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집에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하며 애플뮤직을 열어 '입영열차 안에서'를 재생했고 스테이션을 생성해놓았더니 그 시절 노래들이 줄줄 이어졌다. '내 마음 속의 너', '비처럼 음악처럼', '달의 몰락'... 줄곧 입이 바쁘게 흥얼거리며 저녁 준비를 하고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온이가 밤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안 될 거 없지. 작년 이 맘 때 우린 매일 저녁 산책을 했으니까.
밖으로 나오니 아이 둘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 앞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동네 이웃을 만났고 자연스레 산책을 같이 하며 그 분의 작업실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분이 내준 민트티를 마시며 나는, 아 나는 그만 저 아늑한 곳으로 빠져버렸다.
어떤 여행에서였다. 다들 마시는, 얼핏 보기에도 향긋해 보이는 초록 잎이 글라스 바닥에 깔린 그 뜨거운 차. 민트티였다. 거의 매일, 수시로, 여행하는 내내 마셨던 그 차. 그 향기. 그것이었다.
그런데 헷갈렸다. 모로코였나, 이스탄불이었나. 아이들이 과자를 얻어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중에도 내 손은 글라스를 잡고 있었고 머리는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어디였나, 어디였지, 대체.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여행의 궤적을 좇고 있었고 하나 하나 떠올려보려 했는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기억이 아닌 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2010년과 2013년 사이가 문제였다.
2005년 인도&네팔, 미국
2006년 인도
2007년 쿠바
2009년 프라하
2010년 라오스
2011년 모로코
2012년 카슈가르, 홋카이도
2013년 베를린&암스테르담
2014년 히말라야
2015년 웨노섬
2016년 오키나와
2017년 이탈리아&파리, 더블린&로테르담
모로코였다.
페스에서의 산책을 또 다시 포기하고 카페 노리아에서 민트티를 마시고 다시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환전은 여전히 못 하고 있었고 남은 50디람으로 저녁과 혹시 있을지 모를 배고픔에 대비해야 했다. 다행히 정원에서 숙소로 오는 길에 길게 시장이 늘어서 있었고 눈에 띄는 대로 바나나와 복숭아, 빵과 숙소 앞 가게에서 물과 비스킷을 샀다. 푸짐했다, 나름. (2011년 8월 29일 새벽의 기록)
페스, 모로코, 2011 |
하지만 프루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내 추억 여행은 추억의 깊이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 추억을 줄줄이 소환해내는 것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의 열망으로 피어올랐다. 여행을 마치 의무처럼 대했던 시절도 있었고 그것 없이는 어떤 의미가 결여된 것처럼 여기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마도 아이가 생긴 이후겠지만, 그 감각이 현실과 상호작용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와버렸다.
여행을 언제 했더라.
여행을 하고 싶다. 아무 의심 없이 떠나는 것과 낯선 어느 곳에 덩그러니 놓여진 그 느낌이 문득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