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같은 소설을 쓴 사람이 한평생을 꽤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이 놀랍고, 그 성실한 삶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 운영해왔다는 것도 놀랍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일랜드의 노동계급 출신으로 잘 안 팔리는 소설을 쓰는 작가의 생존 방식이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2005년 맨부커상을 놓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경합을 벌일 무렵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양장본만 2만5천 부 가까이 팔린 반면, 밴빌의 <바다>는 겨우 3천 부가 조금 넘게 팔렸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헤아린다면 밴빌의 성실한 직장 생활을 포함한 많은 과외 활동은 다른 이유와 더불어 자신이 예술가로서 하는 일을 제대로 해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1968년 미국에서 생활할 때 만난 부인 재닛 더넘은 글을 쓰고 있을 때의 그를 가리켜 "막 유혈이 낭자한 살인을 마치고 돌아온 살인자" 같다고 말했다는데, 밴빌의 조건을 떠올리면 이 말을 여러 의미에서 되새겨보게 된다.
_정영목, <바다>(문학동네, 2016) 해설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 조지 버나드 쇼... 프랑스 작가들에 빠질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아일랜드 작가에 매료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존 밴빌이 (진부한 표현이지만) 혜성처럼 등장했다.
밴빌을 알게 된 건 악스트Axt(2016. 11/12)에 실린 번역가 정영목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는 '삼각관계'라고 제목 붙인 글에서 그가 번역한 두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쓴 두 작가를 이야기한다. 거기에 자신을 끼어넣어 삼각형을 그리면서.
내가 원래 <바다> 같은 작품을 좋아했던가? 그것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런 유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그 전에 오랫동안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직업적인 이유로 <바다>를 읽게 되었는데, 이건 어쨌든 좋았다! 감추어져 있던 취향이 발견된 걸까? 아니, <바다>가 내게서 취향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좋은 작품의 힘이란 그런 거겠지. 자신만의 설득력으로 자신에 대한 취향을 만들어내는 것.
_정영목, '삼각관계', 악스트(2016. 11/12)
아, 나의 경우는 정영목에 빗대자면, 그냥 취향이라고 해야 할까. 단순히 그렇게 말하고 말기에 <바다>는 지나치게 매력적이다. 압도적인 분위기, 낯설지만 돋보이는 표현들, 새로움. 이 모든 것들이. 그래서 악스트를 읽고, <바다>를 읽고 내친 김에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문학동네, 2009)까지 읽었다. <에브리맨>을 다시 읽은 이유는 단순하다. 가디언에 실린 밴빌의 서평 - <에브리맨>의 모든 것은 헨리 제임스였다면 몇 페이지에 다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 때문에. 그렇다. 그 두 작품은 <바다>와 <에브리맨>이다.
Our lives are a shimmer of nuances between the two fixed poles of birth and death. That flash which is our being-here, brief though it be, is infinitely complex, made up of poses, self-delusions, fleeting epiphanies, false starts and falser finishes - nothing in life finishes save life itself - all generated from the premise that the self is a self and not merely a persona, a congeries of selves. Literary art cannot hope to express that complexity, but it can, by the power of style, which is the imagination in action, set up a parallel complexity which, as by magic, gives a sufficiently convincing illusion of lifelikeness. (John Banville, guardian, 2006)
우리 삶은 출생과 죽음이라는 고정된 양극 사이에 아른거리는 뉘앙스들이다. 여기 우리의 존재라는 그 반짝임은, 비록 짧지만, 무한히 복잡하여, 겉치레, 자아 기만, 덧없는 현현, 그릇된 출발과 더 그릇된 마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 삶에서는 삶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 이 모든 것이 자신은 자신이지 단순한 등장인물, 자신들이 모인 덩어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발생한다. 문학예술은 그런 복잡성을 표현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스타일, 즉 작동하는 상상력의 힘으로 그에 대응하는 복잡성을 구축할 수 있으며, 삶과 닮은 상태라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환상을 제공할 수 있다. (번역 정영목)
이 글을 읽는 순간, <바다>에 대해 사실 더 할 이야기가 사라졌다. 로스와 대비되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마저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