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3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하여

강박관념 같은 것이었다. 뭐든 해야 한다고. 주 40시간을 일하고도 주말이 되면 밀린 책을 읽어야 한다고, 어딘가에 가거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따위의 강박에 시달려왔다. 그랬다.
1년간 일을 쉬기로 하고서도 그랬다. 제빵을 배워야지. 카프카와 프루스트를 읽어야지. 지하에서 뭔가를 도모해야지. 뭐 이런 생각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40. 꼬박 한 달을 쉬고 든 생각은 10년 뒤에 한 번 더 일을 쉬어야지. 그리고 쉬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지.
그동안 어떤 강박이 나를 사로잡아 왔던 걸까. 그냥 쉰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은걸. 집이 어지러져 있어도 일단 그냥 둔다. 라디오 들으며 김정선의 에세이를 읽는 게 더 좋으니까. 그렇다고 꼭 해야 할 집안일을 방기하진 않는다. 끼니는 챙겨야 하니 식기세척기는 일찌감치 돌려놓았다.
쉬니까, 많은 생각들이 내려앉는 걸 느낀다. 뒤뜰에 잔디의 속살도 더 보이고, 선큰의 계수나무가 말라가는 것도 더 잘 보인다. 평생 이 집에서 함께 할 나무가 금방 자라지 않는다고 조급해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지금 이 곳에 집을 짓고자 했을 때 내가 우리 집에 바랐던 건 풍경이었다. 그냥 우리 집이 동네에 있는 하나의 풍경이고 싶었다. 우리가 심은 나무도 그렇게 우리 집과 어우러져 동네 풍경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집에서 나도 쉬면서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
그런데 사실, 집에 있는다고 해서 쉬는 게 쉬는 것만은 아니다. 휴직을 했다고 어린이집에서 쫓겨난 둘째를 하루 종일 돌봐야 하고, 끼니와 간식을 챙겨줘야 한다. 서로 답답하니 틈나는 대로 동네를 산책하고 수국과 계수나무에 물을 줘야 한다. 뒤뜰에 매일 동네 개가 저지르고 간 똥을 치워야 하고, 비라도 내리면 집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치워야 할 건 없는지 살핀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날이 저물어서 빛이 물러서고 시간의 밀도가 엷어지는 저녁 무렵의 자유는 서늘하다. 이 시간들은 내가 사는 동네, 일산 한강 하구의 썰물과도 같다. 이 흐린 시야 속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연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_김훈, <연필로 쓰기> 74쪽, 문학동네, 2019

지난 금요일에는 양재동에 가서 오디오를 하나 장만했다. 좋은 소리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좀 더 나은 소리를 가진 오디오에 관심이 컸고 현재 내 수준에 맞는 오디오를 지금 집에 들이고 싶었다. 한 가지 실수가 있었다면, 청음할 때 지금의 오디오보다 열 배는 비싼 오디오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
새로 산 오디오는 시디 소리가 정말 좋은데 요즘 나는 거의 라디오를 듣는다. 아직 새 오디오의 라디오 수신이 썩 내키지는 않는데 좀 더 나아지리라 생각한다. 지금 오디오 자리에 있던 라디오는 아내가 주말 밤에 후다닥 정리한 응접실로 옮겨졌는데, 그곳에 라디오를 엷게 틀어두면 외출했다가 들어올 때 기분이 색다르다. 주파수는 93.1. 클래식을 잘 몰라도 상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