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227쪽, 창비 2014
김준의 사이트에서 황정은이란 이름을 몇 차례 보며, 나도 읽어봐야겠다, 국내 작가에 대해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지난 일주일, 황정은의 나의 첫 번째 책,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으며 큰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그런데, 비록 이야기는 나의 삶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결코 비상상의 세계는 아닌, 바로 근처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너무나 일상적인. 그래서 은근한 애정이 남는. 그러니까 소설은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들, 우리들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사서 서재에 꽂아두고 싶었는데, 그 자리는 아무래도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 옆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의 존재를 다룬 소설 속 인물들이 3인칭이 아닌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꽤나 비중 있게 다가온다. 더군다나 엄마도, 소라와 나나는 애자로, 존재 고유의 이름으로 부른다. 다만, 지극히 내적인 고백, 즉 나기의 고백에 등장하는 소년만이 '너'로 표현될 뿐이다. 그 고백은 동성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동성애는 아직 우리 나라에서 내적인 고백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