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의 탄생
정조는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금의 수원시 융릉으로 옮기고 명칭도 현륭원으로 바꿀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 명예회복 사업의 마지막 단계였다. 원래 이 자리는 화성읍치소가 있었던 궁벽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는 명분으로 세자릉원의 이장지로 선택됐고, 근처에는 용주사를 새로 지어 능원의 원찰로 삼았다. 아울러 수원읍의 치소와 주민들을 새 장소로 이전시켜야 했다. 신도시 건설의 명분을 찾은 것이다. 신도시의 입지로 결정된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화성역, 팔달산 아래였다.
구 수원읍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갓진 곳이라면, 신 수원읍을 동북남 3면이 툭 터진 곳으로 서울과 삼남을 잇는 길목에 위치했다. 교통이 편하면 사람이 꾀고, 사람이 많으면 상업이 발달한다. 애초부터 새 수원을 상업이 발달한 자족적 도시로 성장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한 입지 선택이었다. 18세기는 사회 각 분야의 생산력이 확대되고, 그 잉여 생산물들이 유통될 수 있는 상업이 발달하던 시기였다. 사회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폐쇄적이고 전통적인 도시를 버리고 개방적인 새로운 도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1> 340-342쪽, 돌베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