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말이거나 거짓이다. 예를 들어 생생한 몸이 부패하지 않고는 현명해질 수 없다는 듯 노년의 지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그렇다. 노인은 천천히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고 천천히 경직되고 멍청해진다. 이제는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것에 대해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멍청해졌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수 있다면, 다만 두 가지 관점에서 노년이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 쓸모가 있다는 것뿐이다. 우리에겐 담보물들의 나사를 죄어 결국 어느 정도 그럴듯한 전기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기억들을 오랫동안 갈고 연마할 시간이 있다. 또한 우리는 지속되는 몰락과 함께 자기 자신이 귀찮아져서, 인생에서 가졌던 것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것인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도록 어느 날엔가 죽음이 다가오기를 고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멍청해지는 속도보다 부패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경우에만 해당된다. (118-119)
나는 평생 너무 확고하게 자연을 신봉하느라 충분히 좋은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아무리 클로드 로랭의 그림이라 해도 바다를 그린 그림을 보면서 바다 자체에 대해서보다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자연의 기술적 독창성은 제쳐두고라도 내게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가 항상 능가할 수 없는 예술작품으로 여겨졌다. 비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자연 안에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구조역학 전문기사라도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고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모방이다. 콘센트에서 마이크로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모방일 뿐이다. 바퀴조차도 그렇다. 구(球) 모양이 없다면 바퀴도 없다. (135-136)
순수한 감사의 시간은 사랑의 첫 단계이다. 어떤 사랑이나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원했던, 또는 심지어 우리 안에 파묻혀 깨어나지 않은 채 숨어 있던 특성들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가 더불어 사는 데 익숙해 있던 다른 특성들을 몰아낸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소심함과 우리의 악의에서 구원된다. 우리는 가장 사악한 적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의 행복으로 모든 나무와 모든 거리와 모든 순간을 환하게 비추고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한다. 우리는 하늘과 비와 바람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고 또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148)
나는 당시의 내 상태를 나의 자연적인 정상 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속박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강력한 내적 욕구만을 따랐기 때문이다. 프란츠와 내가 그렇게 동물의 세계에 관심을 돌렸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는지 나는 그때 이미 숙고해보았다. 나는 멸종한 독거성 동물에 관심을 가졌고 프란츠는 단일 표본으로서는 생활에 부적격하고 무리를 지어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작은 개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가. (172-173)
개미들의 생활은 매우 이성적으로 질서가 잡혀 있어서, 그것을 정서적으로 미화하고 싶은 아주 작은 욕구에 대해서 일말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173)
"내 아버지가 옳았어. 사람은 인생의 것이지. 그리고 아버지를 위한 인생이 루치에 빙클러였다면 아버지는 그녀의 것이었어."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