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1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병리적인 변화는 항상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나타나고 진행됩니다.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에,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개개인으로만 바라볼 때 그런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난 100년간 거대한 혁신을 이뤄낸 현대 의학으로도 알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병원에 찾아오는 개개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의 임상진료 과정에서는 환자 개개인의 몸에 새겨진 사회구조적 원인을, 현상 너머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지역에서 금연하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에서 AIDS로 사망한 여성도, 동유럽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던 나라에서 결핵에 걸린 어린이도, 개개인만을 바라본다면 특정 질환을 가진 환자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이들을 아프게 했던 '원인의 원인'이 보입니다. 그 원인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위험한 작업장을 방치했던 일터가 금연율을 낮췄고, HIV 치료약 공급을 전적으로 민간보험에 맡겨둔 지역사회가 AIDS 사망률을 높였고, 경제위기 속에서 공공보건의료 영역의 투자를 줄이기로 한 국가의 결정이 결핵 사망률을 증가시켰습니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건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기 때문이지요. 건강은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정치·경제적인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건강해야 공부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70~72쪽, 동아시아,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