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1
2017/03/10
(1702 홍성 이응노의 집) 이응노의 집, 집 이야기
고암 이응노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홍성 땅에는 고암의 예술혼이라는 켜가 잠재해 있습니다. 선생의 생가 터에 이응노의 집을 새로이 지으면서, 이 땅에 깃든 그 켜를 찾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마을 쌍바위골 사람들이 아침저녁 지나다니는 다리를 건너 시골길을 따라 이 집에 이르게 됩니다. 숲자락에 은근히 가리운 건물은 농촌 풍경에 그저 어우러지기를 바랍니다. 오래된 지도에 나온대로 구불구불 되돌려 놓은 길을 따라 연밭과 밭두렁을 거닐 수도 있습니다. 선생의 고향집 그림대로 지은 초가 곁으로 대숲과 채마밭도, 원래 그렇게 있었던 듯 되살렸습니다. 고암 선생이 늘 보던 그 고향 풍경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 풍경은, 우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담고 있는 고향 풍경이기도 합니다.
전시 공간은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긴 홀에 서로 다른 네 개의 전시실이 이어진 모양입니다. 전시실 사이사이 열린 틈으로 햇빛과 풍경이 드나들며 종일 홀에 결을 드리웁니다. 기념관의 외관은 황토결이 부드럽지만, 안쪽 홀에서는 사뭇 긴장감이 느껴져 대비를 이룹니다.
이응노의 집에 이르는 길은 예술로 난 길이기 이전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근현대사의 질곡 위에 난 길이자, 그 속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굴절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고암 이응노 선생이 그리던 고향 마을, 고암 선생이 걸어갔던 이 길을 걸어오고 지나갈 여러분의 마음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예술의 켜, 새로운 역사의 켜가 이 땅에서 다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조성룡, <이응노의 집, 이야기> 121쪽, 수류산방, 2011
2017/03/01
수원화성의 탄생
정조는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금의 수원시 융릉으로 옮기고 명칭도 현륭원으로 바꿀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 명예회복 사업의 마지막 단계였다. 원래 이 자리는 화성읍치소가 있었던 궁벽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는 명분으로 세자릉원의 이장지로 선택됐고, 근처에는 용주사를 새로 지어 능원의 원찰로 삼았다. 아울러 수원읍의 치소와 주민들을 새 장소로 이전시켜야 했다. 신도시 건설의 명분을 찾은 것이다. 신도시의 입지로 결정된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화성역, 팔달산 아래였다.
구 수원읍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갓진 곳이라면, 신 수원읍을 동북남 3면이 툭 터진 곳으로 서울과 삼남을 잇는 길목에 위치했다. 교통이 편하면 사람이 꾀고, 사람이 많으면 상업이 발달한다. 애초부터 새 수원을 상업이 발달한 자족적 도시로 성장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한 입지 선택이었다. 18세기는 사회 각 분야의 생산력이 확대되고, 그 잉여 생산물들이 유통될 수 있는 상업이 발달하던 시기였다. 사회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폐쇄적이고 전통적인 도시를 버리고 개방적인 새로운 도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1> 340-342쪽, 돌베개, 2006
2017/02/26
흔히 넓은 길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옛날에 어느 유명한 건축가가 얘기했듯이, 길을 가다가 건너편에 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최소한 '아. 누구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좋은 길이라, 그 폭을 넘어서면 이 쪽하고 저 쪽하고 관계가 없는 거죠. 분당도 그렇지만 신도시에 가 보면 밤에 혼자 걸어갈 때면 사람은 별로 없고, 양쪽 인도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상점은 있는 데만 죄다 모여 있고, 아파트 근처는 컴컴해요. 조닝 플랜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섞이지 않는 겁니다. 그런 척도가 아쉬운 거죠. 멀찍이 보면 쾌적한 느낌으로 보일지언정, 그 쾌적함이 시각적인 거지, 심리적으로는... 물론 서울에 비해서 길이 넓으니까 쾌적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건 학습된 거죠. 미국이야 대중 교통이 좋지 않으니 차도가 넓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동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반드시 도시를 그렇게만 만들 필요는 없는 거죠. 모든 사람이 자가용 모는 것도 아니고, 우리 나라처럼 이렇게 좁은 지역에 몰려 살 때 꼭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성룡, <응답하라, 도시 주택 (제2편)>, '시원하고 넓은 길', 웹진 民硏
나는 어린시절에 서울의 가회동, 낙원동, 제동, 인사동을 중심으로 고불불한 많은 길을 누비며 걸어 다녔고, 자전거도 타고, 제기도 차며 그 길 속에서 자랐다. 그때 길은 나에게는 마당이요, 놀이터요, 시쳇말로 거실이요, 휴식의 처소요, 나의 몸 크기와 살갗에 알맞은 주위 공간이었다.
양쪽 팔을 벌리면 끝이 닿을락 말락 하는 좁은 골목에서부터 끝이 막혀있는 막다른 골목길에 이르기까지 골목길의 폭도 일정치 않을 뿐더러 아늑하게 구성되어 있어 보금자리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골목길에 깔릴 즈음에 대문이 삐걱 열리며 흰 한복 차림의 여자들이 치마 끝을 살짝 쥔 채로 문턱을 넘어 드나드는 풍경은 붉게 타는 저녁놀과 대비되어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처럼 골목길은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삶의 훈훈한 정과 체온을 빠짐없이 옮겨 주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또 지나가는 동네 어른이 그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가기가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그런 크기의 길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수근, <좋은 길을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92쪽, 김수근문화재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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