먼저 떠올릴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로 인해 성북동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쉽게 그 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인데, 여기 이산(怡山) 김광섭 시인의 또 다른 시가 있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수화가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한국에서 연락이 오기를,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하니 출품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김향안 여사는 심사위원이라면 모를까 작품 의뢰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화를 냈다 한다. 하지만 수화의 동의로 작품을 출품하게 되고, 그 작품으로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때 수화가 출품한 작품이 이산의 <저녁에> 구절을 인용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뉴욕시절의 추상화들은 대부분 ‘무제’로 남겨졌다.
2014. 7. 20. 제주, 두모악갤러리 무인찻집에서
2014/07/06
나폴레옹제과점이 있는 한성대입구역
주로 산책으로 연결되는 동네와 성북동은, 나에게는 하나의 공간처럼 여겨지지만 그렇게 본다면 대학로나 낙산공원, 더 나아가 삼청동, 계동까지도 묶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우선 분리하기로 하되 하나처럼 느껴지도록 잇고 싶은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성대입구역이라는 지점을 두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정말 한성대입구역이야말로 내가 걸어 다니곤 하는 많은 장소들을 연결해준다. 우선은 복원한 성북천의 시작 지점이고 집에서 낙산공원에 가려면 스치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대학로에 넘어가거나 집으로 넘어올 때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리고 성북동에 갈 때 명륜동이나 와룡공원에서 가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한성대입구역을 거쳐 가곤 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내게 있어서 주요한 지점인 한성대입구역엔 무엇이 있나?
우선 나폴레옹제과점이 있다. 빼놓을 수 없는 1번이다. 나폴레옹제과점은 원래 지금 있는 곳에서 낙산성곽 방향인 길 건너편 1층에 작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언젠가 지금의 자리에 건물을 짓더니 명성(?)에 걸맞는 크기로 새로이 자릴 잡았다. 언제부터 내가 그곳에 드나들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빵보다는 케이크가 먼저였다. 지금은 가족이나 지인의 기념일이 있으면 케이크는 꼭 나폴레옹제과점에서 사려고 할 정도로 그곳 케이크에 익숙해지고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엔 바로 먹지 않을 거라면 반드시 냉장보관을 하라는 위대한 통팥빵과 생크림빵이 있다. 지금도 통팥빵을 처음 먹었을 때의 감격이 생생하다. 길쭉하고 날씬한 빵을 가볍게 부여잡고 한 입 물었을 때 전해지는 통팥의 질감과 냉장보관에서 비롯되는 차가운 감촉, 바스러질 것 같은 빵의 조화는 과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빵 나오는 시간을 별로 고려하지 않고 그때 그때의 운에 맡기는 나로서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지 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나폴레옹에 갔을 때 쟁반도 들지 않고 냉장보관 코너로 직행을 했는데 통팥빵이 하나도 없으면 몹시 서운하다.
재료의 솔직함이 전해지는 건 생크림빵도 마찬가지다. 네가 진정 이제껏 먹어왔던 게 팥빵이고 생크림빵이 맞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통팥빵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생크림빵 역시 마치 차갑고 신선한 아이스크림이 빵 사이에 그대로 스며 있는 듯한 맛을 선사하는데 이건 냉장보관의 효과가 극대화된 것임이 분명하다. 원래 팥빵을 좋아하는 나는 우선 통팥빵을 사수하고 생크림빵으로 눈을 돌리는 편인데, 어쨌거나 이 둘의 맛을 본 후터는 다른 곳에서 동종의 빵을 먹기가 약간은 꺼려진다.
| 나폴레옹제과점, 한성대입구역 |
주로 퇴근길에 가끔 책을 읽으러 스타벅스에 가곤 하는데, 내가 자주 가는 스타벅스는 바로 나폴레옹 옆에 위치하고 있다. 대체로 스타벅스는 분위기가 비슷하고 손님이 많은 편이지만 이곳은 선곡도 볼륨의 정도도 괜찮아서 대화 소음이 심하지 않은 곳이라면 두세 시간 정도 책을 읽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또한 바로 옆에 나폴레옹이 있으니 그곳에서 요기할 빵 몇 가지를 사서 가면 시간이 더욱 든든하다. 특히 식사 무렵 스타벅스에 앉아 있으면 다수의 사람들이 스타벅스 커피에 나폴레옹 빵을 먹으며 시간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얼마 전, 동네에서 둘째 조카 돌잔치를 하고 부모님이 내려가시기 전 가볍게 저녁을 먹어야 하기에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다가, 가볍게 먹을 거면 국수나 먹을까요, 하고는 성북동 국시집으로 갔다.
나폴레옹제과점 뒷골목에 가정집 형태로 간판이라고 해야 손바닥보다 조금 큰 게 고작이어서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가 수월치 않은 이곳을 알게 된 건 맛 칼럼을 맛깔나게 쓰는 황교익의 글에서였다. 박정희 정부 시절, 분식의 날이 지정되었던 1969년에 명동에 있는 명동교자와 함께 문을 열었다고 하니 벌써 40년이 넘는 세월이 쌓인 곳이다.
어느 날 산책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들러 처음 국수를 먹었는데, 대체로 슴슴한 엄마의 손맛에 길들여진 내 미각에 이곳 육수는 조금 짰다. 이는 나보다 더 싱거운 미각을 자랑하는 누나를 이곳에 처음 데려왔을 때에도 드러났는데 누나는 국물을 한 수저 입에 넣더니 “왜 이렇게 짜!”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거부감이 들 정도의 짠맛은 아니고 대체로 무난한 편이다. 그리고 기계로 빼낸 면은 가늘고 푹 삶아져 있으며, 양은 제법 많아서 한 그릇 비우고 나면 그윽하게 배가 불러온다.
이곳을 찾는 손님층을 보면 오래된 식당들이 대체로 그렇듯 나이 지긋하신 가족 단위가 많은데 그 분들이 여전히 이곳을 찾는 걸 보면 그래도 맛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 같다.
2014. 7. 6.
2014/06/18
돈암에 산다
동네를 기록하기 위해 필요하거나 준비해야 할 건 따로 있지 않다. 그저 무엇을 적을까에 대한 선택의 문제만 남을 뿐.
이 동네에 산 지 벌써 햇수로 7년째. 근처 정릉에 산 시절을 포함하면 나의 서울생활 12년 중 대부분을 이 근방에서 산 셈이다. 그리고 지나온 시절만큼 나는 이 동네에 적응하게 되었고 딱 그만큼, 늘지도 줄지도 않은 애정을 갖고 있다. 그 말은 ‘익숙함'이란 말로 대신해도 무방할 것이다.
돈암이란 지역이 내게 익숙함으로 다가온 건 어쩌면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이모 가족,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의 언니 가족이 돈암에 오래 거주하셨다고 했다. 마당이 딸린 한옥에서 오래 사셨다고 했는데 사업의 실패였나, 어떤 이유로 집과 가지고 계시던 건물을 몽땅 팔고는 지금의 녹번동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 집이 참 좋았는데, 하시면서 아버지는 꽤 자주 아쉽다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었다. 아버지의 기억은 한참 젊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공부를 곧잘 했던 삼촌들이 서울에서 학교 생활을 할 때 그 집에 거주를 했었는데 맏형인 아버지께서 종종 서울에 와 삼촌들 뒷바라지를 하시곤 했다.
누나와 함께 정릉에 살다가 내가 의정부로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좀 더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옮기고자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누나도 영등포 부근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여서 전철이 가까운 곳이 둘 모두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다가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전세였던 집을 떠나 바로 옆동의 아파트를 구매해 이사를 했고, 매형이 지방에서 근무할 때라 굳이 집을 나갈 필요없이 나 또한 그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벌써 4년이나 지나버렸다. 그리고 조카가 둘이나 생길 동안 나는 그대로, 지금의 집에, 동네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는 직장도 수원으로 다니고 있으면서, 벌써 4년에 가까운 동안, 직장 부근으로 독립을 하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이 질문을 나는 꽤나 오랫동안 받아왔다. 나를 아는 누구나, 이 점을 몹시도 궁금해 했고, 눈치없는 녀석이라느니, 괜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느니,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수식처럼 붙어다녔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까?
이 동네에 산 지 벌써 햇수로 7년째. 근처 정릉에 산 시절을 포함하면 나의 서울생활 12년 중 대부분을 이 근방에서 산 셈이다. 그리고 지나온 시절만큼 나는 이 동네에 적응하게 되었고 딱 그만큼, 늘지도 줄지도 않은 애정을 갖고 있다. 그 말은 ‘익숙함'이란 말로 대신해도 무방할 것이다.
돈암이란 지역이 내게 익숙함으로 다가온 건 어쩌면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이모 가족,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의 언니 가족이 돈암에 오래 거주하셨다고 했다. 마당이 딸린 한옥에서 오래 사셨다고 했는데 사업의 실패였나, 어떤 이유로 집과 가지고 계시던 건물을 몽땅 팔고는 지금의 녹번동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 집이 참 좋았는데, 하시면서 아버지는 꽤 자주 아쉽다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었다. 아버지의 기억은 한참 젊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공부를 곧잘 했던 삼촌들이 서울에서 학교 생활을 할 때 그 집에 거주를 했었는데 맏형인 아버지께서 종종 서울에 와 삼촌들 뒷바라지를 하시곤 했다.
누나와 함께 정릉에 살다가 내가 의정부로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좀 더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옮기고자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누나도 영등포 부근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여서 전철이 가까운 곳이 둘 모두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다가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전세였던 집을 떠나 바로 옆동의 아파트를 구매해 이사를 했고, 매형이 지방에서 근무할 때라 굳이 집을 나갈 필요없이 나 또한 그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벌써 4년이나 지나버렸다. 그리고 조카가 둘이나 생길 동안 나는 그대로, 지금의 집에, 동네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는 직장도 수원으로 다니고 있으면서, 벌써 4년에 가까운 동안, 직장 부근으로 독립을 하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이 질문을 나는 꽤나 오랫동안 받아왔다. 나를 아는 누구나, 이 점을 몹시도 궁금해 했고, 눈치없는 녀석이라느니, 괜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느니,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수식처럼 붙어다녔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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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내 방에서 보이는, 서울 |
2014/05/31
프롤로그
모든 건 게으름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 혹 열망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몸소 깨닫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좀 더 맞는 말일 거다. 아마도 중학교 시절로 기억이 되는데, 그때부터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문구점에 가서 산 일기장이 하나둘 모여가며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었다. 군대에 가서는 수양록이라고 하는 걸 썼다. 모두 쓰게끔 되어 있는 것이었지만 늘 일기를 써오던 내게는 좀 더 특별하면서도 일상적으로 생각되었다. 제대를 하고, 인터넷 문화가 더욱 발달한 한참이 지나서까지도 나는 손일기를 썼다. 지금도 물론 손일기를 쓴다. 짧게는 다이어리에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있고, 따로 마련한 일기장에 가끔 조금 긴 일기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랩톱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의 편리함을 뿌리치지 못해 이제는 쓰는 게 아닌 입력하는 일기의 양이 훨씬 많아졌다. 뭐라도 좋다. 내겐 쓴다는 행위가 중요하므로.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을 했다. 여행을 기록하고, 일상을 기록하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블로그 따위에 잡다함을 남기는 등의 다양한 기록들에 대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것들이 어디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쓴다고 쓰는 것 같은데 뭔가 체계가 없고 어딘가에 마구 흩어져 있으며 머릿속과 마음속에 들어있는 온갖 쓰고자 하는 것들은 나 자신의 밖으로 나올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간단하게는 블로그를 만들어 제목을 만들고 폴더를 설정해 쓰고 싶은 주제들을 구분해 가며 쓸 수도 있을 텐데, 벌써 몇 개의 블로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충동적으로 쓰는 것 외 제대로 써본 경험이 없다. 그건 체계의 문제이기도 질서의 문제이기도 했다. 뭔가 그럴 듯한 형태의 것으로 내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결국 내겐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올해 들어 주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구글드라이브의 편리함은 내게 의지만 있으면 모든 쓰는 것들을 손쉽게 어디서든 관리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지만 드라이브 안에 가지런히 늘어선 다양한 폴더와 파일 들은 지금껏 문제가 됐던 건 다름 아닌 ‘당신의 게으름 때문이오!’ 라고 꾸짖는 듯했다. 모든 것들을 아카이브화 하자는 생각이 들면서 구글드라이브를 더욱 애용하고 있는데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고도 안 되는 게 있으니 그것 역시 게으름이며 이런 내 게으름을 극복해내지 못하면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라는 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필립 로스의 말마따나 영감에 의지해서, 비록 아마추어 중에서도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아마추어처럼 단번에, 스치는 영감을 포착해 쓴다는 건 쓰는 행위가 아니라 편의에 따르는 기회주의적인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쓴다는 건 그 어떤 야심도 아니고 그 어떤 번뜩이는 영감도 아닌 올곧은 밀고 나감이다. 사실 그런 의지의 표명으로 올해의 일기장 제목을 <밀고 나감>으로 정하지 않았던가?
계절을 타기 때문은 아니지만 이번 봄, 계획했던 쓰기가 대부분 중단되었다. 쓰고 있던 쓰기를 포함해 진작에 쓰고자 했던 <서울>은 장소에 대한 떠올림만 있었지 쓰기는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울>을 쓰고 싶었던 건 이제 서울에 살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아서였다. 그건 예감의 문제이자 현실의 문제였다. 바득바득 떼를 쓰는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사실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느슨주의자의 집요함으로 여전히 서울에 머무르고 살고 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그건 머리로부터라기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껏 서울에 살며, 약 12년 정도, 좋아했던 장소에 대해 기록을 해보자고. 동네인 돈암과 성북동을 비롯해 가까운 낙산공원과 계동을 비롯한 북촌 일대, 광화문과 서촌 일대, 부암동과 멀리는 상수동까지. 이건 단순히 장소를 말하려는 목적의 글은 아닐 것이다. 나의 추억이 담길 것이고 그래서 나는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서울'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습관처럼 가던 곳들이라 옛 사진이라 해봐야 별것 없겠지만 그래도 앨범을 뒤적여 사진들을 하나둘 찾고, 이참에 그곳들을 다시 찾아 새로 사진을 찍을 예정이다.
아주 익숙하면서도 좋아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이제 봄이 지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우리 앞에 들어서겠지만 왠지 마음이 봄처럼 생기 있게 반짝거림을 느낀다. 이토록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게 글이라는 형식을 빌러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 고맙고 기쁘다.
2014. 5. 25. 청량리로 가는 열차에서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 혹 열망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몸소 깨닫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좀 더 맞는 말일 거다. 아마도 중학교 시절로 기억이 되는데, 그때부터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문구점에 가서 산 일기장이 하나둘 모여가며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었다. 군대에 가서는 수양록이라고 하는 걸 썼다. 모두 쓰게끔 되어 있는 것이었지만 늘 일기를 써오던 내게는 좀 더 특별하면서도 일상적으로 생각되었다. 제대를 하고, 인터넷 문화가 더욱 발달한 한참이 지나서까지도 나는 손일기를 썼다. 지금도 물론 손일기를 쓴다. 짧게는 다이어리에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있고, 따로 마련한 일기장에 가끔 조금 긴 일기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랩톱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의 편리함을 뿌리치지 못해 이제는 쓰는 게 아닌 입력하는 일기의 양이 훨씬 많아졌다. 뭐라도 좋다. 내겐 쓴다는 행위가 중요하므로.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을 했다. 여행을 기록하고, 일상을 기록하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블로그 따위에 잡다함을 남기는 등의 다양한 기록들에 대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것들이 어디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쓴다고 쓰는 것 같은데 뭔가 체계가 없고 어딘가에 마구 흩어져 있으며 머릿속과 마음속에 들어있는 온갖 쓰고자 하는 것들은 나 자신의 밖으로 나올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간단하게는 블로그를 만들어 제목을 만들고 폴더를 설정해 쓰고 싶은 주제들을 구분해 가며 쓸 수도 있을 텐데, 벌써 몇 개의 블로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충동적으로 쓰는 것 외 제대로 써본 경험이 없다. 그건 체계의 문제이기도 질서의 문제이기도 했다. 뭔가 그럴 듯한 형태의 것으로 내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결국 내겐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올해 들어 주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구글드라이브의 편리함은 내게 의지만 있으면 모든 쓰는 것들을 손쉽게 어디서든 관리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지만 드라이브 안에 가지런히 늘어선 다양한 폴더와 파일 들은 지금껏 문제가 됐던 건 다름 아닌 ‘당신의 게으름 때문이오!’ 라고 꾸짖는 듯했다. 모든 것들을 아카이브화 하자는 생각이 들면서 구글드라이브를 더욱 애용하고 있는데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고도 안 되는 게 있으니 그것 역시 게으름이며 이런 내 게으름을 극복해내지 못하면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라는 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필립 로스의 말마따나 영감에 의지해서, 비록 아마추어 중에서도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아마추어처럼 단번에, 스치는 영감을 포착해 쓴다는 건 쓰는 행위가 아니라 편의에 따르는 기회주의적인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쓴다는 건 그 어떤 야심도 아니고 그 어떤 번뜩이는 영감도 아닌 올곧은 밀고 나감이다. 사실 그런 의지의 표명으로 올해의 일기장 제목을 <밀고 나감>으로 정하지 않았던가?
계절을 타기 때문은 아니지만 이번 봄, 계획했던 쓰기가 대부분 중단되었다. 쓰고 있던 쓰기를 포함해 진작에 쓰고자 했던 <서울>은 장소에 대한 떠올림만 있었지 쓰기는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울>을 쓰고 싶었던 건 이제 서울에 살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아서였다. 그건 예감의 문제이자 현실의 문제였다. 바득바득 떼를 쓰는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사실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느슨주의자의 집요함으로 여전히 서울에 머무르고 살고 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그건 머리로부터라기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껏 서울에 살며, 약 12년 정도, 좋아했던 장소에 대해 기록을 해보자고. 동네인 돈암과 성북동을 비롯해 가까운 낙산공원과 계동을 비롯한 북촌 일대, 광화문과 서촌 일대, 부암동과 멀리는 상수동까지. 이건 단순히 장소를 말하려는 목적의 글은 아닐 것이다. 나의 추억이 담길 것이고 그래서 나는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서울'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습관처럼 가던 곳들이라 옛 사진이라 해봐야 별것 없겠지만 그래도 앨범을 뒤적여 사진들을 하나둘 찾고, 이참에 그곳들을 다시 찾아 새로 사진을 찍을 예정이다.
아주 익숙하면서도 좋아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이제 봄이 지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우리 앞에 들어서겠지만 왠지 마음이 봄처럼 생기 있게 반짝거림을 느낀다. 이토록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게 글이라는 형식을 빌러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 고맙고 기쁘다.
2014. 5. 25. 청량리로 가는 열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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