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53)
작가가 홀로 들어가 자신이 마주친 미지의 영역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책이라는 신기한 삶이다. 만약 작가가 그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훗날 다른 이들이 그 길을 따를 것이다. 한 번에 한 명씩, 그 역시 홀로 떠나는 여정이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교류하며, 작가가 닦아 놓은 길을 가로지른다. 책은 고독함, 그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독함이다. (85-86)
나는 읽었다. 책과 편지를 읽으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았다. 나는 썼다. 가끔은 친구들에게 나의 생활에 관해, 주변 사람들의 생활에 관해 썼다. 잠을 자고, 운동을 하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고, 트롤의 침침한 동굴 같은 슈퍼마켓에서 구할 수 있는 낯선 재료들을 가지고 식사를 준비했다. 길동무라고는 지저귀는 새와 털이 덥수룩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말밖에 없는 새벽의 풍경 속을 걸었다. 평화로웠지만 낯설었다.
지진은 오랜 시간 쌓여 온 긴장이 낳은 결과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던 그 긴장이 쌓이는 과정은 볼 수 없다. 긴장은 오직 그것이 터져 나올 때만 볼 수 있다. 아픈 사람과 노인, 죽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 광경이 우리 안에 쌓이고,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의 삶이 바뀐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고 그 모습이 영원히 유지된다. 편리하고 극적이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삶에서 우리는 무언가와 거리를 두고, 되돌아가고, 결심하고,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변화는 대부분 천천히 이루어진다. 내 인생에는 변화를 일으킨 여러 사건이 있었고,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나 위기도 있었다. 루비콘 강을 한두 번 건너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언가를 쌓아가고 있다. (259~260)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352~353)
솔닛의 책은 띄엄띄엄 읽은 것을 제외하면 처음이라고 해야겠다. 그의 명성이 왜 내게 와 닿았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2025년 현재 19쇄가 찍힌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솔닛의 책 중엔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아닐까. 가장 많이 읽히기도 했겠지.
에세이지만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금방 흐름을 놓쳐버리게 되는, 문장 하나 하나가 섬세하고 무게감이 있게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책은, 공감을 깊게 해주는 책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다.
나에게도 솔닛이 경험한 것처럼, "네"라는 이정표가 있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