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5

박완서

막내까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집에 잔손 갈 일이 없어지자 비로소 이제부터라도 엄두를 내야 할 것 같은 엄청난 욕구가 내 안에 있다는 걸 느꼈다. 그 걷잡을 수 없는 욕구는 증언의 욕구였다. 6.25 때 오빠하고, 끝내 자기 자식을 두지 못해 나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삼촌이 비참하게 죽었다. 남들이 다 남쪽으로 피난가 있는 동안 남아 있던 우리 식구들은 강제로 찢기고 일부는 북으로 끌려가야 하는 고난을 겪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인들 안 당했겠는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_ 박완서,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그리움을 위하여> 357쪽, 문학동네, 2013. 

지금 내 나이를 반으로 툭 갈아 그 시절로 돌아가면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군대에 있던 나는 한 선임이 추천해준 책 몇 권을 읽었는데 그 중 한 권이 박완서의 것이었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그저 소설을 읽었다는 감각만이 남아 있는 정도이지만 그 당시에도 '아주 오래된'과 '농담'이 나란히 적힌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후 책 읽기를 권장하는 프로그램에서 작가의 소설이 소개되었던 것 같고, 작가의 자전적 소설들이 꽤 인기를 끌었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2013년 무렵에 아주 우연한 계기로 작가의 데뷔작인 <나목>을 읽게 되면서 작가를 다시금 대면하게 되었다. 

작년 어버이날, 그러니까 지금 무렵일 텐데 본가에 아버지 읽으라고 세계사에서 펴낸 박완서 소설전집을 보내드렸는데 아버지가 살아온 시절을 관통하는 소설들이어서 그런지 아버지도 그런 시대적 증언에 대한 부분을 몇 번이고 언급하셨다. 

두 달 전쯤에는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의 제목을 단 작가의 인터뷰집을 읽었는데 그게 또 너무 좋아서 이번에는 문학동네에서 펴낸 작가의 단편소설 전집을 주문해 그 중 맨 끝 권인 <그리움을 위하여>를 이제 막 다 읽은 참이다. 

요즘 활발히 출간되는 소설들에 견주어 보면 어디서 이렇게나 찰진 우리 말들의 향연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특유의 냉소와 농담은 또 어쩌고. 

2022/10/15

독주毒酒

 술의 종류

  • 양조주(발효주): 시간의 술
    • 재료: 물, 당분, 효모
    • 당분 → (효모-미생물) → 알코올
      • (당분) 곡류 → 막걸리, 청주, 맥주
      • (당분) 과일 → 와인
    • 도수의 한계(효모의 활동 때문): 14~15도

  • 증류주: 불의 술
    • 액체 → 기체 → 액체 
    • 알코올의 끓는점: 78도
      • 막걸리, 청주 → (열) → 소주
      • 맥주 → (열) → 위스키
      • 와인 → (열) → 브랜디 

증류주 
  • 위스키
    • 제조: 보리, 감자, 옥수수 등 곡류를 발효해 얻은 술을 증류
      • 숙성: 참나무(oak) 통 → 향과 색(갈색)
    • 종류: 발렌타인, 시바스리갈, 커티삭, 조니워커, 제이앤비 등
  • 브랜디 
    • 제조: 과일을 발효해 얻은 술을 증류 
      • 대표주자: 꼬냑 → 프랑스 지역 이름 
      • 숙성: 참나무(oak) 통 
    • 종류: 카뮈, 헤네시 등
  • 보드카 
    • 제조: 밀, 보리, 호밀, 감자 등으로 만든 술을 증류시키며 자작나무 숯을 채워 넣은 탑을 통과
    • 특징: 무색, 무향, 무취
    • 종류: 앱솔루트

기타 
  • 진, 압생트
    • 증류 과정에서 노간주나무(juniper berry)를 더해 다시 증류 



데낄라
  • 원어: 떼낄라 Tequila
    • 프랑스 꼬냑(cognac)처럼 멕시코 할리스코주 도시 이름 → 그 지역에서 생산된 술
  • 주원료: 멕시코 원산의 선인장(학명 Agave, 보통 Maguey라 부름)의 뿌리
  • 데낄라 명명의 조건: 원료인 아가베 아술(Agave Azul) 51% 이상 함유 
  • 빈티지: 오래될수록 진한색 
    • 블랑꼬(Blanco, 증류 직후 병에 담긴 것) → 레뽀사도(Reposado, 6개월 이상 숙성) → 아녜호(Anejo, 최대 2년 숙성)

2022/09/04

쿠바리브레

주말 늦은 밤. 응접실에 앉아 일기를 쓰다 망원경 책을 뒤적이다 테라를 한 병 딸까, 하고 몇 번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다 돌아간 건조기와 식기세척기 도어를 열어두려고 2층에 올라가서는 그만 '쿠바리브레'를 한 잔 만들고 말았다. 필요한 건 얼음, 콜라, 아바나클럽뿐이니. 

쿠바에서 정말 맛있게 마셨었는데. 

가게에 들어가 자릴 잡자마자 다가오는 직원에게 검지를 치켜 들며 쿠바리브레, 라고 말하면 얼음 담긴 잔을 가져와 내 앞에 턱하고 놓고서는 럼을 들이붓고 곧장 콜라를 쏟아낸다. 끝. 

기포가 이글대는 리브레를 한 잔 마시면 말 그대로 자유를 실감..... 하지는 않고 그냥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냥 그런 맛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딱 이 과정이 너무 경쾌해서 맛까지 상쾌해지는. 그런. 

2021/10/16

두 개의 방

철거일이 되었을 때, 저는 이리로 올라와서 포클레인이 집들을 하나씩 부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건 꽤 현실감이 없는 일이어서, 우리집 차례가 되었을 때도 나는 그냥 멍하니 보고 있었죠. 몇 번의 타격 끝에 마침내 한 쪽 벽에 무너져내렸을 때, 액자가 보였어요. 해바라기를 그린 조악한 유화였지요. 해바라기 그림을 걸어두면 집에 돈이 굴러들어온다며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취해 사들고 오셨던 바로 그 액자였어요. 액자 안의 해바라기가 햇볕 아래 무방비로 드러났을 때, 그 때부터 내 강박이 시작된 것 같아요. 바로 그 순간에요. 그게 거기 있었다는 걸, 나는 정말 완전히 잊고 있었거든요. 

_문진영, <두 개의 방>[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29-30쪽, 문학동네, 2021. 


나는 생각했다. 지금 있는 것들은 모두 무언가의 잔해 위에 있다는 생각. 어쩌면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마음의 단면을 잘라 보면 나를 통과해 간 기억과 감정의 잔해들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 단층을 관찰하고 소환하는 과정에서, 이미 사라진 것들은 다시 '지금, 여기'의 일부로 새롭게 모양을 만들지 않을까. 

_문진영, <두 개의 방> 작가노트 중에서. 

좋다. 
문진영의 이 소설을 다 읽은 순간에 나는 존 반빌의 <바다>를 떠올렸다. 
어떤 마음의 분위기, 그것이 끌고 가는 소설의 뉘앙스. 
작가노트나 인터뷰 읽는 걸 좋아한다. 소설을 비롯한 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긴 하나, 속 이야기가 궁금할 때가 많다. 그랬을 때, 문학이 더 멋지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어떤 생각으로 빚어진 하나의 작은 세계를 목도하는 근사한 체험. 
아 좋다. 

2021/09/26

선큰 화단 만들기

선큰에 나무를 더 심고 싶은 계획은 진작에 있었다. 
아내가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내가 미지근하게 반응하는 동안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올해는 넘기는 말자는 마음에 좀 더 적극적인 행동에 돌입, 
양이 적다고 인부가 안 온다고 해서 
선큰 화단을 위한 조적은 아내가 직접 쌓았다. 
2층 베란다에서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순서대로, 
0.5B → 1B마감 → 데크를 위한 추가 조적 → 마사토 반입 → 계수나무 추가 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