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갖가지 원인이 우연히 겹쳐서 '지금'이 태어나고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는 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성립되는 것 아닐까요. 구키 슈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우연이다. 우연은 '현실의 생산점'이다. (103)
수많은 조건과 여러 줄기의 흐름이 한순간 '만나서' 우연히 '지금'이 태어납니다. 야구에서 그런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저는 현실이란 이렇게 성립되는구나 하며 놀랍니다. 그와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현실이 태어나는 순간은 물론, 그 순간을 받아들이는 선수들의 강인함도 아름답습니다. 선수들은 현실이 우연에 좌우된다 할지라도 결코 노력과 준비를 그만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면서도 선수들은 배트를 휘두르고 글러브를 내밉니다. 필연성을 추구하여 시합의 전개를 예측하고 스스로를 통제하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라운드에서 벌어지는 일에 자신의 몸을 기꺼이 던집니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믿고 몸을 내맡길 만큼 강인한 것입니다. 저는 그처럼 강인한 선수들을 동경합니다. '지금'이 태어나는 순간을 목격하다 때때로 울컥하기도 합니다. (105)
본래 일상생활이란 다양한 상태가 얼룩덜룩하게 섞인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그 얼룩무늬의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일상은 느릿느릿 나아가지요. 그런데 병에 걸린 사람의 일상은 무슨 수를 써도 '환자'라는 상태가 얼룩무늬를 정리해버립니다. 그 결과 역할과 역할이 서로 충돌한 끝에 그저 침묵하게 되어버리죠. (157-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