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오름에 가더라도 용눈이오름은 먼저 시야에 두고 가고 싶었다. 그런데 우린 용눈이오름에 오르기로 했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소들은 분주하게 무리지어 다니며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작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직 해는 떠 있었지만 이미 서쪽 하늘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하긴 우리가 도착한 시각이 벌써 6시가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니 천천히 오르면 능선쯤에서는 석양을 볼 수 있다는 계산이 쉽게 나온다.
완만한 동선을 따라 아주 느긋하게 걸었다. 가는 방향 멀리엔 한라산이 왼편으로는 용눈이의 능선과 멀리 성산일출봉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측으로 돌아보면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이 부동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발걸음을 서두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가을에 왔을 때에는 억새가 그곳의 정취를 만끽하는 데 일조했는데 이번엔 푸름이었다. 여름 한가운데의 푸름들, 가을에 자리를 내주기 전의 푸름들은 말 그대로 푸르렀다. 바람이 조금 불었던가. 너도나도 사진을 많이 찍으며 발걸음을 더욱 느리게 붙잡았다. 어느 부부는 웨딩 촬영을 하는지 소들이 이리저리 풀을 뜯어먹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더니 기어코 그들이 관람로를 점령했다. 어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어떤 어른은 재밌다고 연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우리는 동선을 조금 벗어나 동편 언덕에 오르는 여유를 부리며 풍경을 만끽했다. 더 만끽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시간을 더디게 쓰고 있었다.
드디어 능선에 다다랐는데 소들이 언제 능선까지 점령했는지 풀을 뜯는 소들과 무엇이 그렇게 간지러운지 푯말지주에 죽어라 목을 긁어대는 소들로 마치 장날 시장에라도 나온 듯한 북적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새 해는 점점 멀어져 우리의 눈높이를 낮추고 있었다. 동시에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갔다. 하지만 내 시선을 거듭 사로잡은 건 다랑쉬오름도, 지는 해도, 멀리 일출봉과 우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 먼 바다 - 수평선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주섬의 중심 한라산이었다. 백록담이 있는 한란산 주봉의 실루엣이 오름에 오르는 내내 시선을 사로잡더니 기어코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을 내 작은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발상이고 시도이지만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찍었고 그럴수록 한라산의 신비로움만이 액정에 어렴풋 드러났다.
능선을 반쯤 돌았을까, 해가 지자 금세 어두워진 주위 탓에 어느덧 모두들 내려가고 능선엔 우리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마 타이밍이 필요했다고 하면 이때였으리라. 초생으로 가고 있을 그믐이 우리 눈앞에 나타날 타이밍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 모든 게 좋았기 때문에 더는 우리에게 무엇도 필요치 않은 듯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울 건 없었다. 이미 가득해진 우리 마음과 감성은 그것이 더해졌다면 넘쳤을지도 모른다.
가장 높은 능선에 도달하니 이제는 어둠이 금세 안개와 함께 주위를 애워쌌다.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꼈다. 다랑쉬오름은 분화구로 구름을 빨아들이고 있었고 이제껏 잘 보이기만 했던 조금 멀리 있는 모습들은 모두 사라지거나 아련한 불빛으로 바뀌었다. 바다로 다가갈수록 불빛이 많아졌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우리도 아이폰 플래시를 켜고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크게 서두를 수 없었던 건 동선에 수두룩했던 소똥 때문이었다. 이제는 거의 사위가 캄캄해졌고 우리는 내려와 자동차에 앉았다. 어느새 별이 내려앉았다. 별이 내려앉고 귀뚜라미가 쉴 새 없이 울어대는 마당에 급하게 출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속삭임에 가까운 엷은 대화로 시간을 하염없이 축냈다.
2014.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