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02

그리고 아바나

벤쿠버를 거쳐 토론토 공항에서 제법 긴 시간을 기다려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토론토의 날씨가 아주 맑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커피와 머핀으로 주린 배를 조금 채우고 드디어 아바나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맨 뒷좌석. 한참을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창을 올리자 어느새 항공기가 아주 낮게 비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쿠바 대지 위를 날기 시작한다. 온통 푸른색으로 뒤덮인 대지 곳곳에 박힌 야구장이 '우리야말로 진정한 야구왕이지!'하며 너스레를 떠는 듯했다. 그리고 몸이 떨리는 진동과 함께 항공기가 호세 마르띠 공항에 착륙하자 기내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무사 착륙을 환호하는 이들의 '순수'가 아직 어리둥절한 내겐 신기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웰컴이었다.

(쿠바에서는 입국심사를 할 때 여권이 아닌 여행 내내 소지하고 다녀야 하는 별도의 종이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그리고 다시 쿠바를 떠날 때 그것을 반납하게 되는데, 이로써 여권상으로는 내가 쿠바에 다녀온 사실이 없는 셈이다. 그 종이를 사진에 담아두지 못한 나는, 쿠바가 그리울 때면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애쓰곤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박한 호세 마르띠 공항을 빠져나오자 열대기후 특유의 후텁지근한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졌지만 아바나의 공기를 채 실감하기도 전에 엄중한 시선으로 근무를 하고 있던 공항 직원이 택시를 잡아주었다. 여전히 '협상'에 익숙한 나는 제스처와 함께 요금 할인을 시도해 보았지만 'Down'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을 전혀 설득시키지 못하고 택시에 탑승, 이윽고 그윽한 엔진 소리를 뱉으며 택시가 출발하자 배기통에서는 반 세기 이상 묵은 매연이 뿜어져 나왔다.
택시가 베다도 지역으로 들어서자 호세 마르띠 메모리얼과 아바나 혁명광장, 그리고 그곳 건물에 걸린 철골 윤곽의 체의 모습이 쿠바에 왔음을, 이곳이 쿠바임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으나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믿기에는 모든 게 아직은 너무 낯설기만 했다.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걸어야 했고 만져야 했으며 느낄 수 있어야 했다.

혁명광장, 아바나, 쿠바, 2007

예약한 숙소도 없이 우선 지리적 균형감각을 찾기 위해 유명하다는 호텔 나시오날로 가자고 했고, 베다도를 관통해 멀리 말레콘이 시야에 들어오자 곧 호텔에 도착을 했다. 하지만 그곳에 묵을 생각은 없었기에 택시에서 내린 나는 곧장 돌아서 말레콘을 향해 걸었다. 우선은 그곳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고 조금씩 부서지는 파도의 부스러기가 피부에 와닿을 때의 그 느낌이 낯설면서도 기분을 좋게 했지만 제법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 때문에 말레콘에 걸터앉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숙소를 잡기 위해 론리에 소개된 몇 곳에 가봤지만 가는 곳마다 빈방이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까사' 마크가 붙은 곳을 찾아다니며 그곳 분들의 알음알음으로 겨우 방을 구했는데 너무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하나 같이 친절한 그들이었기에 가격 협상은 생각지도 않았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뻗어 내리 7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났더니 숙소 주인이 '한국에서 걸어왔냐며, 죽은 줄 알았다'고 우스개 소릴 하셨다. 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에 여전히 비몽사몽인 내게 Cuba라 적힌 론리만이 이곳이 다름아닌 쿠바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2014.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