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31

소소한 것, 언뜻 무용해 보이는 것, 스스로에게만 흥미로운 것을 모으는 재미를 아는 사람은 삶을 훨씬 풍부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수집가만큼 즐거운 생물이 또 없고 수집가의 태도는 예술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항상 다니는 길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는 곳을 매일 여행지처럼 경험하는 사람들이 결국 예술가가 되니까.  

_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위즈덤하우스, 2021, 95쪽.   


정세랑의 글을 읽으면 인터뷰에서 그가 말하는 어투의 발랄함이 자꾸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글이 그를 닮아 있다. 


‘그럼 진짜 여권에다 받을까?’ 하고 여권의 뒷장에 기념 도장을 받아버린 것이다. 어쩐지 찍어주는 사람이 “너희 괜찮겠니?” 하고 걱정해주더라니, 여권은 정말 중요한 공문서고 그런 훼손 행위를 해서는 결코 안 되었다… 나의 경우 별문제 없이 몇 년 후 여권 유효 기간이 끝나서 괜찮았는데, W는 2016년 마카오에서 배를 타고 홍콩으로 들어가다가 그 도장이 문제가 되어 네 시간 동안 억류되고 말았다.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 국가의 도장이 찍혀 있는지 뒷방으로 끌려가서 해명해야 했다. (같은 책, 257쪽)

 

대만에 갔을 때, 장개석 메모리얼이었던가, 에 갔다가 기념 도장을 찍을 만한 데가 없어 여권 뒷장에 무턱대고 찍었던 기억. 그리고 위구르에 갈 때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 못했던 기억. 그때 여권을 새로 발급받았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건, 그냥 여권을 새로 발급받으라고 조언해 주었던, 지금은 세상을 떠난 사촌 형의 모습.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어리석었는지. 고민되는 지점이 있으면 그냥 그 지점과 대결하면 되는 것을. 형의 쿨하고 선한 모습이 그립다. 

책을 많이 읽을 땐 책 속에서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듣기도 많이 들으니 팟캐스트에서도 책 정보를 많이 얻게 된다. 그 중 정세랑이 소개한 데버라 리비의 책(<살림 비용>, 플레이타임, 2021)도 아주 인상 깊었다. 


불확실하던 그 시절, 내가 불확실에 내재된 불안을,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감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준 얼마 안 되는 활동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서러움에서 부화한 걸지도 모를 구상이 떠오르거나 다가올 때마다, 이 착상이 내 집중된 주의력은 물론이고 분산된 주의력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수의 구상을 시간의 여러 차원에 걸쳐 펼쳐 보이는 것이 곧 글 쓰는 삶이라는 원대한 모험이다. 그런데 내겐 글을 쓸 곳이 없었다. (41쪽)


글쓰기는,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는, 표면적인 현실 이면으로 비집고 들어가라는 초대이자 눈앞에 놓인 나무만 볼 것이 아니라 나무 내부의 기반 시설 가운데 살아가는 곤충들을 보라는 초대, 모든 것이 언어와 생활이라는 생태계 안에 서로 연결돼 있음을 발견하라는 초대였고, 이것이 글쓰기가 지닌 호소력이었다. (49쪽)


하지만 말을 찾기 위해 들여야 하는 고된 노력이 언어란 살아 있는 것임을 내게 지각시키고,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란 사실 또한 상기시켰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우리는 자기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우지만, 언어를 중단하는 것이 적당한 언어를 찾는 것 못잖게 중요한 순간들도 있다. 진실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손님 중에서 반드시 가장 재밌는 손님으로 꼽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뒤라스가 암시하듯 우리에겐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항상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1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