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운동 시합이란 자주 개인의 사소한 대립이나 이해관계를 넘어 어떤 맹목적인 집단 의지 같은 것을 형성하는 데엔 큰 공헌을 하는 수가 있다. 거대하고 맹목적인 집단 의지 속에 잡다한 개인의 불평이나 의식의 편향 같은 건 일거에 깨끗이 해소되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끔 특정 집단의 작은 불평이나 이해 갈등을 해소시키고 그 집단에게 목적하는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엉뚱한 스포츠 행사를 이용하는 수가 있다. 그야 물론 모든 스포츠 행사가 그 스포츠 고유의 목적 이외에 여러 가지 다른 부수적인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당연했다. 이 섬에 대해 말한다면 원장은 그 스포츠 행사를 통해 원생 개개인 간 또는 병사 지대와 직원 지대 간의, 원장과 원생들 간의 인간적인 신뢰감을 회복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에 대한 투철한 자신감을 길러주는 데에 보다 큰 목적이 있었다. 조원장 자신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원장의 동기가 어디에 있었든 상욱은 역시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151쪽, 문학과지성사
몇 년 전에 읽으려고 사둔 책을 최근 몇 달 사이 김현의 전집을 이리저리 들춰보다가 자주 눈에 띈 이청준이라는 이름 때문에 겨우 집어들어 읽게 되었다. 독서는 많은 경우 이런 식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경우의 독서는 '적중'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살아있었지만 살아도 알지 못했을 시절 5공이 펼친 3S정책을 생각한다. 하지만 어디 5공뿐이랴. 지금도 간혹 나는 '국가대표'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스포츠의 막강한 힘을 볼 때면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 자신도 거기에 편승하고 있는 게 확실한 가슴 뜀을 느끼며 진실로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집단에 몸서리를 치고 만다. 별 수 없는 일일까.
1960년, 같은 교양학부 강의실에서 1년을 함께 보냈는데도, 그때의 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는 김승옥이 자취하고 있던 성북동 산기슭의 허름한 집의 자취방 윗목에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던 그이다. 학보로 군대를 갔다가 제대한 뒤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우리가 그때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 속에 자기가 지켜야 할 무슨 엄청난 것이라도 간직한 듯,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서로들 가능하면 말을 삼가려 하고 있었던 시기라, 자신들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여서 근 20여 년을 사귀어오면서도 나는 그가 그의 글 속에 피력한 과거 외에는 그의 과거를 거의 모른다. 그때 우리는 아마 소주를 마시며 그 당시에 발표되던 소설 얘기를 했을 것이다.
20여 년간 그와 사귀어오면서, 아니 그와 술을 마셔오면서 내가 언제나 그의 의견에 승복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와 여러 번 다퉜고 그 다툼을 때로는 절교 상태로까지 우리의 관계를 몰고 갔다. 그때마다 그는 작품으로써 다시 그의 의견을 나에게 되물었다. 때로 그 작품들은 나를 감동시키기도 하였고 때로는 나를 더욱 실망시키기도 하였다. 한 호로서 창간과 동시에 종간이 되어버린 <68문학>을 내놓고 그것의 앞날의 방향에 대해 심한 논쟁을 한 끝에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서로 퍼붓고 헤어진 후 거의 1년이 넘어서 그는 나에게 <소문의 벽>을 보여줬다. 그것을 읽고 나는 감동했다. 우리의 우정은 그때 다시 살아났다. 나는 그와 같은 작가를 친구로 갖고 있는 게 즐겁다. 그는 언제나 작품으로써 질문에 대답하는 그런 작가이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다음과 같은 문학이다.
문학은 언제나 자유롭고 새로운 시선으로 우리의 삶과 세계를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힘이 없이 총체적인 넓이로 바라보고 경험하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삶을 그 삶의 본래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되돌아가 살게 하여야 한다.
김현, <문학과 유토피아> 242~245쪽, 문학과지성사, 이청준에 대한 세 편의 글 '욕망과 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