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정릉(貞陵)에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교수단지를 지나는데 주차되어 있는 카니발에 라이트가 켜져 있었다. 그래서 자동차 앞유리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로 메시지를 넣었더니 금방 '고맙다'고 메시지가 왔다. 그러고선 흥천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몇 해 전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의 작은 자동차를 타고 지리산에 가는 길이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중산리에서 올라 천왕봉만 다녀오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오르기 위해 중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해에 있는 바닷가에 민박을 잡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옆방에 엠티를 온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몹시 떠드는 바람에 우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중에 떠나기로 했다. 조금 일찍 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눈을 붙이다가 등산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출발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자동차 라이트가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지방이고 밤중이라 지나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었고 공교롭게도 새로 포장을 하고 있는 임시 도로여서 가로등이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아 라이트가 나가버리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가까스로 길가에 차를 세우고 긴급출동을 불렀다. 긴급출동을 기다리며 우리는 캄캄한 지방의 소도시 길가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웃으며 얘길 나누고 있었다. 20분쯤 지났을까. 렉카차 한 대가 도착해서는 불을 비추고 차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으나 라이트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렉카차를 돌려보내고 차를 세운 자리에서 해가 뜰 때까지 자기로 하고는 자동차 시트를 뒤로 젖혔다. 이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우습지만은 않았다. 어느새 날이 밝고, 다시 중산리로 차를 몰았다. 둘 다 피곤했지만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부산으로 향했다. 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KTX를 타기 위함이었고 울산이 고향인 친구는 집에 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운전은 내가 하기로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고속도로는 조금 혼잡했다.
부산역에 도착해 한쪽에 차를 세우고 역전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가 저녁을 먹고 헤어졌는데 막 열차에 올랐을 때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니 왜 미등 켜놓고 갔노?"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고 울산에 가야 하는 친구는 이번엔 배터리가 방전이 돼 시동이 걸리지 않는 바람에 긴급출동을 또 불러야 했다. 친구는 피곤하기도 하고 이미 어두워진 탓에 부산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울산에 갔고, 그제서야 정비소에 들러 라이트를 고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