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찰은 기웃거리고 집적거리는 짓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 딴짓을 하거나 여기저기 쏘다니지 말라고 당부할 때 쓴다. "해찰하지 말고 곧장 오너라." 그러니까 해찰은 부질없는 짓거리나 산만스런 분위기, 덜렁거리고 까부는 모양새인 것 같다. 제 갈 길 똑바로 가지 않고 갈짓자로 횡보하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만져 보고, 흥정도 했다가 말도 붙였다가 하느라 원래 어디를 가려 했는지 까먹을 지경이다. 근데, 여튼 집에 가기는 간다. 해찰은 필연적으로 집이 아닌 '언저리'에 먼저 가 닿는다.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이 떨쳐 버렸던 주변부를 지시하는, 이 족보와 어원조차 불분명한 발음은 '주변부' 같은 어휘와 호응하기도 벅차다. 주변부에서도 가장 주변부에 속하는 족속이 제 입에 '주변부' 같은 단어를 올릴 리 없는 것이다. 실은 주변부와 언저비 사이에 무엇이 가로놓여 있는가, 그것이 아무도 모르는 ━ 알려 하지 않는 ━ 우리의 문제다. 언저리는, 주변부로 호명되지조차 못하는 어느 언저리에 있다. 우리말에서 어느 언저리는 어떤 언저리이기도 하고 언저리의 어딘가이기도 하다. 곧, 언저리가 '주변부'와 다른 지점을 꼽자면, 중심부와 대결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리고 수류산방은 곧잘 말해 왔다. "우주는 언저리가 지탱한다."언저리는 가까운 근처이되, 외곽의 경계 밖을 아슬아슬 포함해야 맛이다. 한창 불고 있는 풍선의 겉껍질 같은, 외딴 산 속의 수행자 같은, 그 낱말은, 생각해 보라, 언제고 중심이 아니라 바깥을 동시에 흘끔거린다. 언저리는 주변부의 밖이다. "빅뱅의 기억을 간직한 시원의 윤곽이 지금 이 우주에서 가장 머나먼 곳에서도 더 멀리,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아나듯, "언저리는 중심으로부터, 목표로부터 수줍어하면서 애써 달아나는 움직임이다. 주제와 집단의 바깥을 밖에서 볼 수 있는 자가 언저리를 이룬다. 해찰하는 짓거리는 필경, 어른들이 싫어하는 언저리를 건드린다. 그런데, 이것은 미학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 우리가 아침저녁 매일 오가는 길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마주친다면, 그것은 아주 약간의 해찰궂은 기웃거림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똑같은 작업에서 어느날 어떠한 통찰을 얻는다면, 가장 고전적인 예술적 태도에서 새로운 섬광이 일어났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리라. 해찰의 그러한 찰나들이야말로 "解察" 즉 '풀어 살피'게 할 여지를 부여하거나, 해탈━대자유━를 엿보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이런 모든 의미 붙이기란, 또 얼마나 징글맞은가! 켄트리지 스스로 "주변적 사고"라고 말한 그 작업 방식을 우리말로 다시 "해찰"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해찰일까, 아닐까. 가장 예술적인 듯 보이는 작업이 실은 지긋지긋한 육체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별 것이 아니다. 정작 더 본질적인 데는 대개가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토요일 저녁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부부젤라'를 입에 문 행렬이 서울 삼청동 길을 지난다. 꽉꽉꽉꽉━. 꽉꽉꽉꽉━. 그 행렬은 예술로서 발견되지 못할 것이다. 전복이 일어나는 무렵에는 아무것도 전복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을 이야기하려면 스스로 주변이 아니어야 하므로, 주변을 선언하는 순간 주변이 아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러할 것이다. 여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독선과 폭압의 역사도, 결코 세계적인 예술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다행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나 허무에 빠지지 않고 계속 이 잔혹함을 눈물 없이 견딜, 또 한 번의 작은 명분을 얻는다. 정말 해찰이 무슨 뜻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해찰하는 어떤 상황은 가슴 아픈 것을 수반한다.
<해찰 : 언저리의 미학> 011-015쪽, 수류산방, 2016
작년 초, 아직은 서울에 살 적에 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윌리엄 켄트리지의 전시 <윌리엄켄트리지 : 주변적 고찰>을 보았다. 한 예술가의 단독 전시임에도 그 양이 매우 방대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선이 지루하거나 걸음에 긴장을 놓칠 틈이 전혀 없을 정도로 밀도가 있었다. 무엇보다 내용이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했다. 길게 인용한 이 글은, 감동적인 그 전시를 바탕으로 수류산방에서 펴낸 책의 서문인데, 전시 못지 않게 서문 또한 감동적이어서 다소 길지만 옮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