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3

더위에 장사 없다. 물론 이 말을 하기에 아직 한여름 더위는 아니지만 더위는 성큼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그리고 둘째 담이 머릴 단발로 했으면 좋겠단 내 바람은 더위 앞에 자취를 감췄다. 이발하러 가자고, 손으로 가위질 시늉을 하며 담이한테 얘기할 때만 해도 담이는, 싫다는 '의미'의 의성어를 냈다. 하지만 막상 미용실에 데려가 뽀로로가 나오는 화면 앞에 앉으니 그렇게 순한 양이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담이 직전 아이가 얼마나 울부짖었던가. 오랜만에 간 마트에서 에스컬레이터 타기에 자신감이 충만해서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담이는 아주 짧게 커트를 했고 그것은 보는 사람마저 시원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곧장 중얼거렸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집에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하며 애플뮤직을 열어 '입영열차 안에서'를 재생했고 스테이션을 생성해놓았더니 그 시절 노래들이 줄줄 이어졌다. '내 마음 속의 너', '비처럼 음악처럼', '달의 몰락'... 줄곧 입이 바쁘게 흥얼거리며 저녁 준비를 하고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온이가 밤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안 될 거 없지. 작년 이 맘 때 우린 매일 저녁 산책을 했으니까.
밖으로 나오니 아이 둘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 앞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동네 이웃을 만났고 자연스레 산책을 같이 하며 그 분의 작업실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분이 내준 민트티를 마시며 나는, 아 나는 그만 저 아늑한 곳으로 빠져버렸다.

어떤 여행에서였다. 다들 마시는, 얼핏 보기에도 향긋해 보이는 초록 잎이 글라스 바닥에 깔린 그 뜨거운 차. 민트티였다. 거의 매일, 수시로, 여행하는 내내 마셨던 그 차. 그 향기. 그것이었다.
그런데 헷갈렸다. 모로코였나, 이스탄불이었나. 아이들이 과자를 얻어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중에도 내 손은 글라스를 잡고 있었고 머리는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어디였나, 어디였지, 대체.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여행의 궤적을 좇고 있었고 하나 하나 떠올려보려 했는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기억이 아닌 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2010년과 2013년 사이가 문제였다.

2005년 인도&네팔, 미국
2006년 인도
2007년 쿠바
2009년 프라하
2010년 라오스
2011년 모로코
2012년 카슈가르, 홋카이도
2013년 베를린&암스테르담
2014년 히말라야
2015년 웨노섬
2016년 오키나와
2017년 이탈리아&파리, 더블린&로테르담

모로코였다.

페스에서의 산책을 또 다시 포기하고 카페 노리아에서 민트티를 마시고 다시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환전은 여전히 못 하고 있었고 남은 50디람으로 저녁과 혹시 있을지 모를 배고픔에 대비해야 했다. 다행히 정원에서 숙소로 오는 길에 길게 시장이 늘어서 있었고 눈에 띄는 대로 바나나와 복숭아, 빵과 숙소 앞 가게에서 물과 비스킷을 샀다. 푸짐했다, 나름. (2011년 8월 29일 새벽의 기록) 

페스, 모로코, 2011

하지만 프루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내 추억 여행은 추억의 깊이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 추억을 줄줄이 소환해내는 것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의 열망으로 피어올랐다. 여행을 마치 의무처럼 대했던 시절도 있었고 그것 없이는 어떤 의미가 결여된 것처럼 여기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마도 아이가 생긴 이후겠지만, 그 감각이 현실과 상호작용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와버렸다. 

여행을 언제 했더라. 

여행을 하고 싶다. 아무 의심 없이 떠나는 것과 낯선 어느 곳에 덩그러니 놓여진 그 느낌이 문득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