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2

이사를 하고 난 뒤, 집에 오면 늘 뭔가에 분주하다. 무엇이 그리 눈에 띄고 또 하게 만드는지. 오늘은 집에 왔더니 약간은 시큼하면서도 눅눅하고, 그러면서 신 냄새가 났다. 그래서 우선 베란다 창을 모조리 열고 정체가 무엇일까 살피는데 주범은 바로 주말에 집에 꽂아두었던 꽃이었다. 칠할 이상이 크게 시들어버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얼핏 보아도 썩은 듯한 물은 흐릿한 색으로 묵직한 냄새를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물을 비워내고 시든 꽃은 신문에 싸서 버린 후 약간 남은, 한 움큼도 되지 않는 산 녀석들을 다시 새 물을 받아 원래의 자리에 놓아두었다. 그래도 음악과 책만이 가득한 이 허전한 집에 녀석이 있으니 사뭇 다른 느낌과 기분이다. 
수건을 비롯한 빨랫거리들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샤워를 한 뒤 마른 옷가지를 정리하고 행주를 삶고 그 사이 세탁이 완료된 빨래를 널고 테이블에 앉아 사흘치 신문을 천천히 훑는다. 신문에서 발견한 몇 가지 단어. 
무라카미 하루키, 수색중단, 36년, 우승, FTA.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정치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이른바 ‘무상’ 논쟁이다. 다시 또, 재벌 손자에게 밥을 왜 주냐는 이야기가 제 목숨 죽은 줄 모르고 고개를 든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지긋지긋한 정치인들도 개개인의 면면을 보면 그들의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제법 훌륭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들이 모이면 대체 왜 그 모양일까. 예산 논쟁은 보나마나 연말까지 지루하게 이어질 테고 그 지루함과는 별개로 우리는 벌써 한 해가 다 갔다며 시간 앞의 속수무책을 한탄하겠지. 
몇 해 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한 오래된 나는 어딘가로 가고픈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서 전철에 몸을 실었다. 춘천행이었다. 제법 추웠던 기억, 낭만시장이라 이름 붙인 중앙시장엔 중국 관광객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유명한 닭갈비 골목도 긴 줄의 수를 헤어리기 어려울 만큼 북적였다. 나는 시장에 있는 작은 분식집에 들어가 끼니를 보통으로 해결하고 꽤나 한적해 보이는 카페를 찾아 실망스러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일기를 썼다. 

춘천이다. 물론 계획에 없던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뒤척이고 있는데 밖에서 눈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다를까 커튼을 살짝 밀쳐 밖을 보니 한바탕 눈이 내린 뒤였다. 여전히 날씨는 잔뜩 흐리기만 하고. 산책을 하려던 계획은 이내 숨어버리고, 첫날인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 싶은 생각에 잠실에 있는 삼백집에 가서 점심이나 먹을 생각으로 근처에 사는 친구녀석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방에 가 있다고 하고, 길상사에나 다녀올까 싶은 생각을 잠시 하다가 문득 춘천이 떠올랐다. 
‘기분과 희망’이란 단어만 공허하게 떠있는 맥북의 화면을 넘겨 경춘선 열차를 검색했다. 가는 방법은 두 가지. 청춘열차를 타느냐 전철을 타느냐. 가는 열차는 이미 매진이 돼 돌아오는 열차만 예매를 하고 씻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상봉역에 내려 춘천행 열차가 출발하는 곳으로 달렸다. 눈앞에서 열차를 놓쳤는데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허전했던 플랫폼엔 어느새 경춘선 전철을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심보선을 읽다 손이 시렵고 집중도 안 되던 나는 가을방학을 들으며 내심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30분을 차가운 플랫폼에 서 기다려야 했지만. 
한 대의 아늑해 보이는 청춘열차를 보내고 난 뒤 전철이 플랫폼에 도착하고 라인의 끝에 자리를 잡은 나는 심보선 대신 로맹 가리를 집어든다. 단편집을 읽다 졸다 밖을 내다보니 세상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어느새 나는 북해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코다테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내린 눈을 맞으며 걷던 언덕과 도심을 가르는 전차에서의 내 모습을. 가평과 강촌에서 절반 가량의 사람들이 빠진 전철은 한 시간 남짓 달려 남춘천역에 도착했다. 지도 하나 없이 그곳에 내린 나는 이정표를 보며 효자로를 따라 시청 쪽으로 걸었다. 눈은 그쳤지만 길은 미끄러웠고, 두툼하게 옷을 입어 춥진 않았지만 노출된 얼굴은 걸음이 계속될수록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춘천엘 다녀왔다. 일로써 다녀오긴 했지만 스산한 겨울 냄새로 가득한 그곳은 시린 정겨움이 있었다. 서투르게 기억나는 도시의 길을 벗어나 일행 중 한 분이 미리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해질 무렵이 지나 사위가 어두웠지만 숙소의 아늑함과 무엇보다 시내에서 십여 분 벗어났음에도 완전히 분위기를 달리하는 동네의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하룻밤을, 따뜻하지만 건조하게 보낸 뒤 아침은 숙소 주방에 마련된 토스트와 커피, 어젯밤 사온 과일로 대신했다. 그리고 일을 보고서는 점심을 먹고 일행과 헤어져 다시 나는 ‘남춘천역’에서 청춘열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많이 잤는데도, 겨울 풍경이 창밖에 무수한데도 나는 잠을 잤다. 강촌에서, 청평에서 깼지만 다소 포근하고도 낮은 기분으로 잠을 잤다. 
집에 돌아오니 흐트러진 사흘치 신문과 시들어버린 꽃이, 주인 없는 집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은 이제서야 데미안 라이스의 새 앨범으로 몸을 떨며 겨울, 이 저녁을 뜻하지 않은 한가로움과 교차하는 분주함으로 눈을 밝히고 있다.